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하인 세드릭(Cedric) (8) - 에체드의 영주 “저번 사죄 이후로, 아가씨께서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그렇지. 함부로 손찌검하는 일도 없어지고, 혼낼 때도 말로 끝내고.” “나, 나, 저번에 구두 광을 잘 냈다고 칭찬받았어. 우리가 뭘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다 지켜보고 계셨나 봐.” “어머니께서 쓰러지시는 바람에 급하게 집에 가봐야 했는데, 아가씨께서 휴일을 내주셨네. 어쩜 그리도 배려가 깊으실까.” “사실 아가씨 정도면 나름 괜찮은 주인님 아닐까? 적어도 급여를 떼먹거나 하는 일은 없잖아.” “그런가? 아니, 그래도 옛날 그 패악질은 좀….” “어허! 패악질이라니! 그냥 일시적 방황기지, 방황기! 저 나이 때에는 늘 상 있는 일 아닌가!” “저번에는 급여만 아니면 상종 못 할 주인이라고 구시렁댔으면서.” “무, 무슨 소리야! 있지도 않은 일을 막 지어내지 말게!” 웅성웅성. 수군수군. 에체드령에 세워진 레드벨 저택. 그곳의 하인들은 최근 날이면 날마다 ‘주인 아가씨’의 변화에 관해 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의심과 불안이 섞인 눈으로 눈치를 살피던 하인들도, 클라우디아가 적극적으로 호의적이고 품격 있는 태도를 보이자 서서히 긴장의 끈을 늦추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당혹스럽고 의아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그 변화가 싫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좋다. 언제 발작하며 나를 물어뜯을지 모르는 미친개와 상냥하고 기품 있는 귀족 영애 중 어느 쪽이 상사로서 바람직한지는 비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이러한 수군거림의 중심에 있는 클라우디아의 입장은 다소 달랐다. “피곤해… 너무 힘들어….” 클라우디아의 방.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칭얼거렸다. 항상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들의 호의와 존경을 사기 위한 태도와 언동을 유지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평소 본인 성격대로 불만 있으면 바로 짜증을 내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곧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생활을 했던 클라우디아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세드릭. 나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하하하, 아가씨.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그야 당연히 평생이지요.” 세드릭의 대답에,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절망에 물들었다. “진짜? 이런 가식 떠는 짓을 평생 해야 한다고?” “본래 사회인들은 다 그러고 사는 법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거, 불만 있는 거 다 드러내면서 사는 건 인간이라기보다도 짐승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너 지금 네 주인이 짐승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개인 감상을 섞은 진실과 그냥 객관적 진실 중 어느 쪽이 취향이십니까?” “…됐어. 그냥 안 들을래.” “아쉽군요. 아가씨께 또 한 번 값진 충언을 올릴 수 있나 싶어 기대했건만.”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세드릭을 새초롬하게 노려보던 클라우디아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푸념을 내뱉긴 했지만, 클라우디아 역시 자신을 향한 주변의 평가가 놀랍도록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단기간에, 너무나도 극적인 효과가 나와서 되레 얼떨떨할 정도였다. “성과에 기뻐하시는 건 좋습니다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직 레드벨 후작님께 보여줄 성과치고는 너무 미약하니까요.” 초를 치는 듯한 세드릭의 말에 순간 인상을 찡그린 그녀였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하고는 물었다. “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일단 재차 확인해 두겠습니다만, 아가씨께서는 이 에체드령의 영주이신 게 맞겠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목상으로라면 맞아. 실질적인 관리는 영주 대리가 대신하지만. 어차피 이런 시골, 별로 관심도 없고.” “우선 인식부터 바로잡아야겠군요. 이곳은 절대 시골 영지가 아닙니다.” “뭐?” 클라우디아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세드릭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기에 이 에체드령은 절대 저평가 받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모험가 베른이 주로 활동했던 길드 동부지부. 그 동부지부가 위치한 도시의 인구수가 수천 정도. 