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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나오는 건 오랜만이로군!]
광장의 그 누구보다도 거대한 형상이 장작불에서 걸어 나왔다.
둘러싼 테이블을 통과하며 나온 실체가 없는 듯한 형상에는 점차 뚜렷한 형상이 나타나 거대한 전사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가랑눈이 전사에 닿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관객들의, 귀족들의, 사제들의, 번제자들의 귀에는 오로지 무기가 부닥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성이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위와 계급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귀족들조차 알프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자 너나할 것 없이 동참했다.
단상에 서있던 아이오나는 허겁지겁 단상에서 내려와 허리를 천천히, 그렇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공손히 숙였다.
[그래! 이거야! 축제는 모름지기 시끌벅적해야지!]
"...승천자이시여.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신을 위하는 축제.
신의 업적을 축하하는 기념일.
평소라면 선택된 제물이 그저 눈에 둘러싸여 사라졌을 텐데.
앞서 환호한 누군가의 말처럼.
그 신이 친히 강림했다.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좀 늦었지? 원래는 조금 더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말이야. 추운데 고생할 텐데 이거 망할 여편네가 뜯어말리지 뭔가.]
"승천자시여. 저희는 언제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필요 없다.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 예식이니 위엄이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저는 겨울의 여주인의 종복이옵니다."
난처한 아이오나는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겐 다행히도 전사는 딱히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망할 여편네의 유혹에 안 넘어갔을 거라며 전사가 어울리지 않게 투정 부리자 광장 모두가 일제히 식은땀을 흘렸다.
그야 지금 위대한 전사신 투타티스가 망할 여편네라고 부르는 이는 겨울의 여신. 스카디였으니까.
특히나 아내를 가진 남편들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무심코 그 모습에 공감이라도 해버렸다간 곧바로 불경 직행이었다.
물론 결코 옆자리에 있는 아내의 등쌀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품위 없게 제례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나가라고 하더군. 아, 아아. 겨울의 군주야. 내려올 필요는 없다. 군주의 가족과 그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찌 일개 필멸자가 신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나도 왕년엔 그 필멸자였는데 무얼. 신경 쓸 것 없다. 그런 허례허식은 역마살 낀 이름도 없는 놈이랑 망할 여편네한테나 챙겨.]
알프레드와 상석에 앉은 이들은 엉거주춤하게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거 불경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장본인, 아니 장본신이 도로 앉으라는데 뭐...
다만 그 신이라고 하기엔 소탈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위압되어 숨도 못 쉬고 있던 카렘은 점차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를 접하면 뇌가 마비된다고 했던가.
카렘은 정확하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무언가가 말을 할 때마다 귓가에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를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 신이 하는 말들이 조금 깨긴 했다.
물론 그 덕분에 금방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뭐랄까.
신을 상상할 때의 엄숙함은 딱히 없었다.
하는 말만 들어보면 신이 아니라 숫제 성격이 털털한 전사 그 자체.
결혼 전에는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는데 막상 결혼하니 완전히 다르다고 관객 모두를 식은땀에 절이던 전사신은 이내 만족했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보통은 그냥 선택했을 텐데. 하나같이 만족스러운 것들밖에 없어 고민되더군. 그래서 내가 직접 둘러보려고 왔지.]
"허어,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사제들에게..."
[아아아. 그럴 필요 없어.]
"예?"
[내가 직접 구경하면서 고르도록 하지. 상관없겠지?]
광장을 둘러본 투타티스는 사람들이 환호하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잔상을 남기며 모닥불의 테이블에 걸어가 제물들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카렘은 뭐랄까.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전생의 신을 믿는 사람이 억 단위로 존재했지만 카렘은 천생 무교였다.
정확히는 신의 존재를 믿기는 했다.
숭배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야 지구천지 복잡기괴라는 말이 있듯 오만가지 일이 벌어졌고 벌어지는 세상인데 솔직히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믿기 힘들었다.
다만 직접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전생 기준으로 있을 수 없는 짐승과 몬스터가 있었다.
이에 위협받고 사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법을 추구하는 이들과 함께 신을 믿고 그 힘을 빌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카렘은 드디어 신을 볼 수 있었다.
[하, 이거이거 무기들 좀 보게. 정말이지 여기서 최고를 하나만 고르라니 너무 힘든데.]
"이 모든 제물은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지만 축제를 생각해서는 최고를 하나만 꼽아야겠지.]
이거 고민이라면서 테이블을 둘러보며 제물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모습이 딱 카렘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게임샵이나 프라모델샵에서 이성을 잃고 기뻐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아저씨. 아니면 백화점을 둘러보며 아이쇼핑을 하는 아줌마.
그렇게 카렘이 일방적으로 내적 친밀감을 조금씩 쌓는 동안.
축제에 친히 강림한 전사신의 쇼핑은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환호하던 사람들도 과연 신이 어떤 제물을 선택할지 궁금하다면 긴장과 기대를 담아 보고 있었다.
그저 보는 사람들이 이런데 그 제물을 준비한 당사자.
번제자들 대다수는 환희와 경악,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한 모습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카렘은....마음이 무척 편했다.
'역시나 전사신답게 무기를 선택하시겠지.'
그 생각대로 투타티스는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제물을 감상했다.
특히 지그메서의 푸딩과 카렘의 포르게타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역시 전사신답게 무기에 더 깊은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지그메서 또한 카렘과 같은 심정이었다.
