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겠다. 진짜로.” ​ 나는 맹주의 휴게실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나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다. 강아린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정태곤에게 숨도 못 쉬고 두들겨 맞았다. ​ 심지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몇몇은 행군을 끝낸 훈련병처럼 벤치에 축 늘어져 울상을 짓고 있었다. ​ “하아….” ​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 그때. 워치가 작게 울렸다. ​ - 띠링. ​ [김하은]: 해인 학생! 체험 점수 1위로 통과한 거 축하해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 나는 몸을 약간 일으켜 세우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 체험 종료 전, 김하은은 여러 종합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종 점수를 공개했다. ​ 전투 능력, 상황 판단, 행동력, 인성 평가까지… 뭐 하나 허술한 기준이 없었다. ​ 학생들은 결국 누구 하나 불만 없이, 조용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 결론은 1위. ​ 나는 어깨를 툭툭 털었다. 아까 맞은 그곳이 아직도 울린다. ​ 그녀는 체험이 끝나자마자, 내게 이렇게 윙크하며 말했다. ​ ‘대대로 1위는 보통 맹주랑 계약을 체결하거든요!’ ​ 생긋 웃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 이번 체험을 통해, 여러모로 맹주의 시스템과, 흘러가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훈련 방식부터 각 영웅의 마인드까지. ​ 세계 1위인 길드인 데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 꽤 많은 것을 느꼈다. 체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갈거지이이~” ​ “아니….” ​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눈앞에서 강아린이 몸을 베베 꼬았다. 체험 내내 이러고 있다. ​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다. ​ “내가 거길 대체 왜가….” ​ “가자아~” ​ 학교에서 접근하지 않는 만큼 몰아서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 그녀가 이렇게 집요하게 조르는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 저녁에 열릴 파티. 전략 교류회. ​ 그곳에 나를 데려가고 싶다는 것이다. 겉보기엔 단체 간의 전략을 공유하고, 세계적 위협에 대한 공조를 논하는 자리지만…. ​ 실상은 친목회. ​ 문제는 차리는 격식이 어마어마하다. 장소도, 복장도, 오는 사람들의 면면도. ​ 파티가 열리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나. 광철이 형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었다. ​ ‘해인아, 너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돼?’ ​ ‘나 그날 길드 체험 있어.’ ​ ‘… 체험? 어디? 아, 맹주구나. 일단 오케이. 하아… 그럼 안 되겠네.’ ​ ‘왜? 무슨 일 있어?’ ​ ‘전략 교류회, 원래 내가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의뢰가 생겨서, 영감탱이랑 같이 못 갈 것 같네.’ ​ 결국 나는 못 간다고 했으니, 이후에 결국 누가 가기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강아린은 그곳에 날 데려가겠다는 소리였다. ​ “삼촌이랑 가면 되잖아.” ​ “오늘 출장 가셨어.” ​ “아.” ​ 아니, 그 양반은 왜 하필 또 오늘. 실제로 강아린은 삼촌과 함께 가지 않는 이상, 맹주 측에서 함께 참석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 그녀의 오빠, 강유성은, 이미 세상에 없었으니까. ​ 정작 강아린은 별생각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으나. 나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 살짝, 마음이 약해진다. ​ “… 난 외부자잖아.” ​ “오늘부터 내부자로 만들어 버릴까?” ​ 강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꺼낸 워치 화면을 내 눈앞에 내민다. ​ [체험 목표: 팀 리더가 지녀야 할 능력 배양] "이거 보라고. 체험 목표가 팀 리더의 능력 배양이야." ​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단체 간 외교 같은 것도 다 팀 리더 능력의 일부야." ​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작게 속삭이며 덧붙였다. ​ "체험에서 평가 점수 1등 한 사람이면 이 정도는 배워야지. 이런 대우 받는 건… 뭐, 당연한 거고." ​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자기 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듯. 