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훈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성묵은 담담히 말했다. ​ “일단 알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도 이해했구요.”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 이야기를.” ​ “말해드릴 수야 있지만, 지금은 더 적합한 평가자가 있을 것 같군요.” ​ “그 말은…?” ​ “도진아, 이제 나와도 될 것 같다.” ​ “…네, 형.” ​ “…………!” ​ 옥상 문을 열고 나오는 도진. 도학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자네, 분명히 단둘이 이야기하자고…!” ​ 배신감 어린 눈빛으로 성묵을 바라보는 도학훈, 이미 성묵은 그를 만나러 가면서부터 도진을 따라오게 만든 상태였다. ​ “이게 최선입니다. 도진이는 그나마 도학훈 씨에게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앱니다. 도진이 조차 설득하지 못하면 도연 누나는 절대 설득하실 수 없어요, 확신합니다.” ​ “……으윽.” ​ 결국 도진이와 마주 선 도학훈. 꽤나 덩치 차이가 크게 나는 둘이지만, 도학훈 쪽은 꽤나 위축되어 작아 보였다. ​ 도진은 담담한 눈으로 도학훈을 바라보더니, 무거운 입을 뗐다. ​ “솔직히 믿기는 힘들어요, 이제 와서? 라는 생각도 들고요.” ​ “그래, 그렇겠지….” ​ “그러니까 믿을 수 있게 해주세요.” ​ “어, 어…?” ​ “증거를 보여달라구요, 믿고 싶으니까.” ​ “…그래, 그러마.” ​ 두툼한 서류 가방을 여는 도학훈. 거기선 혹시 몰라 준비해둔 것인지, 파일철 하나를 꺼내 도진에게 건넸다. ​ “……….” ​ 빠르게 슥슥 내용을 읽는 도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탁! ​ 긴 침묵 속에 파일철을 덮은 도진.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썩 기분이 좋진 않네요, 이젠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는 건….” ​ “………!” ​ 도학훈의 자료를 보고 결국 수긍한 듯한 도진. 그는 시선을 내리깔더니, 폭탄 발언을 던졌다. ​ “아버지, 저는 올해 초에 죽으려고 했어요.” ​ “……지, 지금 뭐라고!!” ​ “진성고에 있을 때 진득하게 괴롭힘을 당했거든요. 야구부 선배들이랑, 누나를 노리는 양아치들한테요.” ​ “내 이놈들을 당장!!” ​ 화가 머리끝까지 난듯한 도학훈. 도진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진정시켰다. ​ “진정하세요, 이미 다 끝난 일이고 화내달라고 이야기해 드린 거 아니니까.” ​ “그, 그렇구나….” ​ “아무튼, 다 포기할까 싶었을 때 절 구해준 게 성묵 형이에요.” ​ “자네가…?” ​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는 도학훈. ​ “그렇군, 갑자기 진성고를 떠나 문혁고로 온 건 다 자네를 따라간 것이었어….” ​ 그는 이내 턱을 매만지더니 그럴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 “아마 형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세상에 없었겠죠, 그랬다면 누나도 회생 불가 수준으로 망가졌을 테고요.” ​ “…내 죄가 크구나.” ​ 아버지인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걸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성묵이 대신했다. 어른으로서 부끄러웠고,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 “저는 용서할게요, 아버지도 많이 힘드셨던 것 같고 반성하신 것 같으니까요.” ​ “크흑…….” ​ “누나를 설득하는 것도 도울게요, 대신 저도 장담은 못 해요. 당시에 갓난애였던 저와는 달리, 누나가 겪은 어둠은 저보다도 훨씬 거대하니까요.” ​ “…그래, 그렇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 그렇게 부자간의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도진은 성묵에게 물었다. ​ “바로 누나를 만나러 갈 건데, 형도 같이 갈래요?” ​ “…내가?” ​ “네, 누나를 설득할 때 형의 역할이 중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 ​ 이미 도진이 납득하고 설득에 힘을 쏟기로 한 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은 성묵. 의아하긴 했으나 그는 일단 승낙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야.” ​ 그렇게 셋은 자리를 옮겼다. 가장 큰 난관이 될, 도연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 ​ ​ ################ ​ “흥, 흥흥…♪” ​ 도연은 현재 기분이 좋다. 성묵과 도진이 잠깐 보자며 사무실 앞으로 찾아온다고 했기 때문. ​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여야겠다.’ ​ 안 그래도 오늘 문혁고의 축제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주책맞게 고등학생 축제에는 왜 왔냐는 시선을 받을까봐 차마 가지 못했다. ​ 물론 성묵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상황. 그런데 직접 사무실 앞까지 찾아온다니. ​ 도진이 눈치껏 빠져줬다면 좀 더 좋았겠지만 아무튼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 그렇게 하늘 높이 올라가 있던 그녀의 기분은, 쿵 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숨이 턱 막힌 도연. 분명히 성묵과 도진을 만나기 위해 나온 건데, 왜 저 남자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 “도연아….” ​ “당신이랑 나눌 이야기 없어요, 돌아가요.” ​ 도연이 홱하고 뒤돌았다. 그리고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 “도연아…!!” ​ “…누나! 잠깐만 이야기를!” ​ 학훈과 도진이 놀라서 부르는 사이, 성묵은 망설임 없이 튀어 나갔다. ​ “누나.” ​ “…………!!” ​ 도연을 뒤에서 확 끌어안은 성묵. ​ 그녀의 온몸이 전류라도 흐르는 듯 찌르르 떨렸다. 머리로는 당장이라도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 “이, 이럼 못 써! 빨리 놔줘…!” ​ “듣고 나서 어떤 결정을 하든 누나 자유니까, 일단 이야기만 나눠봐 줘. 부탁할게.” ​ “……으으.” ​ 그녀의 몸을 꽉 붙잡은 성묵의 팔 울긋불긋한 팔 근육이 피부 위로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 이성을 마비 시키는 허니 트랩. 