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괴도 도팽(Dauphin) (6) - 강하게 산다는 것 「아빠, 마을 사람들은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 주황색 머리와 밝은 연두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볼멘 얼굴로 불평을 이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에게 은인이라고, 영웅이라고 실컷 떠들었으면서, 영주가 아빠를 불편해한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곧바로 나가 달라고 하다니. 어쩌면 저렇게 염치가 없는 걸까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이 몇 번이고 등 뒤로 고개를 돌려 마을을 노려보는 소녀를, 중년의 남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달랬다. 「귀여운 우리 딸. 팬케이크도 못 먹고 쫓겨나서 억울했나 보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전 그냥 저 사람들의 뻔뻔함이 싫을 뿐이에요. 마을 주변에 트롤이 나타났는데도 영주는 손도 안 대고 방치한다며 힘껏 욕을 퍼부어 놓고, 막상 영주가 찾아와서 헛기침 좀 하니까 다들 눈치만 살피잖아요. 정말 비겁해요.」 「달리아.」 중년의 남성은 걸음을 멈춘 뒤 몸을 낮춰, 주황색 머리의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외면한 건, 그들이 악하고 이기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그들이 지닌 힘이 너무나 약하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겁기에,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뿐이지.」 소녀의 눈에 중년 남성의 모습이 비쳤다. 수더분한 수염, 거칠고 상처가 가득한 피부. 몇 번이나 망가지고 고치기를 반복한 갑옷은 너저분하고, 사람들이 ‘기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화려함 따윈 조금도 없다.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닐 여력조차 없어 두 발로 터벅터벅 걸어 다니고, 제대로 된 종자조차 없어 함께하는 이라고는 어린 딸 한 명뿐. 민중의 기사. 약자들의 기사. 가장 낮은 곳의 기사. 제아무리 거창한 칭호로 치장하고 눈을 속여봐야, 그 실체는 자기가 구한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보수조차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떠돌이일 뿐. 그것이, 어린 소녀는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녀는 다른 영지에서 보았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여러 종자를 대동하며, 거대한 말 위에 올라탄 채로 거들먹거리며 영지를 순회하고는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사가 지나가는 길 양옆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채 대기하거나, 애써 만든 웃는 얼굴로 기사와 기사가 모시는 영주의 위대함을 찬송하고, 그들로 인해 영지가 얼마나 평온한지를 아부 섞인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소녀의 아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들보다도 더욱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다. 소녀의 아빠는 강했고, 트롤조차 단칼에 베어버리는 실력을 지녔으면서, 명확한 주군 하나 없이 떠도는 기사를 탐내는 귀족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허나 그는 그러한 귀족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끝까지 자유 기사로 남을 것을 고집했다. 그로 인해 귀족들의 반발을 사 이전보다도 더욱 열악한 처지에 빠졌으면서도, 소녀의 아빠는 끝까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의 곁에는 굳이 자기가 아니더라도 충성을 바치는 기사들이 많고 많을 테니,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냐면서. 「약자를 지키고, 도움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이야말로 기사의 본분이자 낭만이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외견으로,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꿈꾸는 소년처럼 단언하는 아빠를 향해, 주황색 머리의 소녀는 뺨을 부풀렸다. 「…정작 옆에 있는 딸은 안 도와주면서.」 「쿨럭!」 한껏 멋진 대사를 말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사레들린 듯이 기침을 반복하더니, 이내 식은땀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강대한 대영주의 으름장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 뜻을 주장할 만큼 대담한 남자였지만, 자기 때문에 함께 고생하는 딸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함께 다니는 게 힘들면 저번에 말한 것처럼 친구네 집에서 지내는 것도….」 「멀쩡한 아빠 놔두고 다른 집 가서 눈치 보며 살라고요? 왜요, 이제 그냥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귀찮아졌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네가 곁에 있어서 아빠는 매일 너무너무 감사하고 있단다.」 