그 당당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 나는 강아린을 바라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하….” ​ 이미 맹주까지 와서, 팀 리더 능력 배양이라는 명목 아래 이것저것 다 겪었다. 현직 영웅한테 얻어맞기까지. ​ 이쯤 오니까. 진짜 끝까지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 지금까지 해본 것 중 제일 어처구니없는 체험이긴 했지만, 또 역설적으로, 제일 '진짜' 같기도 했다. ​ 끝까지 해보자.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가자.” ​ “잘, 생각했어.” ​ 강아린은 활짝 웃었다. 나는 덧붙였다. ​ “대충 수행비서 느낌이라 생각해.” ​ 그러자 강아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음… 그건 별로인데….” ​ 나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 “네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어.” ​ 뭐 화려한 파티고, 형식이고 나발이고 어쩔 수 없다. 내가 거기에 어울리는 옷이 없다. ​ 악세서리는 고사하고, 정장마저. ​ 아마 대충 빌려 입어야 할 것 같은데. 빌린다고 해도 한눈에 티가 날 거고, 이쪽 사정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 “내가 드레스코드가 없어서.” ​ 나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 그러자 강아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씨익 웃었다. ​ “드레스 코드?” ​ 장난기가 어린 눈빛.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은근한 자신감이 드러났다. ​ 강아린은 내 앞으로 한발 다가오며, 고개를 아주 살짝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 “내 옆에 있으면….” ​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 “그게 최고의 드레스 코드일걸?” ​ 장난처럼 보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정말 진지했다. ​ 진담이냐 농담이냐를 따지기 전에. ​ 솔직히. ​ 반박하기 쉽지는 않았다. ​ ​ ​ ​ ​ ​ ​ *** ​ ​ ​ ​ ​ ​ ​ 나는 문 앞에 멈춰섰다. ​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당히 압도적이다. 고급스럽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 따뜻한 조명에 유리창 너머 비치는 광택 나는 마네킹들. 고급스러운 재질의 양복은 한 벌 한 벌 정성스레 정리되어 있다. ​ “… 여기 맞아?” ​ 이런 데가 있긴 하구나. 올 일이 없던 삶이다 보니…. ​ “맞아~” ​ 강아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팔에 은근슬쩍 팔짱을 꼈다. 나는 툭툭 치며 팔짱을 풀었다. ​ 내가 양복이 없다고 하니 강아린은 나를 이곳으로 즉시 데려왔다. ​ "이런 데는, 예약 없으면 못 들어가는 거 아냐?" ​ 그러자 강아린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 “예약했지.” ​ "… 내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 내가 묻자, 강아린은 씨익 웃었다. ​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타고 내려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 쭈욱ㅡ 노골적으로 훑는다. ​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 그러나 강아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그냥, 대충~?” ​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 “사실 그냥 옷걸이가 좋아서. 마네킹에 있는 거 대충 입혀도….” ​ 그녀는 손가락을 돌리며 내 상반신을 가리켰다. ​ “완전 전용 맞춤 정장처럼 보일걸?” ​ 강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 “아니, 오히려… 못 따라올 수도….” ​ 그녀는 갑자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중얼거리는 그녀를 바라봤다. ​ “그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은 그냥, 입혀주는 날이니까.” ​ 강아린은 팔짱을 끼고 앞장섰다. 나는 살짝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 문이 열리자,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귓가에 맴돌았다. ​ “어서 오십시오.” ​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온다. 