헌데 이곳 에체드령의 인구수는 1만을 가뿐히 넘고, 영토의 크기는 거의 다섯 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클라우디아가 이곳을 ‘시골’이라 인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레드벨의 다른 영지는 이것보다도 더욱 알짜배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반 귀족 성향이 강한 모험가 길드가 왕국 전역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데도, 무능한 시골 귀족들을 상대로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 이유를 알겠군. 수도권 근처에 있는 귀족들의 힘이 너무 강해.’ 왕국의 세 축이라 불리는 왕가, 후작가, 백작가의 영토를 다 합쳐도 국토 중 30%를 넘지 않았다. 헌데 인구수로 따지면, 저 30%에 속한 인구수가 나머지 70%에 속한 인구수와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다.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으니 그만큼 인재도 자본도 풍부했고, 영지 하나하나의 발전도도 높았다. 세드릭이 보기에는 여러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불균형한 구조였지만, 지금만큼은 그에게 도움이 되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레드벨 후작이 이 정도 영지를 ‘시골’이라면서 눈 밖에 난 딸 손에 쥐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 아가씨께서 해야 할 일은─” *** “오늘부터 여기는 내가 직접 관리할 테니까, 당신은 이만 쉬어도 괜찮아.” 느닷없이 관저로 쳐들어온 클라우디아가 그렇게 요구했을 때, 에체드의 영주 대리인이 느낀 감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허나 자잘한 것을 모두 쳐내고, 오직 단어 하나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같잖음’이라고.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을 가면처럼 뒤집어쓴 채, 영주 대리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말했다. “클라우디아 님, 말씀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느닷없이 제게 물러나라니요?” “이곳 에체드의 영주는 나잖아? 영주가 영지를 직접 관리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애초에 클라우디아의 영주 직은 제대로 된 의미로 수여된 게 아니었다. 그 지랄 맞은 성격 탓에 사교회 참석이나 신전에서의 봉사 등 정상적인 귀족 영애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한 클라우디아에게, ‘영주 직을 수행하느라고 대외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다’라는 변명을 가져다 붙이기 위해서 억지로 수여한 직함. 훗날 클라우디아를 이용한 정략혼 때, 그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올려치기 위한 서류상의 경력에 지나지 않는다. 영주 대리는 웃는 얼굴 아래에서 내심 혀를 찼다. 후작에게 이곳의 관리를 맡겨진 그의 입장에서 볼 땐, 이런 철부지와 대화를 나누는 데 소모하는 시간 1초 1초가 그저 낭비처럼 느껴졌다. “허허허, 클라우디아 님. 한 영지를 관리한다는 건 무척이나 막중한 책임감과 또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댔다가 영지에 혼란이라도 생긴다면, 후작님께서도 매우 안타까워하시겠지요.” 흠칫, 하고. 클라우디아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영주 대리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내심 고소함을 느꼈다. ‘흥. 근본 없는 일개 하인들이라면 몰라도, 후작님께 직접 명령을 받은 나에게 네깟 것의 어리광이 통할 것 같더냐?’ 만약 이곳에 찾아온 게 클라우디아가 아닌 다른 남매들이었다면, 영주 대리 역시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예외였다. 클라우디아의 어머니는 비르카의 왕족이었으나, 막상 그녀의 어머니가 외가에서 받은 지원은 어지간한 시골 귀족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당대 비르카 왕가는 여러 왕족 중 정통성이나 능력 면에서 특출나게 뛰어난 이가 없어 끝없는 정치투쟁이 반복되는 중이었고, 그들은 구태여 ‘외부인’이 된 옛 왕족에게 왕가의 힘과 자원을 소모하여 지원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 똑같이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른 남매들이 첫째 부인이 지니고 있던 각종 유형무형 자원을 물려받아 흡수한 것에 반해, 클라우디아는 오롯이 아버지인 후작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그리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허우대만 멀쩡할 뿐, 실질적으로 가진 권력이라고는 없는 영애. 그런 클라우디아에게, 영지 하나를 통째로 맡겨질 정도의 가신인 그가 굳이 겁먹거나 위축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그러했다. “오늘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야.” 오싹할 정도로 낮은 클라우디아의 목소리. 영주 대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샌가 나타난 핏빛 쌍두랑이 그의 몸을 바닥에 깔아뭉갠 뒤였다. 크르르르르르! 크르르르르르! 혈액으로 빚어낸 듯한 신체.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이형의 늑대가, 각각의 주둥이에서 으르렁거림을 자아냈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물어뜯고 머리를 씹어 먹을듯한 혈마수의 위용에, 영주 대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입만 뻥긋거렸다. “여, 영주님!!” 