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앞장선 것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엘프가 저렇게 늙을 정도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의 뒤로는 마찬가지로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다른 엘프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감격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탑에 들어와서 만나는 세 번째 NPC. 마법 깎는 노인처럼, 이들의 존재는 갤러리의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의 진짜라는 소리. 나는 기대감에 미소를 지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엘프 원로가 그 입을 열었다. “레골로스, 이루릴 에르후….” “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큰일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면 보상을 뜯어낼 방법이 없는데. 바로 그때였다. 내 목에 걸린 펜던트가 또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프어가 번역되어 들렸다. “…구원자여. 내 이름은 티나한이라고 합니다.” 이거 통역 기능도 있었나? 엘프 원로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세계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위대한 구원자시여…. 마침내 당신이 이 신성한 씨앗을 타락의 근원으로부터 해방하고, 우리의 고향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웠군요….” 나는 불길한 예감에 눈을 찌푸렸다. 그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했다. “이 신성한 씨앗은… 저희 종족의 마지막 희망이자 꺼져가던 생명의 마지막 불씨였습니다. 저 검은 탑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세계수가 타락의 고통에 신음할 때, 저희는 마지막 힘을 모아….” 그는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경건한 손길로 가리켰다. “…바로 그 잎사귀와 씨앗에 세계수의 마지막 희망을 담아 언약을 맺었는데 언젠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 씨앗을 품고 타락한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펜던트는 타락한 자들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렸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 약속 하나에 의지하여 영겁의 세월을 시간의 틈새에서 방황해야 했고 끝없어 보이는 기나긴 기다림과 절망 속에서….” “아니 잠깐잠깐잠깐….” 나는 거기에서 그의 말을 끊었다. 듣고 있으니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됐고, 보상이나 줘요.” 나는 게임을 할 때 스토리를 전부 스킵하는 타입. 구구절절한 배경 설정이나 NPC들의 신세 한탄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 이벤트를 끝내고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였다. 어차피 20층이 이 정글의 마지막 층이다. 여기서 이들의 역사를 알아봐야 앞으로 써먹을 곳도 없을 터. 내 직설적인 요구에 엘프 원로, 티나한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철없는 아이의 투정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할아버지처럼. 그들의 눈에는 무한한 호의만이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실리를 추구하는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저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원로 엘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새로 태어난 세계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주름진 손을 뻗어, 나무의 줄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눈부신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와 세계수로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늙어가기 시작했다. 눈빛은 힘을 잃고,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쪼그라들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엘프가 자신의 생명력을 통째로 나무에 쏟아붓고 있다는 것쯤은. 쿠구구구궁! 동시에, 세계수가 더욱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뻗어 나가는 줄기. 나무는 순식간에 20층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을 넘어, 마치 공간의 법칙 자체를 무시하는 것처럼 끝없이 거대해졌다. 나뭇잎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주변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순수한 마나로 가득 찼다. 나는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아까 그게, 다 자란 게 아니었다고?” 생명력을 모두 쏟아부은 원로 엘프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해버린 손으로 세계수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임무를 마친 자의 평온함만이 가득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엘프 원로가 천천히 세계수를 향해 걸어갔다. 세계수가 거대한 가지 하나를 부드럽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마치 그를 맞이하려는 것처럼 완만한 계단의 형태를 한 가지. 원로는 망설임 없이 그 계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은 곳을 향해. 아래에서 지켜보는 내게 그의 모습은 서서히 작아졌다. 이윽고 그는 거대한 세계수의 은빛 잎사귀들 사이로 사라져, 마침내 한 점의 빛처럼 아득해지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승천. 그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장로들 역시 서로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원로의 뒤를 따랐다. 자신들의 남은 생명력을 모두 세계수에 바치고, 나무가 내려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들을 바라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전부 보내줄 수는 없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려던 엘프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만! 보상은 주고 가야지!” 내 외침에 엘프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자의 온화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의 막내가 그대의 공에 합당한 보답을 할 것이니.”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는, 다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엘프가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비교적 젊어 보이는 엘프 한 명뿐. 그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슬픔과 경외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족들이 사라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 저기, 죄송한데 제가 시간이 별로 없는데요.” 물론 나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 단체 장례식장에서까지 이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탑에서 언제 튕겨나갈지 모르는 입장에서 막연히 기다려줄 수도 없는 노릇. 내 질문에 막내 엘프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엘프는 수명이 다하면 세계수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다만…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지요. 이 세계수의 품으로 올라간 엘프의 수만큼, 새로운 생명이 나무에서 태어나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계수의 거대한 줄기 곳곳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꽃봉오리 같은 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봉오리들은 이내 활짝 피어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아이들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뾰족한 귀. 