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메어리와의 악수를 나누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 그녀의 협조를 얻어낸 이상, 확실한 발판이 마련된 셈이니까. 어찌 되었든 매우 좋은 일이다. ​ - 홀짝. ​ 메어리는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내가 내려준 커피를 느긋하게 들이켰다. ​ 목욕 가운의 매듭이 살짝 느슨해져, 씻고 나온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죄다 드러나 있었다. ​ “요것만 마시고 일어나도 될까?” ​ 그녀는 목욕가운을 두른 채,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 “천천히 해.” ​ 복장에는 최대한 눈을 안 두려고 노력했다. 커피 다 마시면 옷도 갈아입으러 가겠지. ​ 메어리는 약간의 시간 동안 티타임을 즐기며 커피를 들이켰다. ​ “놀랐어. 나는 선우 네가 바빠서 일부러 연락을 못 하는 줄 알았거든.” ​ “… 그랬어?” ​ 메어리의 뜬금없는 고백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런 건 아니었다. ​ 오히려 메어리가 바빴으면 바빴을 거라 생각했다. 대해 길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고, 그곳에 들어갔으니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내 성격이 원래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은 더더욱 아니기도 하고. ​ “응, 너도 해태 들어가고 하니까. 엄청 바쁜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아니었나 보네.” ​ 메어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명절에나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가 다였었다. ​ “그럼 앞으로는… 계속 연락해도 되는 거야?” ​ 메어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안 될 이유가 없다. ​ “그럼. 당연하지.” ​ 그 말에 메어리가 미소 지었다. ​ 그렇게 잠시 후. 그녀는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방울까지 음미한 뒤,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잠깐만.” ​ 메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격리동에서는 보통 대상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구비해 놓는다. ​ 얼마 가지 않아 방의 문이 열렸다. ​ “짠~” ​ 신난 목소리와 함께 메어리가 문틀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메어리는 아이보리색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그니까 일전에 설유월이 백화점에서 입었던… 몸의 곡선이 노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런 스타일의 복장. ​ “어때?” ​ 메어리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내게 소감을 물었다.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오히려 안심이 됐다. ​ 설유월에 이어서 메아리까지 저런 옷을 선택한 것을 보니, 이건 내 편견의 문제였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저런 스타일이, 보편적인 여성들의 눈에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이었던 것 같다. ​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모든 사심을 지우고, 담백하게 답했다. ​ “잘 어울리네.” ​ 내 건조한 대답에 메아리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멎었다. ​ “…… 그게 끝?” ​ “응. 요즘 많이들 입는 옷이니까.” ​ “잉…? 정말로?” ​ 내 답에 메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자 그럼, 어디부터 갈까요?” ​ 딱히 순서는 정해두지 않았다. 애초에 헌터들이 일어나는 시간 자체가 제각각이니까. 우선적으로 먼저 깨어있는 상대부터 공략하면 될 것 같았다. ​ 나는 팀장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 [팀장님]: 301호부터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상한 지 30분 정도 됐고, 구현우 헌터입니다. ​ 팀장은 즉시 답변하며 현재 깨어있는 헌터를 배정해주었다. ​ “301호, 구현우 헌터.” ​ “구현우….” ​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301호는 건너편의 동이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좀 걸어야 했다. ​ 걷는 동안 생각을 좀 했다. 구현우 헌터라…. ​ 이름 자체는 자주 듣는 스타 헌터는 아니었다. 그래도 대해 길드라는 것 자체가 뛰어난 실력자라는 소리겠지만. ​ 아까 상담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뿐. 대답을 못 하거나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 그가 말하는 스스로의 상태에 따르면 감정이 증폭된 것 같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증폭된 감정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말하기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 따라서 나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진짜 마음을 확인했고. ​ [구현우] [메인 스탠스] [성적인 욕망을 억누르기가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빨리 상담사가 나가기를 바랍니다.] ​ 그는 그런 상태였다. ​ “구현우 헌터, 알아?” ​ 나는 상담에 앞서 여성인 메어리에게 질문했다. 혹여나 있을 돌발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 “응… 알지.” ​ “어때?” ​ “원래는… 그냥, 문제없이 성실한 사람. 그게 다야. 그런데….” ​ 그녀는 무언가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메어리는 작은 한숨과 함께, 결국 입을 열었다. ​ “저주에 걸리고 나서, 던전 안에서부터 상태가 심상치 않았어. 갑자기 동료 여성 헌터에게 달려들더라고.” ​ “…… 그랬구나.” ​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나한테 한번 달려들었고.” ​ 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메인 스탠스에서 드러난 성적 욕망이 이미 외부로 표출까지 되는 상황. ​ 그러면 직접적인 접촉은 조금 위험하다. ​ 일단은 유리벽 너머에서 그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제한된 접촉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적합해 보였다 어차피 지금쯤 통제소의 직원이 그를 격리 상담실로 호출했을 터였다. ​ 우리는 301호 앞에 서서 입장하려 했다. ​ 그러나 그때. 나는 메어리의 복장이 마음에 조금 걸렸다. 몸의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복장이다. ​ “…….” ​ - 스윽. ​ 나는 망설임 없이 내가 입고 있던 하얀 의사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 “이거 입을래?” ​ “…….” ​ 메어리는 의사 가운을 바라보더니,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 ​ 그녀는 군말 없이 가운을 받아 걸쳤다. 품이 큰 가운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그녀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라벤더 향과, 내 가운에 남아있던 옅은 커피 향이 섞였다. ​ “아냐. 