'설마 친히 강림하실 줄이야. 정말 감격스럽군. 그래도 목표는 달성했으니 아무렴 상관없겠지.'
카렘은 아무튼 신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만족했고.
지그메서는 알리시아의 관심을 일단 되돌렸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 외의 번제자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바친 제물이 선택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들을 살피던 투타티스는 고민을 끝마쳤는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알 수 없는 문자로 도배 음각된 자루를 물어뜯듯이 고정된 말끔한 몸체와 부채꼴로 퍼지듯이 나아간 날카로운 날.
그것은 도끼였다.
사람이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없는 양손 외날 도끼.
다만 투타티스의 거대한 체구에 잡히자 비율 탓인지 한손 도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주 훌륭한 도끼야. 내 생전에도 승천 후에도 이만한 물건은 몇 번 본 적이 없었지.]
"그 도끼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최고의 재료를 준비한 것도 성능도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한.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남은 삶을 모조리 불태워 두드린 노력과 정성. 그 모든 것이 말이다.]
그리고 투타티스는 번제자들 중 유난히 피부가 까만 인간 노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작자를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처음에는 질투하던 이들도 노인을 보자 금세 감탄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로 보이는 노인의 피부는 불에 그을려 고목 같은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양손의 얼핏 돌처럼 보이는 굳은살.
전신에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까지.
그야말로 온몸으로 자기가 대장장이란 것을 증명하는 모습.
제물에만 집중하느라 지나쳤던 장인으로서의 정점에 다다른 그 노인에 번제자들은 종족에 상관없이 마음속으로 존경심이 절로 솟아났다.
투타티스가 소리쳤다.
[늙은이! 이름을 말해라!]
"미, 미천한 저의 이름은 고파인이라 합니다."
[미천하다니! 헛소리하지 마. 넌 너의 삶에 당당해도 좋다. 왜냐하면, 내가 너의 이름을 기억할 테니까.]
전사신은 도끼를 가볍게 어깨에 짊어지고 선포했다.
고파인이라는 대장장이 노인은 감격한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신이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장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드높은 영광스러운 명예였다.
[그리고 제물을 준비한 다른 놈들도 그렇게 실망할 건 없다. 내가 보기에 다른 제물들도 하나같이 훌륭했으니까. 그저 이 고파인의 도끼가 매우 뛰어났을 뿐이야.]
"전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자신의 삶을 신에게 인정받은 노인은 힘이 다 풀렸는지 바닥에 쓰러지듯이 엎어져 오열하기 시작했다.
신에게 인정받다니.
당장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상하기만 해도 감격스러워서 하는 것이 사람일진대 무려 신에게 직접 칭찬을 받는다니.
카렘은 그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전생의 신화와 설화에나 있던 일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휴,"
카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어찌 됐든 정성이 부족하다며 불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내 실력이 어디 뒤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란 것이겠지.
캐서린이 반쯤 장난으로 말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나머지 반은 진실이라는 것.
카렘이 따로 알아보자 자격 미달의 제물을 바쳤다가 신벌을 받은 추천인과 번제자는 실제로 존재했었다.
마법도 있는데 천벌도 있겠지.
카렘은 그때부터 졸이다 못해 쪼그라들었던 마음을 비로소 안심하고 필 수 있었다.
[흠. 무게중심, 형태. 기능성 있는 장식까지 어딜 봐도 아주 훌륭해. 아 맞다.]
가볍게 도끼를 움직이며 가늠하던 투타티스는 이내 장작불 주변의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어 손가락을 튕겼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제물들이 일제히 불이 붙었다.
[그럼 난 이마아아아안. 음?]
그리고 도로 활활 불타는 장작불을 향해 몸을 돌리던 투타티스는 그대로 멈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족하고 돌아가려던 전사신이 갑자기 멈추자 난데없이 늙은 나이에 신을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던 아이오나는 긴장했지만, 이내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으신지요?"
[그래.]
그대로 몸을 돌린 투타티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번제자와 사람들을 지나쳐 상석의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신이 다가오자 상석의 모두가 기겁했다.
특히나 고드윈은 간이 떨어질 뻔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라고 할 수 있는 시간.
저 멀리 있던 전사신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기겁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고드윈은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 신의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이거, 네 것이냐?]
"그으으으렇습니다. 신이시여. 원하신다면 기꺼이 바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허락받아도..."
[음, 이렇게까지 반응이 솔직하면 좀 미안한데.]
어쨌든 된다고 했으니 받겠다며 투타티스는 고드윈의 오른편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그릇을 열어 마요네즈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카렘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신과 눈을 마주친 카렘은 뜨악했다.
하지만 투타티스는 제법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이거 독특한 꼬마가 하나 있었군.]
그리고 마요네즈 그릇을 들고 그대로 장작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이 모습을 감추자 장작불은 아직 장작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그대로 연기를 뿜으며 꺼져버렸다.
"투타티스를 위하여!!!"
"맙소사. 내 생에 전사신을 두 눈으로 보는 날이 있을 줄이야!"
"오, 여보.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백 년 만에 전사신의 화신이 윈터센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벅찬 사실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할 때, 상석에 앉은 몇몇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상석에서 신을 봤던 사람 중 일부.
더 구체적으로는 고드윈을 위시한 누가 마요네즈를 만든 지 아는 이들과 캐서린, 메리가 그대로 상석의 밑으로 고개를 내렸다.
'음, 시선이 늘었는데. 불안한 느낌.'
시선의 끝에는 난데없는 당황한 카렘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