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 내 눈앞의 새하얀 무복을 입은 무인은 가로막힌 칼을 억지로 꾹꾹 밀어냈다. 그러고는 자화연에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열기가 어려 있었다. ​ “당신 같은 자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그녀는 검을 고쳐 잡았다. ​ 일촉즉발의 상황. 물론 이런 상황은 있을 수도 있다. 이방인은 워낙 변칙적인 존재니까. ​ 따라서 이런 상황을 대비한 협회의 공식 매뉴얼 또한 존재했다. ​ ‘이방인이 즉시 공격적인 태세를 보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정답은…. ​ ‘무력으로 제압하세요.’ ​ 엘리스는 그 매뉴얼을 경호원으로서 완벽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눈빛이 맹수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그러나 나는 바로 그녀의 어깨를 막아섰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 ​[???] [메인 스탠스] [자신의 폐관 수련동에, 마교의 소공녀와… 그녀의 잔당들로 보입니다. 즉시 처단해야 합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5%] [무림맹주님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 눈앞의 여성은 무림맹주와 모종의 관련이 있는 듯했다. ​ 그리고 지금 무림맹주는 이 세계로 전이된 상태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 “무림맹주님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 그러자 눈앞의 여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할 정도로 떨렸다. ​ “그게 무… .” ​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 - 퍽! - 쾅! ​ 내 옆에 서 있던 자화연의 팔이 검은 섬광처럼 출수하여 무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 불시의 공격에 하얀 무복의 여성은 붕 떠 동굴의 저편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 “… 꽥.” ​ 그녀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 대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화연을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상대를 벽에 꽂아버린 그녀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천마님… 대체 무슨….” ​ “자, 잠시 그, 그런 게 아니다 의원.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 그녀는 자신의 손과 멀리 날아가 꽂힌 여성을 번갈아보더니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 “… 대체 왜 이리 허약해진 것이냐…?” ​ 내가 자화연을 바라보던 동안, 엘리스는 토끼처럼 총총 걸어가 쓰러진 무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기절했어여. 그런데… 원래 상태가 안 좋긴 했네여.” ​ 그녀는 쓰러진 무인의 새하얀 무복을 살짝 걷어냈다. 그 안으로 붕대로 여러 번 감아놓은 복부가 보였다. 그럼 환자를 때렸다는 소리···. 나는 자화연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바라봤다. “크흠···.” ​ 그녀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엘리스는 그 사이에 무인을 자신의 등 뒤로 가볍게 업었다. ​ “뭐… 어쨌든 일단 미션 성공이네여. 선생님, 일단 나갈까여?” ​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이 공간에서 빨리 나가는 게 중요해 보였다. 기절시킨 이상, 깨어나기 전에 빨리 나가야 한다. ​ 물론 아까의 모습을 보건대 다시 깨어나도 금방 제압당할 것 같았지만. ​ 나의 동의에 엘리스는 자신의 등에 업힌 여인을 고쳐 멘 뒤 앞장섰다. ​ 그렇게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나는 내 옆에서 여유롭게 걷고 있는 자화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천마님, 혹시 이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 마음속에 있던 궁금증을 꺼냈다. 자화연이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 그녀는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눈치였으니까. ​ 그러자 자화연이 답했다. ​ “목각인형이지.” ​ “목각인형… 말씀이십니까?” ​ 그녀의 입꼬리가 비웃는 듯 서서히 끌어 올라갔다. ​ “주인의 명령만 듣고, 자아라고는 한 톨도 없는. 그런 한심한 인형 말이다.” ​ 지금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 ‘목각인형.’ ​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일단 그 단어들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었다. ​ “그렇다면 혹시 천마님과는 무슨 관계이신지….” ​ “관계?” ​ 자화연은 코웃음을 쳤다. ​ “관계랄 것도 없다. 그저 본좌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일 뿐이다. 주인을 잃어서 방황하는 꼴이 아주 놀리기 좋았거든.” ​ “사이가 좋나 보네여~” ​ “무어라?” ​ 엘리스가 중얼거렸지만 자화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 그렇게 몇십 분을 또 걸었을까. ​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 산맥을 거슬러 끊임없이 내려가던 중, 갑자기 주변이 급격히 일렁거렸다. ​ 낯선 중원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울숲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됐다. ​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푸른색의 기운이 뭉쳐져 일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나온 거고. 