그냥… 혹시 모르니까.” ​ 그게 구현우 헌터의 잘못은 아니지만, 신경은 써야 할 것 같았다. ​ - 킁킁. 킁킁. ​ 미세한 커피 향을 맡는 메어리를 뒤로하고, 나는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 내부에는 수척한 얼굴의 구현우 헌터가 앉아 있었다. ​ 그의 시선은 일순간 내게 향했다가…. 뒤따라 들어온 메어리에게 고정되었다. ​ 나는 마이크를 켜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구현우 헌터님. 잠은 잘 주무셨나요?” ​ “…….” ​ 구현우는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메어리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 의사 가운을 입히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 “…….” ​ 그 시선을 받아내며 메어리 또한 옆으로 향했다. ​ “구현우 헌터님?” ​ 나는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 [… 대상의 공격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 시스템 창이 붉게 점멸하며 경고를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 바로 그때, 메어리가 강화유리 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 구현우 또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 위험! 대상의 공격성이 폭발 직전입니다! ] ​ “잠깐만 메어리…!” ​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환자를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 ​ 그러나 메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무지개색 구체를 쏘아냈다. ​ 그 순간이었다. ​ - 파각! ​ 유리벽 너머, 구현우 헌터의 등 뒤 허공에서부터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 메어리가 사출한 무지갯빛의 구체가 검은 아지랑이 같은 형체를 가두었다. ​ “잡았다.” ​ 메어리가 읊조렸다. ​ 검은 형체는 비명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발작했지만, 메어리는 손아귀에 힘을 더 꽉 주며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 구현우의 눈은 서서히 초점을 잃더니. 그대로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 “뭐야?” ​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빛의 구체안에 갇혀 꿈틀거리는 그림자 같은 형체를 알아보려 노력했다. ​ “악마 같아.” ​ 메어리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때. ​ [정답입니다! 악마가 맞습니다!] [구현우 헌터의 욕망이 폭발하고, 악마가 그를 완전히 지배하려던 그 찰나의 순간! 일시적으로 외부로 노출된 악마의 본체를 메어리 헌터가 포착하여 잡아챈 것으로 보입니다!] ​ … 그게 말이 되나? ​ “뭔가 이상한 게 꿈틀거리길래 잡았는데, 잘 걸린 것 같네.” ​ 메어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천운이었네요!] [✨( • ̀ - •́ )✧✨] ​ - 키에에에엑!!! ​ 그것은 미친 듯이 발악하며 빠져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통제실의 스피커에서 팀장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 상담사님! 악마입니다! ​ “네. 그런 것 같네요.” ​ 나도 알고 있다. ​ “어떻게 할까?” ​ 메어리는 한 손을 뻗은 채 내게 물었다. ​ - 메어리 헌터님!! 즉시 소각해주십시오!! ​ 팀장이 다시 한번 외쳤지만 메어리는 스피커를 힐끗하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 “어떻게 할까요? 의사 선생님?” ​ 답은 하나였다. 악마의 상태를 보아하니, 온전한 개체도 아닌 듯했다. 하급 개체. ​ 하급 개체는 외부로 나올 시 이성이랄 것이 남아있지 않는다. 심문도 의미가 없다. ​ 남겨둬야 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 “으깨버려.” ​ 내 말에 메어리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얍.” ​ - 우드드득! ​ 그녀가 가볍게 주먹을 쥐자, 무지갯빛의 구체가 핏빛으로 물들며 안쪽으로 맹렬하게 수축했다. ​ - 끼에에엑!! ​ 그게 악마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 “… 성공이네.” ​ 첫 번째 상담은 그렇게 끝났다. ​ ​ ​ ​ ​ *** ​ ​ ​ ​ 메어리와의 합은 굉장히 잘 맞았다. ​ 그녀는 내 의사 가운 반환 요청을 무시한 채, 다음 헌터들을 차례차례 맞이했다. 대부분 헌터들은 메어리의 손길 한 번에 내부에 있던 악마가 찢기는 모습을 보였다. ​ 그렇게 다섯 명째의 치료를 막 마친 순간이었다. ​ 나는 내 가운을 입고 유유히 걸어 나오는 메어리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슬슬 옷 좀….” ​ “싫어어어.” ​ 메어리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처럼 대답하며 가운의 옷깃을 여몄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창문을 보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 “좋다.” ​ 그녀는 여전히 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내 핸드폰으로 팀장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 다음 상담 상대에 대한 정보였다. ​ [팀장]: 다음 대상은 407호의 부부 헌터, 이준혁, 장나현입니다. ​ - 흠칫. ​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 누군가 했더니. 바로 그 부부였다. 내가 뭔 소리를 하든 신경 안 쓰고 이불 아래에서 할 행동을 하시던. ​ 내 표정 변화를 읽은 메어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왜 그래? 다음은 누구인데?” ​ “… 이준혁 헌터랑… 장나현 헌터.” ​ “헉.” ​ 내 대답에 메어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느새 407호 앞에 도착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 왜 이렇게 떨리지. 위험한 적을 마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었다. ​ 관찰실은 어두웠고, 유리벽 너머 상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오늘은 얌전히 있는 건가…? ​ 라는 헛된 희망이 스친 순간. ​ “…… 어디 계신….” ​ 그러나. 나는 유리벽 너머를 살피다가 발견했다. ​ 방 한가운데에 있는 큼직한 침대. 그 위로, 솟아있는 거대한 이불 더미를. 심지어 그 더미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위아래로 꿀렁이고 있었다. ​ - … …읏 …윽. ​ 이불 너머로는 억눌린 웃음소리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다. ​ “어머. 아침부터?” ​ 옆에서 메어리가 웃으며 감탄했다. ​ 저걸 어떡하지. 저번에는 얼굴이라도 쏙하고 거북이처럼 내놨는데. 지금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 아무래도 더 심해진 것 같다. 게다가 이번에는 메어리도 함께다. 그녀를 보기 민망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 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짐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