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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렘은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새하얀 지평선을 가득 메운 언데드 떼거리는 프레젠트의 성벽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데 산맥 너머에서 몰려오는 군세가 과연 애프터글로우 요새를 넘을 수 있을까 싶었다.
요새는 현대 기준으로 어지간한 빌딩은 따위로 할 만큼 높았다.
그런데 그런 빌딩이 몇 겹으로 겹쳐져 능선을 통째로 틀어막았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리고 요새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던 카렘의 어깨를 고든이 두드렸다.
"흐으으으으으- 뭐, 뭔데요. 허어어어"
"저길 좀 봐봐."
"후우우우우. 예? 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반대로 비상식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된다는 뜻.
숨을 몰아쉬던 카렘은 무심코 입을 벌렸다.
비상식적인 군대가 천천히 몰려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썩어 문드러져 뼈가 보이는 매머드.
찢어진 피막과 가죽을 덜렁이는 린드블룸
.
하늘을 날지 못해 날개로 땅을 짚으며 다가오는 와이번.
뼈와 살점을 떨어트리며 팔을 땅에 질질 끄는 트롤과 오우거.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대형 언데드 사이로 사람과 동물, 몬스터가 섬뜩할 정도로 주변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오로지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넋 빼놓는다고 상황이 해결되나? 얼른 정신 차려! 어이, 얼른 지휘부로 안내해라!"
캐서린의 호통에 넋을 잃었던 일행은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종은 캐서린의 재촉에 일행을 지휘실로 안내했다.
"트롤, 오우거는 그렇다 치고 메머드에 린드블룸에 와이번. 당장 보이는 건 그 정도. 허 참. 잘도 이렇게나 다양하게 모아놨군."
"펑거스비나 나르케는 애들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데요."
"나르케? 누군진 몰라도 저 대형 몬스터로 언덕이라도 쌓으면 일이 심각해지겠어."
"예? 언덕 말입니까? 아-"
캐서린의 말에 뒤따르던 카렘의 머릿속 저편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가 안전하리라 믿었던 높은 장벽과 고층 건물.
그리고 미쳐 날뛰며 몸으로 탑을 쌓아서 넘어 오르는 모습.
비록 지금은 가물가물한 게임과 영화였지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섬뜩하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아, 좀 소름 돋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거."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저 시체 군세가 그럼 이 요새를 어떻게 공략할 거라 생각해? 물리적으로 부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일반적이면 보통 내부 협력...아."
고든은 조금 전 캐서린의 방에서 들었던 비명을 떠올렸다.
일행의 가장 앞에서 시종을 뒤따르던 캐서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요새의 병력 전원에게 성수와 그-"
대체품을 떠올리자 캐서린은 아직도 떨떠름한지 고개를 저었다.
"콩 가룸 스튜를 돌렸으니 언데드니 마족이니 다 잡혔겠지."
"네. 세 번째가 마지막이었데요."
"세 번째? 언제 물어보기라도 했냐?"
"메리가 문밖에서 들었대요. 그렇죠?"
그 말에 메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인지 로완 씨였던 것 같은 마족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나저나 꼬마야."
"네."
"그 콩 가룸은 넉넉하게 있냐?"
카렘은 잠시 고개를 기울여 주방에 통째로 넘기기 전 배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된장의 양을 대충 가늠했다.
"어...글쎄요. 못해도 수백 인분은 남아있을걸요?"
"그러면 긴급할 때 물에 타서 사용할 수는 있겠지.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는데. 그게 신성력을 품고 있다니. 그것도 성수 대용으로 쓰일 만큼. 대체 어떻게? 왜?"
"글쎄요. 메주를 만들 때 매일같이 제물 바치고 기도하고."
그다지 특이할 건 없는 일상이었다.
만일 조금 더 생각했다면 일행은 정말로 신이 기도를 이뤄주었다는 경악스러운 진실을 깨달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눈살을 헤치고 지휘부와 가까워지자마자 환영한다는 듯 우렁찬 호통 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왔다.
"뭐? 승강기 자리가 없다고? 네놈들 몸뚱아리에 달린 근육은 장식이냐! 자리가 없으면 몸으로 옮겨!"
콰앙! 마지막 호통과 함께 곰 같은 덩치의 전사들이 걸음아 날 살리라는 듯이 눈바람을 휘날리며 지휘부를 빠져나왔다.