이처럼 가상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전이 침식이라 한다. ​ 저 너머, 우리를 둘러싼 역장 너머로는 협회의 지원팀이 초조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 - 치지지지직. ​ 바로 그때, 내 귀의 인이어에서 잡음이 터져나왔다. ​ - 유… 상… 사… . - 유선우 상담사님! 무사하셨군요! ​ 통신이 다시 연결된 것이다. 수화기 너머의 담당 직원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 “현재 이방인은 혼절한 상태입니다. 최초 조우 시 강한 공격성을 보였습니다. 준비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 나는 엘리스의 등에 업혀있는 이방인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상태를 다시금 확인했다. ​ [설유월] [메인 스탠스] [꽥.] 어? ​ [???]로 표시되던 그녀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이침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니, 내 능력이 비로소 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했다. ​ 메인 스탠스는… 기절한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 네, 우선 즉시 협회의 이방인 격리 및 적응 시설로 이송을 하겠…. ​ “아 잠시만요.” ​ 나는 직원의 말을 잘랐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우선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 눕히는 것을 추천합니다.] “푹신한 침대도,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어차피 그녀는, 내가 당분간 책임져야 할 내담자였으니까. *** 서울 한복판의 대궐 같은 기와집이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 이곳은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 의지만은 사라지지 않은 정파(正派)의 심장부이자. 무림맹의 총본산. ​ 창천맹이었다. ​ 그 가장 깊숙한 곳의 서재.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 얼핏 보면 앳돼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세월의 깊이를 담은 듯 고혹적이었다. 옥색의 화려한 도포를 걸친 그녀가 바로, 이 거대한 정파 연합의 주인. ​ 창천맹주(蒼天盟主)였다. ​ 그녀가 막 화선지 위 난초의 마지막 잎사귀를 완성하려던 바로 그 순간. 한 명의 무인이 다급하게,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창천맹주님.” ​ “암명대주… 무슨 일인가?” ​ 그녀는 화선지에서 시선을 거두며 그를 바라봤다. ​ “난(蘭)이, 이제 막 피기 직전이었는데 말이지.” ​ 맹주는 아쉽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러자 암명대주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 “송구하옵니다 맹주님. 허나, 시급히 보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 남성은 그녀의 앞에 하나의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한곳에 있는 것 자체가 이질적인 세 명의 대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 가장 첫 번째. ​ 맹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 ‘자화연….’ ​ 아직 영글지 않은 작은 씨앗이라 여겼다. ​ 따라서 건들지 않았다. 분명, 교단 내부의 암투와 내란으로 인해 제풀에 꺾여 머지않아 살해당할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최근, 자화연은 내부의 반란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 듯했다. ​ 그리고 두 번째. ​ 꽤나 잘생긴 남성. 백색의 복장이 그의 정체를 의원이라 추측할 수 있게 했다. ​ 그리고 마지막. 잿빛의 묘(卯)인 족 사냥꾼. 맹주의 관심사는 그런 수인 따위가 아니었다. ​ 그녀의 시선이 엘리스의 등 뒤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 무력하게 업혀있는… 한 명의 여성. 머리의 색은 조금 다르지만 확실했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 창천맹주의 손에 들려 있던 붓이 화선지에 툭, 하고 떨어졌다. 완성되기 직전이었던 난초의 마지막 잎사귀 위로, 검은 먹물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 그녀의 입에서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왔구나.” ​ 맹주는 그 말과 함께 붓을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 ​ - 으드득… 으저저적…. ​ 그녀의 힘을 버티지 못한 붓이 날카롭게 쪼개져 나갔다. ​ 그토록 찾아 헤맸던. ​ “딸아.” ​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 암명대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맹주님.” “어떻게 할 것이 있겠는가?” ​ 그녀는 부서진 붓대를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 ​ “어미가 길 잃은 어린 딸을 제 품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은 당연한 하늘의 이치.” ​ 맹주는 다시금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딸이 아닌 그녀의 주변으로 향했다. ​ 의원으로 보이는 저 사내는 그렇다 하더라도. ​ ‘마인(魔人)과 짐승이라….’ ​ 그녀의 딸 설유월의 한쪽에는 천마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천한 수인 계집이 그녀를 업고 있었다. ​ ‘언제나 품격 있는 자들과 어울리라. 내가 그리 일렀거늘.’ ​ 그게 맹주의 딸이자 유일한 후예로서의 몸가짐이라, 그리 가르쳤었다. ​ 잠시, 어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모든 가르침을 전부 잊었나 보구나. ​ 괜찮다. ​ 다시 가르치면 될 일. ​ “협회로 가지.” ​ 이 어미가 전부 가르쳐 주겠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