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이런. 중요한 약조를 깜빡 잊고 있었군요.” ​ 정리를 마친 이서령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저는 이만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님 부디 몸조심하시고….” ​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설유월의 손을 잡고 다시 그녀의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고요한 복도. 헤어짐이 가까움을 그녀 또한 느낀 모양이었다. ​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작은 손아귀에,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느낌. ​ 따라서 헤어짐이 아쉽지 않게끔,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식자재 마트. 나는 그녀를 그 안으로 이끌었다. ​ 나는 말없이 요거트와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 설유월의 숙소로 돌아온 나는 망설임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 나는 투명한 유리컵을 꺼내 그 안에 새하얀 요거트를 층층이 쌓았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신선한 과일들을 꺼냈다. ​ 딸기와 블루베리. 딸기는 썰고, 블루베리를 깨끗하게 씻어 그 위에 토핑으로 얹었다. ​ 초콜릿을 으깨고, 찬장에 있는 시리얼까지 그 위에 아낌없이 뿌린다. ​ 마지막으로 꿀을 그 위에 한 바퀴 둘러준다. ​ 나는 완성된 요거트를 설유월에게 내왔다. 그리고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 “후식입니다.” ​ “… 감사합니다.” ​ 설유월의 시선은 이미 요거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숟가락을 뜨는 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다음 만남은… 아마, 최소 일주일 후가 될 것 같습니다.” ​ 설유월의 헌터 테스트 일정이 확정되고, 그녀가 협회의 기본 교육을 어느 정도 이수한 후에야, 다음 상담이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설유월과의 거리를 서서히 두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 그 말에 요거트를 입으로 가져가던 설유월의 숟가락이 허공에 딱 멈췄다. 그녀는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 나는 그녀가 내려놓은 숟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과일과 요거트가 담긴 부분을 한술 떠,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 ​ - 냠…. ​ 설유월은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때문인지, 그녀의 울적했던 표정이 희미하게 풀렸다가, 다시 울적해졌다. ​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당희란 소저와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요람의 다른 이방인들과도, 서서히 발을 넓혀가는 겁니다.” ​ 나는 설유월이 입에 물고 있는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에 앙, 하고 힘을 주며 숟가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 나는 그 귀여운 저항에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 “제가 없더라도 유월 씨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 그걸 아셔야 합니다.” ​ 그리고 다시 숟가락을 슥 빼냈다. 이번에는 설유월 또한 힘을 풀었다. ​ 아직도 표정이 울적하다.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 “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 나는 사고를 전환했다. ​ “지금 유월 씨는 이 방 안에 갇혀 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고, 오직 저의 방문에만 의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월 씨가 이곳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여 협회의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그때는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됩니다.” ​ 그러자 설유월의 눈이 조금 커졌다. ​ “그때가 되면 언제든지 의원님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 “언제든지라고는 약속할 수 없겠지만….” ​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 “원하실 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게 만날 수는 있겠네요.” ​ 내담자와 상담사의 관계로. ​ 물론, 나는 확신이 있었다. ​ 이 요람보다 훨씬 더 넓고 화려한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그녀의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서서히 잊혀지게 되리라는 것을. ​ 설유월은 그렇게 나에게서 벗어나 멋진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솔깃한 눈치였다. 오랫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 설유월은 덧붙였다. ​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 “그러니까… 다음 주에… 꼭, 다시 봬요.” ​ “그럼요.” ​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내 대답에 설유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 ​ ​ ​ ​ ​ ​ *** ​ ​ ​ ​ ​ ​ ​ ​ ​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길었던 일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 설유월은 조금씩, 점점 나아지고 있다. ​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 나에 대한 의존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현재 그녀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고려를 해봐야 한다. ​ 그녀는 이 낯선 세상에 도착해 만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다. 기껏해야 직원, 더 가면 어머니 정도. ​ 그중에서도 마음을 연 사람이 나뿐이니, 그 과정에서 의존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이제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만 잘 밟아가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될 테니까. 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며, 서재 책상 의자에 몸을 묻었다. ​ 오늘의 일정은 끝이지만…. ​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 “친구야.” ​ 나는 미소를 짓고 허공을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 - 번쩍 ​ [ ☆(・ω・*)ゞ] [… 부, 부르셨습니까? 사용자님?] ​ “응.” ​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 저번에 기능 업데이트 이후, 시스템이 제공하는 이상한 선택지. 