"요즘 어린 것들이 빠져서는. 하나같이 몸 편한 것만 찾아대고. 아, 손님들이로군. 안으로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하나?"
커다란 배럴로 한쪽 벽을 꽉 채워진 지휘부의 중앙에 리처드는 테이블을 팔로 짚으며 서 있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떻다고 할 것은 아직 없지. 아직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반대로 내가 묻고 싶은데."
리처드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의 토큰을 옮기고 고개를 들었다.
"아타니타스 공. 스타크 경. 그대 둘은 그간 아이스랜드에만 처박혀있던 나와는 달리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겠지."
"어, 변경백 각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빈말할 필요 없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좋아. 파악한 것을 말하게."
리처드는 일행을 향해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뭐, 제 눈에는 걸리는 점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고든은 허리춤에 걸린 롱소드의 폼멜을 만졌다.
"달려오는 놈들은 안 보이더군요? 저렇게 덩치 큰 언데드도 그렇지만 구울이나 와이트조차도 말입니다."
"그건 아이스랜드에서는 당연한 일일세."
리처드가 의자에 털썩 앉자 테이블 위에 놓인 토큰들이 진동했다.
"이제 곧 겨울이고 아이스랜드는 겨울의 여주인의 은혜가 곳곳에 미치고 있지. 설령 봄, 여름이었어도 약체화하는 언데드가 이 계절에 제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설령 그게 타자에 의해 일어난 언데드라고 해도 말일세."
그저 좀비로 일으키기만 해도 상급 언데드가 되다 못해 하늘까지 날아다니는 아룡종 린드블룸과 와이번이 지금 땅을 기어 다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만 뭐랄까. 하나같이 너무 자연산 언데드나 죽기 직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그 말에 지휘실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모였다.
"지금 저 군대를 일으킨 장본인-"
"그래. 멀찍이서 한 바위 골렘 같은 거인 하나가 일으키는 것을 봤지. 협력자도 있었는데. 마법사나 주술사로 보이는 그리즐리 비버-"
"그러면 거인이겠군요. 힘을 다루는데 한참 미숙합니다."
캐서린은 확실하다는 듯이 단정 지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힘을 과하게 가진 어린이로군요."
"예?"
카렘은 무심코 뚫어지게 캐서린을 바라봤다.
이는 메리와 고든, 리처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숙? 저만한 시체의 대군단을 이끌고 오는데. 뭐? 힘이 과한 어린이?
"저기. 아타니타스님. 저쪽은 지금 나르케의 찍찍이나 짹짹이랑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군대를 끌고 오고 있는데요. 대체-"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맨시는 각종 편견의 대상이 되기에 십상이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의 한 갈래. 한 개의 학파에 불과해."
쿠웅-! 쿠웅-!
캐서린의 말은 잠시 끊겼다.
지휘실이 진동함과 동시에 바깥에서 폭발에 가까운 발리스타 소리가 울렸다. 이내 쾅! 하며 착탄 하며 언데드를 분쇄하는 소리가 멀찍이서 잔잔하게 들렸다.
"저 정도 되는 언데드 대군세를 조직할 정도로 경지를 쌓은 네크로맨서라면 분명히 대마법사겠지. 그것도 수십 년 혹은 이상을 공들였을 건 분명해.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듀라한, 데스나이트, 살점거인, 아귀, 나르체러, 알구울 같은 변종과 아종을 비롯한 그 어떤 혐오체 제작물은 끄트머리도 없다."
캐서린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비단실 같은 금발이 흘러내렸다.
"내 눈엔 그저 숫자가 좀 많고 덩치가 좀 많이 큰 좀비로만 이루어진 떼거리로밖에 안 보인다."
"확실히...그렇군요. 저것보다 적은 언데드 떼거리도 종종 악령이나 유령을 끼고 돌아다니는데-"
캐서린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보던 고든은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설마 하는 눈치로 턱을 매만졌다.
되살아나기만 해도 곧장 상급 언데드에 해당하는 각종 대형 몬스터에 정신이 팔렸지 차근차근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조금씩 보였기 때문이다.
"앞뒤로 포위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로군."
"아마 프레젠트 쪽의 언데드 떼거리는 산맥 너머의 떼거리를 부리는 연장선에 해당할 겁니다."