강아린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바로 미소를 지었다. ​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응, 잘 부탁해요.” ​ 강아린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직원은 능숙한 손짓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 나는 그를 따라 안쪽 룸으로 들어섰다. ​ 눈앞에 놓인 건, 무려 나와 강아린만을 위한 피팅룸이었다. ​ 가운데에는 각양각색의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화장대처럼 마련된 메이크업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 왼쪽 벽에는 검은색 커튼, 오른쪽 벽에는 붉은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각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 ​ 거대한 전신 거울과 측정 기구들. 그리고 빈 옷걸이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 "자, 그럼 신사분 사이즈 먼저 재겠습니다." ​ 여성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정중히 말하고, 허리, 어깨, 팔 길이를 재기 시작했다. ​ 줄자를 꼼꼼히 댄다. ​ “… 너무 딱 붙지는 말죠?” ​ 강아린이 중얼거렸다. 스타일리스트가 몸을 떼고 말했다. ​ “… 너무 좋네요.” ​ 나는 잠자코 있었다. ​ “어깨는 살짝 잡아주고요, 허리는 타이트하게요.” ​ 강아린이 어느샌가 다가와, 스타일리스트에게 디테일을 주문하고 있었다. ​ “바지는 너무 품 주지 말고요. 핏 살려야 하니까.” ​ 어째 더 신난 모습. 결국 내 정장의 주문은 끝났다. ​ 강아린의 드레스는 이미 주문했고, 준비까지 마친 상태라고 한다. ​ 옷이 도착하고, 우리는 각자의 커튼 너머로 넘어가 옷을 갈아입기로 결정했다. ​ 나는 검은색 커튼 안으로, 강아린은 붉은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준비된 옷과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직원이 입혀준다고 했는데, 그건 거절했다. ​ ‘딱 맞긴 하네.’ ​ 조심스럽게 셔츠를 걸치고, 재킷을 입었다. 바지는 다리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떨어진다. ​ 구두를 신을 때쯤, 맞은편 커튼 너머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천이 스치면서 내려오는 소리. ​ 나는 괜히 손동작이 어색해졌다. ​ 이제 넥타이만 매면…. ​ “넥타이는 매지 마!!!” ​ “깜짝아.” ​ 저 멀리, 강아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나는 넥타이를 손에 쥔 채로 어깨에 걸어 버렸다. ​ 결국 넥타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입었다. ​ 스륵. ​ 나는 검정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 아직 강아린은 나오지 않았다. 커튼 너머, 부드러운 움직임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 강아린은 지금, 드레스를 갈아입고 있다. ​ 나는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그때. ​ “해인아, 테이블 위에 내 워치 좀 가져다줄래?” ​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강아린의 목소리.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워치를 챙겨 들었다. ​ 그리고 커튼 앞으로 다가가, 입구 사이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워치를 내밀었다. ​ “여기.” ​ 또각, 또각. ​ 하이힐 소리. ​ 그녀가 커튼 앞까지 걸어온 게 느껴진다. ​ 그런데, 가져가지 않는다. ​ “뭐….” ​ - 스륵. ​ 다음 순간, 강아린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 그리고. 나를 확, 커튼 안으로 끌어당겼다. ​ “야, 잠깐ㅡ!” ​ 몸이 휘청이며 붉은 커튼 안쪽으로 들어섰다. ​ 붉은 조명. 은은하게 맴도는 향기. ​ 눈앞을 보니, 강아린의 드레스 차림이 보인다. ​ 눈부신 새하얀 드레스. ​ 등이 깊게 파여, 한 치의 군더더기 없이 흐른다. ​ 허리를 타고 흐르는 얇은 천. 아래로는 유려한 골반의 곡선만이, 드레스의 형태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려, 붉은색의 장식과 순백색의 드레스가 강렬하게 대비된다. ​ 살짝 돌아본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 “내 말이 맞지?” ​ 그녀는 등을 보이며 싱긋 웃었다. ​ “내 옆에 있는 거.” ​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 “그게, 최고의 드레스 코드라고.” ​ 숨이 순간적으로 턱 막혔다.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와 어깨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스르르 풀었다. ​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 또 부드럽게. ​ 넥타이를 다시 걸어주기 시작했다. ​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하다. ​ “오늘….” ​ 강아린은 넥타이를 묶으면서.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 “잘 부탁해요?” ​ 그녀는 마지막 매듭을 가볍게 당기며 속삭였다. ​ 그리고, 싱긋 웃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