본인이 훌륭한 기사일지언정 훌륭한 아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남자는 방금까지의 기세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슬금슬금 야무진 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아빠를 바라보며,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용기를 내주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 야속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소녀는 납득해 보려고 노력했다. 아빠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강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 일만으로도 필사적인 사람들에게, 무리한 용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너무나도 잔혹한 또 하나의 폭력일 테니까. *** “…최악이네.” 입에서 새어 나온 한마디는 과연 꿈의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어젯밤의 일 때문이었을까. 본인조차 정확한 해답은 모르는 채로, 달리아는 우울한 아침을 맞이했다. 괴도 도팽과의 첫 대결에서, 결국 달리아는 패배했다. 어찌어찌 의뢰인의 몸을 지켜내기는 했지만, 그것뿐. 도팽은 붙잡지 못했고, 그가 어느새인가 저택 내의 귀금속을 빼돌리는 것도 막지 못했으며, 심지어 의뢰인이 머무는 건물 일부까지 본인 손으로 때려 부수고 말았다. 의뢰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찾아온 중대장에게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고, 경비대 숙소에서 짤막하게라도 눈을 붙인 것이 겨우 몇 시간 전. 8소대의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정말로 피곤한 날에는 꿈조차 꾸지 않고 그냥 눈만 감았다 뜨면 수면 시간이 끝난 기분이라 억울하다고 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밤 중 내내 뛰어다니고도 잘만 꿈을 꾸는 이 몸뚱이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별 잡생각이 다 드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달리아는 몸단장을 시작했다. 어차피 출근하자마자 어제 미처 다 듣지 못한 질책의 다음 내용을 이어 들을 뿐이겠지만, 그렇다고 마구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녔다간 병사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고, 주민들에게도 신뢰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별히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 터라, 기본적인 청결 관리를 제외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머리카락 정도.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그냥 짧게 잘라 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대장님이 그러면 저희도 모조리 단발로 바꿔야 한단 말이에요!’라는 8소대 여자 경비병들의 절규 때문에 마지못해 길게 유지하는 상태였다. 다른 준비를 다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갑옷을 입으려던 달리아는 이내 눈을 찌푸렸다. 어제 추락하면서 부딪친 탓인지, 갑옷 일부가 크게 찌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수리를 맡겨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간이 없고 그렇다고 예비 갑옷도 없다. 같은 숙소를 쓰는 여 경비원 중 비번인 인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슴 부분의 사이즈가 맞질 않으니 빌려봐야 의미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달리아는, 갑옷의 찌그러진 부분을 바닥에 놓은 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서 억지로 펼쳤다. 그러자 적어도 겉보기상으로는 갑옷의 형태가 제법 그럴듯하게 돌아왔다. 방어력을 생각한다면 언젠가 제대로 수리를 맡겨야겠지만, 당장 쓰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터. 문제를 해결한 그녀는 숙소를 빠져나와 중대장실로 향했다. 아마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욕설이 날아오겠지. 무심코 새어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억누르며, 그녀는 중대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똑, 똑. “8소대장 달리아입니다.” -흠! 기다리고 있었네! “……?” 묘하게 들뜬 듯한 목소리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그녀가 의문을 해소하는 것보다 먼저, 중대장이 직접 문을 열고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우리 레브르크 경비대의 영웅이여!” 달리아는 잠깐 눈을 껌뻑였다. 순간 새로운 종류의 비아냥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중대장의 얼굴이 지나치게 밝았다. 당장 꺼지라며 어젯밤 그녀를 윽박질렀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황당함으로 물든 달리아의 얼굴을 보고 본인도 조금 민망했는지, 중대장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어젯밤은 미안했네, 도팽 그 사악한 도적놈을 향한 분노가 너무 컸던 나머지, 자네에게 ‘살짝’ 말이 과했던 것 같군.” 달리아의 머릿속. 어젯밤 들었던 폭언의 향연이 스쳐 지나갔다. 