"...내가 하트먼한테서 수상한 언데드 마석을 보고받았는데 설마-"
"예. 아마 네크로맨서 거인이 무슨 짓을 한 여파이겠지...흠?"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아타니타스님? 갑자기 왜-"
"...내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군."
"예?"
캐서린은 대답할 틈이 없다는 듯이 테이블을 박차고 지휘실을 나섰다. 당황하던 카렘은 일행과 함께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리처드와 함께 따랐다.
쿵-! 쿠과앙! 펑! 퍼어어엉! 휘치이이익-!
요새에 각종 공성병기가 발리스타, 얼음 덩어리와 불붙은 돌덩어리가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언데드 군대를 공격하는 가운데 캐서린은 군대의 중앙을 노려보았다.
"아타니타스님! 갑자기 무슨-"
"진짜 위험한 놈은 따로 있었나!"
캐서린은 옆에 둥둥 떠 있던 지팡이를 낚아채 두 손으로 쥐었다.
지팡이가 바닥을 내려찍는 순간 끄트머리에 매달린 호박이 빛을 발했다.
쿵-
지팡이를 중심으로 바닥에 깔린 눈이 캐서린의 마력에 반응해 움직여 미스테리 서클같은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아타니타스! 이게 대체 무슨-"
"상대 쪽에도 저와 같은 급의 실력자가 있습니다."
"뭐라?"
하늘에서 내려 마법진과 가까워진 눈송이는 캐서린의 마력에 감응해 하늘로 떠오른 금빛 머리카락과 함께 두둥실 떠올랐다.
빛을 발하는 호박 주변으로 뚜렷한 마력이 점차 모여들자 애프터글로우 요새와 인근의 마력이 뚜렷한 한기를 내뿜기 시작한 마법진에 동조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갑자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위력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돌풍이 머리 위에서 휘몰아쳤지만, 카렘은 그 어떤 풍압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 전과 똑같았다.
카렘과 같은 일반인도 알아차렸다.
그야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범상치 않은 소리와 일반인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은은하게 빛나는 마력 입자가 캐서린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고든과 같은 마력 사용자는 그보다 더한 것을 봤다.
자연 상태로 존재하던 마력이 충돌했다.
우지지직- 끼기기기기- 그그그그그그-
거대한 의지가 전장에 내려앉은 마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전투를 시작했다.
"허, 설마 대마법사의 주도권 다툼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주도권 다툼이요?"
"그래. 아, 넌 지금 보이지 않겠지."
카렘의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에 고든은 고개를 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자연스러운 돌풍 소리와 파열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두 마력의 주인이 주도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서로의 영향력으로 마력을 움켜쥐고 하늘을 찢어발겼다.
산맥 너머 언데드 군세의 중앙.
투둑-
각종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세를 묘비 요새 앞으로 전진시키던 거인은 고개를 돌렸다.
-족장. 마법을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나. 무엇을 하고 있지?-
그곳에는 피로 눈 바닥을 잔뜩 물들인 채 삑삑삑거리던 비쩍 마른 그리즐리 비버는 몸에 걸친 트로피를 흔들면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삑! 삐익! 끼키키킥-삑!
-...그건 예상 밖이로군.-
대마법사는 단신으로 군단을 저지할 수 있으며 이변이 없다면 같은 대마법사급의 전력이 아니고서야 막을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족장 그리즐리 비버는 거인에게 사납게 고했다.
묘비 요새에 대마법사가 있다고.
-그렇다면 사실상 자네는 무력화된 거나 다름없나.-
사납게 서로를 쥐어뜯고 베어 가르는 날카로운 마력을 올려다보던 거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예상 밖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의 협력자.
일부 들켰을 가능성이 없으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당장 전투가 코앞인데 일일이 이를 분류하기 위해 사제들을 놀릴 틈은 없을 것이다. 그럴 생각도 못 하겠고.
-신호를 보낼 수는 있겠지?-
끼이익-!
-그러면 당장 시작하도록.-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리즐리 비버는 머리에 쓰고 있던 늑대 해골을 집어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지팡이를 부여잡고 다시 집중했다.
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귀곡성에 가까운 비명이 군세의 중심부터 요새까지 진동했다.
내통자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다만, 신호에 응답할 내통자는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