영락없는 엘프의 아이들이었다. 사방에 놓인 거대한 꽃잎 침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처음에는 서로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아이들의 시선이 이내 단 하나의 이질적인 존재를 발견했다. 바로 나였다. 가장 용감한 아이 하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막만 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 까만색이네.” 그 한마디가 신호탄이었다. 그때까지 망설이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와르르 벌 떼처럼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들.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머리카락 색이 우리랑 달라!” “이 옷은 왜 이렇게 커다래?” “귀도 둥글어!” “…뭐야, 이거.” 나보다도 약간 더 작은 체형의 아이들. 나는 순식간에 꼬마들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막내에서 최고령자가 된 엘프 장로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은인이시여, 이제 보답을 할 시간입니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거대한 세계수를 가리켰다. 그 몸짓에는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이 나무는 당신의 의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 나무의 일부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엘프는 생명의 기운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가지 하나를 가리켰다. “살아있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면, 당신은 숲의 의지를 다루는 마법을 얻게 될 겁니다.” 엘프가 이어서 땅과 맞닿은, 유난히 굵고 단단해 보이는 뿌리를 가리켰다. “땅의 깊고 단단한 힘을 품은 뿌리를 뽑아 지팡이를 만들면, 당신은 대지를 뒤흔드는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되겠죠.” 마지막으로 그녀는 하늘을 뒤덮은 무성한 나뭇잎들을 올려다보았다. “혹은 잎을 엮어 장신구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고요.”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다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다 받을 수는 없나요?”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계수는 이제 막 다시 태어나,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한 가지를 취하면, 다른 한쪽의 힘이 더욱 강해져 균형을 맞추게 될 겁니다. 비록 은인이시지만, 나무의 근간을 뒤흔들 수는 없습니다.” “그럼 여기 엘프를 하나 데려갈 수는…. 농담입니다.” “하하, 유쾌하신 분이군요.”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우선 목속성 마법. 나쁘지 않다. 들어본 적이 없는 속성이란 점에서 특히 그랬다. 하지만 내 모래 마법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사막 위에 자라는 나무라니? 내 머리에 떠오른 건 선인장뿐이었다. 선인장 가시를 발사하는 마법이라도 써야 하나? ‘이건 일단 패스하고….’ 장신구는 딱 봐도 아니었다. 이미 성장형 펜던트를 달고 있는 마당에 굳이 장신구라니? 당연히 메인 장비인 무기부터 맞추는 게 옳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하나인데….’ 흙 속성의 마법이라? 분명 나는 분류하자면 흙 속성의 마법사가 맞다. 하지만 내 모든 마법은 모래라는 하위 태그에 얽매여 있다. ‘각성하기 전에 모래를 더 많이 먹어서 그런가?’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애초에 이 방법으로 각성한 것도 나뿐이었으니까. 확실한 것은 내게 지금 땅 전체를 컨트롤하는 능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걸 얻으면 바위나 광물도 쓸 수 있게 되는 건가?’ 어쩌면 이게 내 한계를 한번 더 뚫어줄지도 몰랐다. 시너지도 가장 클 것 같았고. 나는 고민을 끝마쳤다. “뿌리로 하죠.” “현명한 선택입니다.” 엘프는 좋은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무의 허락을 구하고, 당신의 몸에 맞는 가장 좋은 뿌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장로가 세계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 나는 다시 어린 엘프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끝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한 아이가 내 앞에 서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야?” “곧 사라질 사람이야. 신경 쓰지 마.” 나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아이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넌 어디서 왔어?” “저쪽에서. 근데 넌 왜 반말이냐?” “이 옷은 뭐야? 왜 이렇게 큰걸 입고 다녀?” “…유행이야.” 아이들은 내 대답 따위는 애초에 별 상관없었다는 듯, 새로운 놀이기구라도 발견한 것처럼 내 몸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로브 품으로 기어 들어가려 하고, 심지어는 등을 타고 오르려는 녀석까지 있었다. 귀찮아 죽을 것 같았다. 빨리 지팡이나 만들어줬으면…. 그렇게 아이들에게 시달리던 와중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맞다.” 나는 낑낑거리며 내 몸에 매달린 아이들을 잠시 떼어냈다. 주머니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스마트폰이었다. “…….” “…?” 순간, 소란스럽던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나를 타고 오르던 아이들,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아이들까지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 손에 들린 검고 반짝이는 사각형에 고정되었다. 나는 익숙하게 카메라 앱을 켰다. 이 진귀한 광경을 찍어둬야 했다. 결국 남는 건 사진뿐이니. 하지만 화면에 아이들의 얼굴을 담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와!” 가장 가까이 있던 아이의 조막만 한 손가락이 화면을 쿡 찔렀다. 카메라 앱이 꺼지고 엉뚱한 계산기 앱이 켜졌다. “야!” 내가 타박을 주기도 전에, 다른 아이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 목표는 내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었다. “반짝거려!” “신기해!” 한 녀석은 아예 폰을 통째로 빼앗으려 들었고, 다른 녀석은 화면에 자기 얼굴을 바싹 갖다 대며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봤다. 나는 필사적으로 폰을 사수하며 소리쳤다. “야! 저리 안 가! 만지지 마!” 하지만 수십 개의 작은 손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 다시 카메라 앱을 켜 버튼을 누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과물은 처참했다. 사진에는 흐릿한 엘프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 하나와, 렌즈를 가리는 열 개 남짓한 손가락 자국만이 찍혀 있었다. “어휴….”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침, 장로 엘프가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내게 돌아왔다. 살아있는 뿌리가 서로 뒤엉켜 만들어진 지팡이. 딱 봐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무 큰 거 아닌가요?” 지팡이는 내 키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이 작은 몸으로는 양손으로 들어도 버거울 것 같은 크기. “그 또한 세계수의 의지. 제가 감히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엘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융통성 없긴. 난 속으로 불평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불평도 잠시. 나는 지팡이를 받아 들자마자 눈앞에 떠오른 정보창에 모든 불만을 잊을 수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 [등급: 레전더리] [효과: 대지의 권능. 모래를 넘어, 대지 그 자체를 다루는 권능을 부여합니다. 흙 속성 마법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진화합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크기가 뭐가 문제랴. 레전더리 아이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