곁에 있던 소대원 중 일부가 발끈하며 달려들 뻔했었던 그 막말을 ‘살짝’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달리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상사가 그렇다는데 지적해 봐야 별 의미가 없기도 했고, 범인을 놓쳤으니 질책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기에 더욱 지금 중대장의 태도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자, 이렇게 문 앞에서 떠들게 아니라, 우선은 안에 들어오게. 어이, 거기! 마실 것 좀 가져와!” 당번병에게 간단한 다과까지 준비시킨 중대장은, 평소에는 받아본 적 없는 대우에 얼떨떨해하는 달리아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오기 전, 세무관께서 의식을 되찾으셨다네. 그분께선 이번 성과에 크게 만족을 표하시더군.” “만족…이라니요?” 범인은 놓치고, 재물도 빼앗겼다. 이 상황에 만족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나? 달리아는 그리 생각했지만, 중대장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다르지, 달라. 도팽 그놈은 ‘도주’한 걸세. 결국 세무관님의 몸에는 손도 못 대지 않았나?” 지금까지 도팽은 그 어떤 경비도, 대책도, 함정도 전부 가뿐히 돌파하고 보물을 훔쳐냈으며, 표적들을 붙잡아 도시 여기저기에 과시하듯이 전시했다. 이는 체면과 평판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상류층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로 죽음보다도 치명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리아에게 가로막혀 재물을 훔쳐내 피해자들에게 환원하는 데 그쳤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세무관은 이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어차피 사르노스 백작의 자식인 그에게 재산 일부를 빼앗긴 정도야 크게 아픈 축에도 못 꼈으니까.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미 소문이 퍼졌는지, 귀족분들 사이에서도 자네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중이야. 이렇게까지 반응이 빠르다는 건, 그만큼 어제 사건을 주목하고 있던 이들이 많았단 거겠지. 8소대장, 자네가 우리 경비대의 체면을 살렸다 이 말이네.” 중대장이 답지 않게 얼굴에 온갖 금칠을 해줘도, 달리아는 그리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어봐야, 달리아 본인에게 어젯밤의 대결은 패배였으니까. 그녀의 무덤덤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중대장의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갔지만,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은 달리아의 힘이 필요했다. “8소대는 앞으로도 상류층 구역 전담반으로 활동할 걸세. 도팽이 노리는 표적은 다 그쪽에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그건 상관없지만, 다른 소대 쪽에서 반발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달리아 본인도 도팽과 승부를 내고 싶었던 만큼,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는 바라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이 서민 구역에서 성실하게 업무에 임할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그럴 걸세. 도팽을 못 잡았으면, 그런 곳에서라도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할 것 아닌가. 아주아주 ‘열심히’ 일할 테니 안심하게.” 그것조차 못 한다면 본인 손으로 도륙을 내버리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런 곳’이라는 표현이 다소 거슬린 달리아였지만, 어쨌든 중대장이 다른 소대장들을 압박한다면 그들 역시 태업을 일삼지는 못할 테니 좋은 일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꼭 동기가 선량하고 정의로울 필요는 없다. 설령 중대장의 위신 세우기가 목적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돕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경비대의 본분일 테니까. 「질서의 붕괴는 많은 피와 혼란을 부를지도 모르지. 허나, 그렇다고 질서 아래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건 옳은 일인가? 흘러내릴 피가 무섭다는 이유로 고름을 계속 방치하느니,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 짜내버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일 아닌가?」 머릿속에 떠오른 도팽의 질문에, 달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질서를 무너트리고, 귀족들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린다면, 과연 그들이 순순히 굴복하려고 할까? 그럴 리가 없다. 귀족들은 발악할 테고, 권위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폭압적으로 사람들을 강압할 터. 그 피와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은 강하지 않다. 그들은 약하고 약해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그러니 그들을 부추기지 마. 이길 수 없는 승부에 도전장을 내밀라고 강요하지 마. 설령 괴로워도, 힘들어도, 무모한 도전 끝에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