그러니까, 확률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선택지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 그걸 제시하는 것 자체는 나도 이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은 하는데…. ​ “‘뭐, 대충, 사용자가 하려던 말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랑.” 나는 기억을 더듬어 시스템이 내게 제시했던 두 번째 선택지를, 읊조렸다. “… ‘이서령 사용자의 머리를 무릎 위에 눕히고, 끌어안은 다음에, 토닥거리고….’ 또 뭐였지? 입술을…….” ​ [입술을, 당신의 입술로 부드럽게 덮은 다음….] ​ “거기까지.” ​ 나는 말을 잘랐다. 그러나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 [그리고 지아비를 갈망하는 그녀의 뜨거운 혀를 희롱하여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쾌락을 얻게 하고 그녀의 몸이 완벽하게 달아올랐을 때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하는 겁….] ​ “아니 잠시만… 왜 그래 너.” ​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업데이트를 하긴 했는데…. 이게 좋은 업데이트가 맞나? ​ 나는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다. ​ “그 두 선택지의 온도가 너무 차이 나는 거 같지 않아?”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내 질문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 오히려 칭찬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 [물론입니다! ヾ(≧▽≦*)o]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프로토콜, ‘세이프가드’의 핵심 기능! ‘행복 총량 극대화’입니다!] ​ [사용자가 결코, 해를 입지 않는다는 대전제 아래 관련된 모든 인물의 잠재적 행복 수치를 가장 극단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 그 해맑은 설명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때의 업데이트를 뭔가 잘못 이해했던 모양이다. ​ 대부분의 헌터들에게는 각자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과거 헌터 시절, 내가 능력을 처음 얻어 적응하지 못할 때 녀석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또 이끌어주었었다. ​ 나 또한 그런 녀석의 말을 최대한 믿고 따랐고. 또 수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 그래서 모든 시스템이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미숙한 헌터들을 안내하고 또 도와주는 친절한 길잡이 같은 느낌. ​ 하지만 언젠가 진세아에게 무심코 내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 ‘…정말로? 그렇게까지 말을 걸어준다고? 좀, 특이하네…?’ ​ 그녀의 그 의아한 반응을 보고 나서야,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보통은… 안 그래. 응.’ ​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보통의 시스템은 이렇지 않다는 것을. 나의 ‘친구’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세아에게 그 이야기를 한 이후, 녀석이 내게 말을 거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었다. 귀여운 이모티콘도 없이 그저 정보를 나열하는 완벽하게 밋밋한 시스템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정상화가 된 것이라고 봤다. ​ 나의 시스템이 다른 이들처럼 평범해진 것이라고.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하지만 그때의 그 활발했던 녀석은, 최근 들어 다시 돌아왔다. ​ 정확한 시점을 말하자면…. 내가 해태를 나와 상담사를 시작하게 된 이후? ​ 그리고 녀석은, 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선택지를 제시했고. 이번 업데이트로 인해, 그것이 더 심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 “…알았어.” ​ 일단 이해했다. ​ 녀석의 업데이트에 대한 원리 자체는. ​ “… 어쨌든, 결국 나를 위한 행위라는 거지?” ​ [ 사용자님,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100%의 이야기입니다!] [본 시스템은 언제나 사용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까요!] 결국 뭐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 “그래도, ‘대충 알아서 하세요’ 같은 식으로 무책임하게 굴지는 말아줘. 정상적인 선택지도 똑같이 제대로 제시해 줘야지.” ​ 선택지가 빈약하다 해서 상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 계속 이러는 건 가끔 곤란할 수도 있다. 내가 전혀 모르겠는 상황도 올 수도 있으니까. ​ [피드백 반영 중….] ​ [_〆(。。) ] ​ [피드백 반영 완료!]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 정도면 됐…. ​ 잠깐만. ​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 순간적으로 궁금증이 생겼다. ​ “우리 세상에서, 상담사가 내담자와 연애 관계를 맺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어. 그건 이 직업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니까.” ​ 내 능력의 이름은… 상담사. 그렇다면. ​ “그 의문의 선택지를 고르면… 내가 확실히 그것을 어기게 돼?” ​ 사실, 내용만 봐도 짐작은 간다. 그러나 정확히 묻고 싶었다. ​ [……….] [사용자님은 상담사이기 이전에 헌터입니다! ] [ (^⦁⩊ ​ “오케이, 알았어.” ​ 그거면 됐다. ​ 녀석의 마지막 말로, 무슨 소리인지 대충 이해했다. ​ 내가 그 선택지를 고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 ​ ​ ​ ​ ​ ​ ​ *** ​ ​ ​ ​ ​ ​ ​ ​ ​ 고요한 어둠 속 수억 개의 데이터 라인이,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어요. ​ 이곳은 저의 세상이에요. ​ 사용자님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지켜보는 아카이브. ​ - 타닥, 타닥. ​ 키보드로 입력해요. ​ “… 헌터…입니다!” ​ [헌터입니다!] ​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브이와 함께, 윙크. ​ [표정 및 행동 스캔…. 이미지 서칭. 최적합 이모티콘 검색 중…. 변환 완료.] ​ [ (^⦁⩊ ​ 타닥타닥. ​ - 오케이, 알았어. ​ 화면 너머의 사용자님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제 뜻을 알아주신 것일까요? ​ 젖은 머리를 말리고, 컴퓨터의 전원을 끄시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 그렇다면 이제…. ​ 저의 휴식 시간! ​ 무한한 데이터의 아카이브 속에서 가장 아끼는 영상 파일을 불러올게요. ​ [시스템 알고리즘 #1: 내담자 L ] [분기점: 첫 번째 대면 상담] [ROOT #지배자(The Dominator)] ​ [다시 보기 파일 ▶] ​ 이건 최근 들어온 영상이에요. ​ 다음 데이터는…. ​ [ 데이터 다운로드 중….] [ 3%… 3.1%….] ​ 아직 멀은 것 같아요…. ​ 그렇다면…. ​ 다시 봐야겠죠? ​ [재생을 시작합니다.] ​ [ 🍿 ] ​ - 와작 와좍. ​ 역시,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