좋아하는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붙잡힌 상황에서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 “…후우, 알겠어.” ​ 결국 한숨을 내쉬며 승낙한 도연. 성묵은 그제야 그녀를 놔주었다. ​ “근처 카페로 가시죠. 거기서 이야기해요.” ​ “…알겠다.” ​ 그렇게 근처 카페로 향한 넷. 거기서 학훈은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차마 그녀에게 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사실을. 물론 도연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 “……말도 안 돼.” ​ “사실이야 누나, 내가 확인했어.” ​ “그럴, 수가…….” ​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도진은 옆에서 거들며 말의 신빙성을 보충해주었다. ​ 꽤 긴 시간이 지났고, 학훈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 “………….” ​ 멍한 표정의 도연. 이내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 ​ “…전 여전히 당신이 미워요.” ​ “………!!” ​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훈만은 그럴 수 있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 그렇겠지….” ​ 용서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체념했지만, 도연의 눈물은 그런 게 아니었다. ​ “이걸 왜 이제서야 이야기하는 건데요? 좀 더 빨리, 솔직하게 다 털어놨으면 됐잖아요…!” ​ “……….” ​ “왜 그렇게 혼자 끙끙 앓았냐고요, 바보같이…!” ​ “도연아…….” ​ “흐윽, 흑. 나는 돈이나 지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그저 곁에 있어 주기만 했으면 됐는데….” ​ 이내 오열하는 그녀. 그 역시도 여기서 무너지고 만다. ​ “내가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 그렇게 울음바다가 된 부녀간의 재회.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진정됐을 즈음, 부녀간 관계는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 “…아빠.” ​ “……!” ​ 흠칫하는 도학훈.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에 그는 또다시 가슴이 뜨끈해졌다. ​ “용서할게요, 아빠도 저희와 똑같이 힘드셨다는 걸 이젠 아니까요….” ​ “아아….” ​ 두 자녀에게 용서받게 된 도학훈. 그의 눈가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묵은 그 광경을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 ‘……다행이구만.’ ​ 돕길 잘했다고 생각한 성묵. 그렇게 도연과 도진, 학훈 간의 못다 한 이야기가 시작되며 성묵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졌다. ​ 그렇게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카페 밖으로 나온 학훈은 진심으로 성묵에게 감사를 표했다. ​ “…진심으로 고맙네, 자네가 없었다면 절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할 수 없었을 거네.” ​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뭐.” ​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겠나?” ​ “예?” ​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명색이 한국 야구 협회장일세. 자네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나.” ​ “………….” ​ 잠시 생각에 잠긴 성묵. 그는 곧 학훈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제가 원하는 건…….” ​ ​ ################ ​ ​ 성묵이 떠난 자리. 도학훈 협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 “허허, 나 참.” ​ 이런 부탁은 처음이다. 성묵이 남기고 간 말은 간단했다. ​ ‘이번 국가대표 선정, 공평하게 부탁드립니다. 배경, 출신, 혈연, 지연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철저한 실력순으로요.’ ​ “…똑똑한 친구로군.” ​ 굉장히 스마트한 부탁이라 생각하는 학훈. 평소 아들이 출장한 경기를 전부 챙겨보는 그이기에, 저 부탁이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바로 알아차렸다. ​ ‘이동혁, 그 북한 출신 친구 때문이겠지.’ ​ 어차피 성묵은 누가 봐도 뽑히는 게 당연하기에 제외하고, 문혁고에서 국가대표권에 든 선수는 이동혁이 유일한 상황이니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다. ​ 도진을 몰래 따라다니며 문혁고의 전 경기를 지켜본 도학훈, 그는 리동혁의 실력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 ‘국가대표에 능히 뽑힐 공을 가지고 있다만, 출신이 발목을 잡겠군.’ ​ 대외적으로 알려진 리동혁의 ‘북한 고위층 간부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한국 리그에서 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국가대표’로서는 치명적이다. ​ 도학훈 쯤 되는 인물이 직위를 이용해 찍어누르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남한 국가대표로는 뽑힐 일이 없는 게 리동혁이다. ​ 물론 그렇다고 성묵이 노골적으로 ‘이동혁을 뽑아달라’ 라고 부탁했다면 그는 조금은 실망했을 것이다. ​ 은혜를 입었고 약속한 이상 들어주긴 했겠으나, 훗날 성묵과 끈끈한 뭔가를 도모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 ​ 생긴 것과는 달리 야구에 진심인 듯 보이고, 엄청난 실력과 더불어 머리도 좋은 편이라고 판단을 마쳤다. ​ 도학훈은 이제 막 카페에서 나오는 도연을 향해 씩 웃었다. ​ “도연아, 꽤 괜찮은 남자를 골랐구나.” ​ “……!?” ​ “이 아빠는 응원한단다.” ​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 “우리 집안 여자들은 대체로 어린 남자와 궁합이 괜찮았지, 암.” ​ “아와와와…….” ​ 말 몇 마디에 고장 나버린 도연. 도학훈은 정장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 ‘…그럼 어디, 사위 부탁 좀 들어줘 볼까.’ ​ 당장 내일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 회의. ​ 본래 협회장쯤 되는 그가 갈 자리는 아니지만, 도학훈은 그곳에 행차할 예정이다. 오직 성묵을 위해서.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