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괴도 도팽(Dauphin) (5) - 초승달 아래의 문답 클라우디아에게 분신 마법을 간파당한(간파당하지 않았다)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황태자는, 분신 마법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전처럼 쉬는 시간에 틈틈이 개조하는 정도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척이나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우선 마법 분석 및 개량에 사용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부하들의 서류를 죄다 뺏어다 아예 일주일 치를 혼자서 끝냈다. 그러면 왜 평소에는 그렇게 안 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황태자 입장에서 나름 리스크를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열심히 하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처음에는 감탄하지만, 나중에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안다. 일주일 치 일을 하루에 끝내면 6일 동안 쉴 수 있는 게 아니라, 남은 6일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그가 이른 나이에 황제의 업무 일부를 분담하게 된 이유가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너무 날뛰어서 아닌가. 게다가 부하들의 사기와 의욕 문제도 있다. 자기가 일주일 넘게 고생고생해서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와서 슥 훑어보고 하루 만에 끝내버리면 당사자가 느낄 박탈감과 허무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어쩌다가 한 번 도와주는 정도야 인생의 큰 행운이라 여기며 감사히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면 결과적으로는 조직 전체의 업무 능률 저하로 이뤄진다. 그런 리스크를 각오하면서까지 만든 시간을 오로지 분신 마법에 쏟아부은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과거에는 흘린 피나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가 곧바로 마력으로 변해 주변에 들킬 위험성이 컸지만, 새로운 분신은 적어도 일주일 이상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기에 좀 더 리얼리티 있는 연기가 가능해졌다. -분신의 위장 기능이 크게 향상되어, 적어도 6등급 이상의 실력자가 아니면 설령 분신의 상태가 나쁘더라도 정체를 간파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점 특화 기준 기본 4등급에 자괴를 전제로 5등급 수준의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 기본 5등급 초입에 자괴를 전제로 5등급 끝자락의 힘까지 낼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본래 그저 그런 것을 좋게 만드는 것보다 원래 좋던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 황태자가 개조한 것이 본래 대악마가 사용하던 분신 마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 만에 이 정도 개량에 성공한 황태자의 능력은 가히 초월적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괜히 대악마가 인간 언저리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분신 마법 Ver 2.0』을 활용해, 황태자는 괴도 도팽의 능력을 본인 취향껏 세팅했다. 그 컨셉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도구 제작 특화』 괴도가 연막탄, 화염병, 글라이더, 위장 마스크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목표물을 훔쳐내는 것처럼, 도팽에게는 다양한 도구를 제작하고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뤄내는 능력이 있었다. 하룻밤 동안만 유지되는 수십 개체의 임시 골렘을 이용해 몸뚱이 하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다중 작업을 실행하기도 했고, 신체 강화 능력이 달린 슈트로 어지간한 기사급 운동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자작한 마법의 트럼프로 온갖 종류의 주문을 다뤄내기도 했다. 다른 분신과 달리 사전 준비와 재료가 꽤 필요한 데다가 도구 제작을 제외한 스펙은 일반인 수준이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 능력은 일개 개인이 왕국 최대 규모의 도시 중 하나를 농락할 수 있을 정도. 사르노스 백작가에서 직접 기사단을 파견한다면 몰라도, 적어도 일개 경비병 중 하나가 감히 붙잡는다, 어쩐다를 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는, 그러할 터였다. 부우우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일격을, 도팽은 한 손으로 모자를 억누르며 회피했다. 뒤로 도약하면서 트럼프를 투척하자, 빳빳한 카드 몇 장이 달리아의 갑옷 위로 박혀 들며 강렬한 전격을 뿜어냈다. 본래라면 사람을 행동 불능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공격. 파아아앗! 하지만 달리아는 마치 전격의 효과를 전혀 받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거리는 기색조차 없이 정면으로 돌진하며 창을 내질렀다. 도팽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내 유쾌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호! 