영주 대리와 함께 접견실에 들어와 있던 호위 기사들이 경악하며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이는 너무나 늦은 반응이었다. 이미 그들의 앞에도 각각 무시무시한 살기와 위용을 뽐내는 혈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곧장 달려들 것만 같은 혈마수들의 모습에, 호위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레드벨 가문에 속한 가신들이었기에, 그들은 혈마수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무력만 따져도 막강하기 짝이 없는데, 그 어떤 부상도 개의치 않는 저돌성까지 지닌 마수들. 제대로 진형을 갖춘 뒤 단체로 덤벼도 상대하기 싫은 적인데, 실내에서 반쯤 기습당한 형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목소리를 높여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아가씨!!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그러는 너희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클라우디아의 짜증과 혐오로 가득 찬 시선이, 영주 대리와 그 부하들을 꿰뚫었다. 몸통을 손아귀로 움켜쥔 뒤, 얼음송곳으로 하나하나 찌르는 듯한 눈빛에 그들은 무심코 압도당하고 말았다. “일개 대리인 따위가 감히 영주를 겁박해? 그리고, 거기 너. 아까 이놈을 ‘영주 대리’가 아니라 ‘영주’라고 불렀지. 진짜 영주인 나한테는 ‘아가씨’라고 부르고, 대리인은 ‘영주’라고 부른다? 재미있네, 이거? 응?” 클라우디아의 분노에 호응하듯이, 혈마수들의 살기 역시 더욱 그 기세를 늘려갔다. 감정이란 무릇 소모품에 가깝다. 지나치게 자주 표출하는 감정은, 그렇기에 경박해지는 법. 허나 쉽게 표출하지 않고 억눌러 온 감정은, 겉으로 드러냈을 때 주변을 압도한다. 최근 하인들 앞에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억눌러야 했던 클라우디아의 흉포한 기질이 적절한 계기와 함께 표출되자, 영주 대리 일당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클라우디아는 바닥에 짓눌린 영주 대리를 향해,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내듯이 또박또박 선언했다. “가서 아버지한테 전해. 이곳 에체드를 내가 바꾸겠다고. 내 용도를 결정하는 건 그 결과를 보고 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그, 어.” “괜히 말을 왜곡했다간 알지? 여기 있는 너희 얼굴은 분명히 기억했어. 설령 내가 어디 이상한 곳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있어도, 너희를 찾아서 늑대 먹이로 만들어 버릴 능력 정도는 있으니까 처신 잘해.” “…….” “대답 안 해?” “아,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 마수 좀, 치워주십시오!” 클라우디아가 코웃음을 치자, 영주 대리를 앞발로 짓누르고 있던 혈마수가 뒤로 물러나며 클라우디아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영주 대리는 혈마수가 물러난 뒤에도 몇 번이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클라우디아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그 얼굴은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은 기색이었지만, 결국 뭐라고 불평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조용히 관저를 떠나갔다. 그의 호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별장에서 데려온 집사장 베스티앙과 일부 하인들을 향해 명령했다. “관저에 있는 하인들에게 오늘부터 내가 여길 통치한다고 전해. 순순히 받아들이는 놈은 흡수하고, 아닌 녀석은 쳐내버리고 너희가 그 자리를 차지해. 단, 쳐낼 땐 쳐내더라도 업무 인수인계에 대해선 전부 털어놓게 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저택 내에서도 유달리 그녀에게 호의적이고, 강한 충성심을 드러낸 이들 위주로 선별해 온 탓일까, 불만이나 걱정의 말을 입에 담는 이들은 없었다. 다른 하인들이 모두 떠나간 방. 방금까지 영주 대리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은 클라우디아가, 방에 유일하게 남은 하인, 세드릭을 향해 물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세드릭이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저에겐 미래를 보는 능력이 없는 관계로, 그 질문에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후우, 그렇지. 그렇겠지.” “하지만.” “?” 세드릭이 웃었다. “주변에 화풀이만 하며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아가씨보단, 지금의 아가씨가 제 주인으로 더 어울리는 것 같긴 합니다.” 평소처럼 어딘가 광기가 느껴지는 게 아닌, 은은한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 “읏.” 거기에 허를 찔린 듯이 얼굴을 붉힌 클라우디아였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고는 가슴을 폈다. “하인 주제에 건방지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