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결국 강아린은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 처음엔 진짜 기절할뻔했다. 예쁘긴 하다, 입이 벌어진 것도 맞다. ​ 그런데 문제는. ​ '이걸 과연 드레스라고 부를 수 있나?' ​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실상 옷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깨는 물론, 옆구리까지 깊게 파였고,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살결이 드러났다. ​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파티보다는 침실에서 어울리는 옷이었다. ​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스타일리스트들도 순간적으로 말이 없었다. ​ 수제 드레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 “제발, 이건 아니야.” ​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됐다. ​ 다행히 강아린은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이건 나중에 입지 뭐.” ​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커튼 뒤로 사라졌다. ​ 잠시 후. ​ - 스륵. ​ 조심스럽게 커튼이 젖혀졌다. ​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강아린이 입고 나온 건,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드레스였다. ​ 고급스러운 소재가 몸에 부드럽게 붙어 어깨선과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노출은 최소화됐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드러난 곡선이 더 눈길을 끌었다. ​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강력하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 강아린은 내 앞에 와서,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하는 흉내를 냈다. ​ “이제, 가실까요?” ​ 싱긋 웃으며, 눈을 반달처럼 접는다. ​ “예… 그러세요.” ​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 그때. ​ “아, 잠깐만.” ​ 강아린이 손짓으로 나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워치를 꺼내 화면을 톡, 톡 두드렸다. 뭔가 입력하는 모양이었다. ​ “뭔데?”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강아린은 워치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 “아, 업무 때문에.” ​ 묘하게 장난스러운 표정.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 ​ ​ ​ ​ *** ​ ​ ​ ​ ​ ​이 시각, 유 가(家)의 무도관. ​ - 챙, 챙!! ​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중을 갈랐다. ​ “하아….” ​ 유하나는 숨을 고르며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 눈앞에는 유무진. 그녀의 아버지가, 부드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 30분 넘게 이어진 무언의 대련. ​ “대단하구나.” ​ 유무진은 기쁜 듯 웃으며 검을 거뒀다. ​ - 털썩. ​ 유하나도 무릎을 꿇으며 검을 땅에 기대었다. ​ “후우… 잠깐 쉴게요.” ​ “그래, 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 유무진은 짧게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유하나는 땀에 젖은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 “후….” ​ 숨을 고르는 유하나. 아버지와의 대련은 만족스러웠다. ​ ‘행복하다.' ​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 그녀에게는 너무 충분한 순간이었다. ​ 그때. ​ - 띠링. ​ 워치가 짧게 진동했다. ​ 유하나는 별생각 없이 손목을 들었다. ​ “…?” ​ 그녀는 메세지를 보자마자, 순간 몸에 흐르는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 그곳에는, 사랑하는 그이가 정장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 “헉….” ​ 유하나는 숨을 삼켰다. 그렇게 넋을 놓은 채, 사진을 계속 바라봤다. ​ 추가로 도착한 짧은 메세지. ​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가셨던 피로는 그대로 머리로 몰려 열로 바뀌었다. ​ 파티? ​ 그녀가 아는 파티라고는, 전략 교류회밖에 없었다. ​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파티를 싫어한다. ​ ‘쯧, 이번에는 안가야겠구먼.’ ​ 원래 유하나도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허례허식이 가득한 친목회 따위. 그는 그녀의 딸과 대련하는 시간이 훨씬 소중했다. ​ 그래서, 그는 결국 가지 않았다. 덕분에 유하나 역시 자연스레 빠지게 되었다. ​ 괜찮았다. ​ 괜찮은 줄 알았다. ​ ‘안 괜찮아.’ ​ 유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유무진이 무도관 출구로 향하고 있다. ​ “잘 추스르고 나오려무나.” ​ 싱긋 웃으며, 문을 나선다. ​ 그때. ​ “아빠아아아아!!” ​ 딸의. ​ 아니. ​ 한 여성의 투정이 무도관을 가득 채웠다. ​ ​ ​ ​ *** ​ ​ 한편, 아르카디아 교단.​ ​ “성녀님! 온천 개방 시간입니다~” ​ “어, 고마워~” ​ 천여울은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요 며칠 꽉 짜였던 일정에서 드물게 얻은 자유 시간. ​ 그녀는 제대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 물론, 정해인과 함께하는 일정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 오늘 저녁에 있을 전략 교류회가 딱 그랬다. ​ 허례허식, 보여주기, 어깨 힘주는 자리. 