어떻게 견딘 거지? 특별한 방호 마도구라도 있는 건가?” 대답은 말이 아닌 찌르기로 돌아왔다. 어깨를 노리며 매섭게 짓쳐 드는 공격을 도팽은 옆으로 몸을 굴려 회피했고, 그와 동시에 달리아를 향해 양 끝에 무게추가 달린 와이어를 투척했다. 와이어는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달리아의 몸을 강제로 묶었고, 그 상태로 단단히 얽혀들었다. “구속용 특제 와이어일세. 검기를 써도 단번에는 무리고 톱질 정도는 해야 자를 수 있는 물건이지!” 만약 모험가 베른이었다면 구태여 자기가 지닌 도구의 성능이나 기능 따위를 설명하는 일은 안 했겠지만, 이곳에 있는 건 유쾌한 괴도 도팽. 여태까지 보아온 놈들은 유쾌고 나발이고 일단 무력 제재부터 고려해야 할 놈들이었으니 굳이 말할 가치도 못 느꼈지만, 이 아가씨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도팽은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본인의 도구 자랑을 이어가려 했고─ 드득! ─다음 순간, 달리아가 검기고 뭐고 없이 그냥 힘으로 와이어를 잡아 뜯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아니, 잠깐 기다리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제작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데, 어이쿠!” 허둥지둥 빈틈투성이 같은, 허나 그러면서도 공격에 대한 대처만큼은 완벽한 도팽의 모습에, 달리아가 면갑 뒤에서 눈을 찡그렸다. 부우우우우우우웅! 그녀의 공격이 더욱 매서워지고, 창을 휘두를 때마다 실내에 작은 돌풍이 몰아치는 수준에 이르자, 도팽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처음 침입한 구멍 쪽으로 몸을 빼냈다. 이동 반경이 제한되는 실내에서는 저 무시무시한 힘을 품은 강창(强槍)을 회피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팽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지붕 위에 오르자, 달리아 역시 그 뒤를 따라 도약했다. 초승달이 내려다보는 밤하늘. 본연의 성격을 드러내듯이 직선적이고, 그러면서도 우직한 창술을 사용하는 경비병에게, 도팽은 공격을 열심히 회피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내 여태껏 다양한 경비병을 보았지만, 자네 같은 실력자는 처음 보는군!” “아까부터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도둑한테 밝힐 이름 같은 건 없어!” “그건 경비로서 실로 지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하네만, 그렇기에 묻고 싶군.” 도팽의 어깨에 있던 망토가 제멋대로 펄럭이는 듯하더니, 이내 크게 부풀며 달리아의 시야를 차단했다. 달리아는 창을 휘둘러 망토를 강제로 치워버렸지만, 도팽은 어느새인가 창날 위에 올라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무엇을 위해 싸우지?” 달리아는 먼지를 털어내듯이 창을 내리쳤고, 도팽은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더니, 지붕이 아닌 허공에 안착했다. 창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서, 태연히 허공을 활보하는 괴도의 모습에, 달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행 마법?” “이왕이면 ‘마술’이라고 해주면 좋겠군. 뭐, 진짜 기술자들에 비하면 이런저런 주문을 섞어 쓴 건 사실이지만.” 도팽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에는 쓰레기가 많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더군. 이러고도 나라가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어.” 달리아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자기를 공격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지만, 도팽은 개의치 않았다. 전투 도중에 대화를 시도해 놓고 상대가 얌전히 이야기만 들어주길 바라는 쪽이 되레 양심이 없는 거니까. “자네가 지금 지키려 하는 쓰레기 또한 마찬가지일세. 그자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들은 두 손으로 세기 어렵고, 그들은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지금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고 있지. 그걸 알면서도, 자네는 그자를 지키려는 건가?” 평소라면 일개 도둑의 말 따윈 그냥 무시하고 말았을 달리아였지만, 이번만큼은 생각보다도 먼저 입이 열렸다. “그가 악인이라는 사실이, 네가 하는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아.” 면갑의 슬릿 사이로, 밝은 연두색의 눈동자가 도팽을 꿰뚫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벌을 받아야겠지. 하지만 그건 적합한 절차와 규율에 따라 이뤄져야 할 일이지, 그냥 마음에 안 드니까 다 때려 부수는 식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야!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아? 그래 봐야 네가 하는 건 범죄고! 넌 그냥 범죄자야!” “흐음.” 도팽은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달리아에게 혹평을 들었음에도, 그는 그리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달리아의 말에 기꺼워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그래. 개인이 타인의 죄를 멋대로 재단하고 그를 처단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봤을 땐 악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끝에 있는 건 질서의 붕괴니까.” “알았으면 순순히 자수해. 