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102호, 저주의 방 - ‘공포의 저택’(4)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6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2호(저주의 방 – 공포의 저택) 현자의 조언 : 3] 생각보다 성당은 깔끔했다. 집사는 반은 폐허가 되었다고 말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깔끔하기 그지없는 저택의 기준이었던가? 이 정도면, 크기도 크지 않으니 반나절만 치워도 예배도 진행할 수 있는 정도다. 집사를 따라서, 예배당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자 배와 호수가 보였다. 폭풍우로 인해 수위가 급격히 오른 호수는 거의 문 근처까지 물이 와서 찰랑거렸다. 그 여파로 인해 배 역시도 뒷문 근처까지 와서 두드릴 기세다. 당연하지만, 배 상태는 처참했다. 외부에 노출된 채로 폭풍우에 휘말린데다가, 급격히 수위가 오르는 과정에서 주변 지형과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온통 진흙 범벅이었다. “확실히 깔끔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운전 자체를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집사님은 배 모실 줄 아시죠?” “물론입니다. 아가씨. 다만, 이 배는 지금 당장 운전하기는 곤란해 보입니다.” 집사가 가만히 손을 뻗어서 배의 외곽을 가리켰다. 급격히 수위가 부상하던 중, 무언가와 부딪치며 파손이 일어난 걸까? 배 안쪽으로 물이 새는 게 보였다. 당장은 천천히 스미는 정도였지만, 수리가 필요한 건 확실해 보인다. “저택에 배를 수리하기 위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걸 가져와서 저 구멍만 막으면, 호수 정도는 건너갈 만합니다. 모터는 멀쩡할 겁니다.” 잠시, 은솔 누나와 눈짓 대화로 의견을 교환한 후, 누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쿨럭, 쿨럭, 에엣취!” “괜찮으십니까? 비바람을 너무 오래 쐬셨군요.” “괜찮아요. 저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도 됩니다.” “아니, 제 생각엔 잠시 몸을 녹이는 게 좋겠습니다. 저택까지 길이 짧지 않습니다. 잠시 난로를 가져오겠습니다.” 집사가 난로를 가져와서 잠시 몸을 녹이자고 사라지자, 우리도 약간은 긴장이 풀려서 예배당의 길쭉한 의자에 여기저기 앉았다. 덜컹, 덜컹 끼이이이익 음산한 소리. 불쾌함을 참고 고개를 들자, 건너편의 방문 하나가 흔들거리는 게 보인다. “저건…. 무슨 방일까요?” “아마 신부님이 쓰던 방일걸.” 수상하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도 쉬어야 한다면서 우리만 두고 사라진 집사.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문. “이건 뭐, 뒤져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건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같이 가자. 한사람이 불 들고 있어야 편하겠지.” “아니, 형은 누나 근처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집사가 돌아올 테니까요.” 집사. 첫날부터, 형은 집사를 보자마자 상당히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경계했다. 그 집사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하자, 진철 형도 동의했는지 다시 앉았다. 물론, 집사를 의식하기도 했지만…. 위험한 곳은 한번에 한 사람씩. 죽더라도, 한번에 한 사람씩. 주식이나 투자에서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위험한 장소에 모두가 한번에 들어가선 안 된다. 한 손에는 등 하나를 든 채로 방에 들어갔다. 반쯤은 썩은 듯한 탁자.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는 다양한 문서들. 이리저리 대충 훑어봤지만, 대부분은 성경의 문구를 일부 옮겨적은 것이다. 아마 예배하면서 썼거나, 신부 본인이 감명 깊게 본 문구를 적은 게 아닐지. 서류를 뒤적거리고, 죄송하지만 반쯤 뭉개진 성경을 이리저리 뜯어내고, 썩어가는 책상도 툭툭 치면서 이제 슬슬 집사가 오지 않을까 힐끔거리던 차, 처음으로 특이한 문서를 발견했다. 성당과 저택 사이의 소송과 관련된 문서들. 소송의 내용은 어제 집사에게 들었던 대로였다. 각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성당과 인근 토지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좀 더, 집중해서 뒤져보자 이제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경하는 신부님께’, ‘신실한 이세현 – '어르신'의 이름을 알았다 – 신도께’로 시작하며 점잖은 분위기로 오가던 서신은 어느샌가 험한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중간의 서신들은 법적인 근거나 주장에 관한 이야기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눈에 띄었다. 서로를 칭하는 호칭이 어느샌가 ‘돈에 미친 썩은 신부’와 ‘사특한 이단에 빠진 사탄 같은 놈’으로 바뀌어있었다. 돈에 미쳤다. 여기까지는 서로 땅을 가지고 소송을 하다 보면 나올만한 ‘일반적인’ 욕설의 범주다. ‘사특한 이단’. 이건 일반적인 욕설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컬트적인 사태가 쉼 없이 벌어지는 이 상황에선 더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아닌가. ‘어르신’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 대략적인 결론을 내리고, 이제는 딱히 더 보이는 것도 없었기에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집사는 도착하지 않았고, 형과 누나는 오들오들 떠는 게 보였다. “아직도 오지 않으셨어요? 난로를 가져온다더니….” “그러게. 대체 난로를 어디서 가져온다는 건지…. 