원래라면 의무감에 참석했어야 했지만, 이번엔 단칼에 잘랐다. ​ ‘안 갈래~’ ​ 그냥 용사 쪽에 짬 때렸다. 허례허식 차리고, 어깨 좀 세우고 그런 건… 마침 그쪽이 좋아하는 거니까. ​ 서로 좋은 거 아니겠는가? ​ 덕분에 오랜만에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천여울은 물에 발끝을 담그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흐우….” ​ 그때였다. ​ - 띠링. ​ 워치가 작게 울린다. ​ “응?” ​ 그녀는 목욕 중일 때는 대부분의 알림을 꺼놓는다. ‘중요한’ 알림을 제외하면. ​ 천여울은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 순간, 시야가 멈췄다. ​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 “…….” ​ 천여울은 사진을 본 순간 넋을 잃었다. ​ 사진 속. ​ 차가운 조명 아래 서 있는 남자. ​ 매끄러운 블랙 정장 차림. 빛을 부드럽게 반사하는 고급 원단이 그의 넓은 어깨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렀다. ​ 단정히 넘긴 머리 때문에, 더욱 또렷해진 이목구비가 보인다. ​ 목에 자연스럽게 묶인 넥타이까지. ​ 익숙하지 않은 차림 탓일까,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 천여울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 “귀여워….” ​ 그리고 동시에, 너무 멋있었다. ​ 천여울은 무의식적으로 홀린 듯이 모든 사진을 저장했다. ​ 그러나 그때. ​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대체 무슨 상황이지? ​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 “…!” ​ 짧은 메세지. 천여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강아린이 갈만한 파티는 하나밖에 없다. ​ ‘교류회.’ ​ - 첨벙첨벙! ​ 천여울은 수건 하나만 대충 걸치고 온천 밖으로 뛰쳐나왔다. ​ 밖에서는 한 여성 사제가, 곧 입힐 예정인 천여울의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 “자매님!” ​ 천여울이 다급히 불렀다. ​ “네… 헉!” ​ 사제는 고개를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 수건 하나만 걸친 채 물기를 머금은 천여울. 그 너머로도 드러나는 선명한 실루엣.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이, 보는 이의 숨을 잠시 멎게 했다. ​ “용사, 걔네 출발했어요?” ​ 그러나 천여울은 빠르게 물었다. 교류회에 가야 하는 건 본인이었다. ​ 사제는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 “네… 방금 막 출발하셨는데….” ​ “아.” ​ 잠깐 가만히 서 있던 천여울이, 비척거리며 다시 온천으로 돌아갔다. ​ ​ ​ ​ ​ *** ​ ​ ​ ​ ​ 늘 그렇듯, 정해인의 기숙사 방. ​ - 바스락바스락. ​ 두툼한 이불 아래,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녀 하나. ​ 방의 불은 꺼져 있었고, 커튼은 바깥 빛을 완전히 가려 놓았다. 가끔,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운다. ​ 그런데 그때. ​ - 띠링! ​ 작은 알림음이 이불 속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꺄아악!” ​ 이불 밑에서 시온의 짧은 비명이 터졌다. 순식간에 이불이 들썩인다. ​ 파닥파닥. 작은 몸짓이 이불을 안쪽에서 요동치게 만들었다. ​ 최근 별다른 사건이 없던 탓에, 집돌이인 정해인은 기숙사에 박혀있었다. ​ 평일엔 접근 불가. ​ 요즘은 어떤 정신 나간 마법사가 주기적으로 결계를 쳐놓았다. ​ 따라서 그의 방에 올 수 있는 때는 모두가 나간 주말뿐. ​ 시온은 나름대로 굶주린 상태였다. ​ 그래서, 오늘도 늘 그렇듯 방 주인이 외출을 나간 틈을 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 [RIN] : (사진) [RIN] : (사진) [RIN] : (사진) ​ 사진 속에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정해인이 있었다. ​ 시온 입장에서는 핵폭탄처럼 떨어진 뉴스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 오늘 아침. ​시온은 할아버지의 파티 동행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 '오늘은… 방이 비니까….' ​ 아마 할아버지는 지금쯤 성아라 언니랑 가고 있을 것이다. ​ 워치 화면을 터치했다. ​ 거울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정해인의 너머로, 차마 드레스라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작은 면적의 옷을 입고 있는 강아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미친년.” ​ - 톡 톡. ​ 그 모습이 싫어, 화면을 톡톡 두들겼다. 사진이 확대되었다. 정해인의 어깨, 손, 목선. ​ “헤….” ​ 다시 터치했다. 사진이 축소되었다. ​ 또 터치했다. 다시 확대했다. ​ 끝없이 반복. ​ 그 순간, 워치 창이 울렸다. ​ [RIN]: 오늘의 비서님과 함께하는 파티 ♥ ​ 짧은 메세지. ​ 메시지 옆의 숫자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사라졌다. 모든 인원이 전부 읽었다는 뜻. ​ 그리고, 아무도 답장이 없다. 보낸 사람도, 받은 사람들도. ​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시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걸. ​ “아….” ​ 그녀는, 완벽한 패배자였다. ​ - 부스럭. ​ 손끝에 걸린 워치를 내려두고. 그녀는 정해인의 사진을 크게 확대한 화면을 그대로 남긴 채,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 깊숙이, 더 깊숙이. ​ “… 읏.” ​ 이불 속 어둠 속에서. 시온은 홀로 자신의 패배를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