지금이라면 어디 부러트리지 않고 붙잡아 줄 테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로군. 자네가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 해도 다른 이들마저 그럴 리가 없을뿐더러… 내가 정답이 아니라는 게 자네 쪽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뭐?” 도팽은 양팔을 크게 펼친 채 목소리를 드높였다. “질서! 규율! 적합한 절차! 좋지, 실로 옳은 말이야. 허나 그건 그 제도들이 온전히 기능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일세. 자네가 보기에는 이 도시의 법과 규율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가?” 달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혹은 그 침묵이야말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성실함을 높게 평가하며, 도팽은 입가에 미소를 깊게 했다. “질서의 붕괴는 많은 피와 혼란을 부를지도 모르지. 허나, 그렇다고 질서 아래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건 옳은 일인가? 흘러내릴 피가 무섭다는 이유로 고름을 계속 방치하느니,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 짜내버리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일 아닌가?” “그런 건 궤변이야.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걸 판단해?” “말했잖는가, 이건 정답의 문제가 아니라고.” 도팽이 허공에서 발을 힘껏 구르자, 그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내려오며 달리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누가 뭐라고 하건,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선에 가깝다고 믿네.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선과 악의 천칭 중 선 쪽에 치우친 행동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대로 행할 뿐이지! 실로 간단한 일 아닌가!” 매번 100점짜리 온전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허나 60점만큼의 선과 40점만큼의 악을 반복한다면, 세상은 적어도 20점만큼은 나아질 것이다. 그 정도만 알면 행동의 이유로는 충분하다며, 도팽은 단언했다. “나의 행동은 적어도 나에게는 선행이며, 나의 행동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떳떳하네. 그것이 세간의 인식으로는 혼돈이자 무질서라고 해도 상관없지, 법대로, 절차대로 행동할 거였으면 괴도 따위를 왜 하겠나!” 면갑 너머에 있는 달리아의 얼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하며, 도팽이 말했다. “자네는 어떤가! 자네의 행동은 자네의 기준으로 선행인가? 자네의 행동은 자네 자신에게 있어서 떳떳한가? 만약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네. 나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역시 하나의 길임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행동을 선이라 단언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떳떳할 수 없다면. “그때는 길을 바로잡는 것을 망설이지 말게나. 마음속 양심을 외면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그 순간, 자네는 자네가 경멸하던 이들과 똑같은 존재로 전락할 테니.” 달리아의 연두색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이를 악물고, 도팽을 힘껏 밀쳤다. 도팽은 그 힘마저 이용하려는 듯이 여유롭게 뒤로 도약을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밀치는 힘이 강했는지 잠시 균형을 잃고 뒤뚱거렸다. 가슴 부분을 움켜쥐고 입가를 파르르 떠는 게 아픔을 애써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진짜 그냥 경비병 맞나? 자네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거라면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혹시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거라면, 내가 좋은 취직처를 소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닥쳐! 이 범죄자!!” 더 이상 저 요사스러운 혓바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달리아가 손에 든 창을 길쭉하게 늘렸다. 그리고, 그 창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려찍었다. 도팽은 미리 설치해 둔 투명 와이어를 이용해 다시금 허공으로 떠올라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으나, 그가 딛고 있던 지면은 그렇지 못했다. 평소에는 범죄자들 상대로도 힘 조절을 하는 달리아가, 무심코 기세대로 내려친 공격이 지붕에 명중했고. 콰아아아아앙! 이내, 그들이 딛고 있던 건물의 1/4 정도가, 그대로 폭락했다. “앗!?” 당황하는 목소리와 함께, 본인이 만들어 낸 폭락에 휩싸여 그대로 추락하는 달리아. 허공에서 그 모습을 눈을 껌뻑이며 지켜보던 도팽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자칫했다간 최초로 남의 손에 맞아 죽는 분신이 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