30분도 훌쩍 넘고 1시간은 된 것 같은데.” “할배 이놈이 우릴 여기서 죽이려는 게 틀림없다. 내가 그래서 그 자식을-” “좀 조용히 좀 해라. 제발 부탁이니까.” 아까,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진철이는 넋이 나갔어.’ 조금씩 이해가 간다. 이 형은 확실히 엘레나가 죽은 후부터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10여 분이 더 지나고서야 집사는 돌아왔다. 난로는 손에 들려있긴 했지만, 인제 와서 그 난로를 쐬면서 이 음산한 성당에 또 더 있고 싶은 사람은 정말이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난로를 가져온 것이 무색하게 집사가 도착하자 곧 다시 저택으로 출발했다. 집사는 출발하자는 말에 이견도 내지 않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애초부터 딱히 우리의 몸을 녹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저택에 도착한 후, 그제야 다 같이 쉬면서 몸을 녹였다. 서로서로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저택에 남아있던 승엽이, 송이는 물론 아리도 걱정스럽게 나오더니 부산스럽게 물을 끓인다, 욕조를 데운다고 하면서 난리가 났다. 점심에 이어서 저녁도 대충 때운 후, 성당에 가면서 세웠던 계획을 실행했다. “집사, 나 서재 열쇠 좀 줘요.” “네?” “서재 열쇠. 가서 뭐 좀 찾아보려고.” “허허, 아가씨. 승엽 군에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르신께서 서재는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법이나 금융적인 문서가 많이 있어서-” “아, 집사. 그러면 큰아버지께 전화라도 하든지.” “아가씨….” “나는 서재를 좀 봐야겠어. 아까부터, 이 저택에 이상한 일 천지인데? 뭐 알아요? 서재에 큰아버지가 뭐 숨겨두시기라도 한 건지. 그러니까 열쇠나 가져와요. 좀.” “누나, 어찌 됐든 집주인 되시는 분이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너무 흥분하신 것 아닙니까?” “너는 좀 닥치고 있어봐라. 그놈의 집주인은 여기서 사람이 죽어도 연락할 방법도 없는데 그 말만 듣다간 시체 두 개는 더 나온다.” 대충 두어 번 정도 싸우는 채 연기를 하고 뒤로 돌아서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날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티 나는 연기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연기를 너무 잘한 걸까. 아니면, 무섭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싸우기까지 하니 두려움이 커져서 이러는 걸까. 진철 형까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고, 새삼 설명하기도 애매해서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우습지만, 모두가 이렇게 훌륭한 리액션을 보여준 덕에 딱히 의심을 살 것 같진 않았다. * - 이은솔 서재는 정말 깔끔하고 평범했다. ‘이은솔’은, 바로 그 점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엘레나의 죽음을 기점으로 - 저택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거울에선 내가 나를 비웃고, 뻐꾸기시계는 시간마다 터지느라 바쁘고, 인형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저녁을 샌드위치와 커피로 대충 때울 때조차도 '다리가 솟아난 컵'이 스스로 움직여서 뜨거운 물을 부으려는 걸 낚아채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서재는…. 마치 저택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것처럼. 너무나 편안했다. 가만히 서서 가인이가 준 정보를 생각한다. ‘어르신’은 이단에 물들었다. 그건 분명 의미가 있는 정보. 집사는 어제부터 기어이 우리를 성당에 끌고 가려 하더니, 결국은 데려가서 성당 안에서 1시간이나 있게 만들었다. 뭔가를 찾으라는 거였겠지. 그 찾은 정보가 어르신의 이단이라면…. 관련된 무언가도 서재 어딘가에 있을 터. 주변을 뒤적거린다. 모든 책을 펴보고, 책상 서랍도 열어봤다. 왜 ‘나’일까? 저택의 사태가 진행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다. 엘레나는 차에서 지금 상황이 무슨 연극 같다고 했었지. 우리에겐 말하자면 배역이 주어졌다. 이 ‘공포의 저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무리 봐도 나다. 나머지 사람은, 따지고 보면 그냥 ‘이은솔’의 대학 친구라서 저택에 왔을 뿐. 나는 저택 주인의 조카이며, 동시에 그 신분으로 저택의 수상쩍은 고용인들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이다. 명백히 내가 맡은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왜 ‘나’일까. 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재벌 2세? 통장의 돈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진 않다. 머리는 좀 좋은 편? 그간 느끼기론 가인이도 만만치 않다. 호텔을 나간다면 내 밑에서 굴려보고 싶을 정도로 센스도 있지. 나는…. 외국어를 꽤 여러 개 할 수 있지. 손을 뻗어서 탁자의 두 번째 서랍과 세 번째 서랍 사이의 애매한 공간을 건드리자, 두꺼운 봉투가 잡혔다. 봉투에는 다양한 언어의 문서들이 섞여 있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글씨체도, 서식도, 종이의 종류도 전부 달랐다. 마치, 전 세계에서 파편화된 정보를 긁어모은 듯한 모양새. 그리고 그 모든 정보는 ‘하나의 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4번째 문서의 마지막 줄을 읽는 순간 알았다. 각오는 했지만 –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내가 희생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