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받은 나는, 그 즉시 루크에게 연락을 넣었다. ​ [Belief_]: 당장 내일 가도 될까요? ​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빠른 응답이었다. ​ [루크]: 언제든지 오셔도 좋습니다. ​ 입장 시간은 늦은 저녁. 그 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굳이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지도 않았다. ​ 그래서 나는 하루를 대충 흘려보내기로 했다. ​ 늦잠을 자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교내 부지를 산책하고. 평소처럼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개고 분석하고 훈련으로 채워 넣는 날들과는 달랐다. ​ 하루 정도는, 이렇게 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 나는 조용히 가온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 올 만한 연락도 없었기에, 아예 워치를 벗어두고 다녔는데 오랜만에 꺼낸 워치를 켜자마자, 진동이 우르르 몰려왔다. ​ “……뭐야 이거.” ​ [Summer 님으로부터 온 부재중 연락] ​ [Summer] 모 [Summer] 해 [Summer] ? ​ [Summer 님으로부터 온 부재중 연락] [Summer 님으로부터 온 부재중 연락] ​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순식간에 화면을 가득 메운 알림창. ​ 나는 그 중 음성 메세지를 클릭했다. 이어폰도 없이, 워치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 - … 뭐해? 흠흠. 좋아. 이렇게만……. 해인아, 어디야? 주말인데 뭐해? 밥 먹자. ​ 처음엔 뭔가 혼잣말 같았다가,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건다. 앞부분엔 자신도 모르게 녹음된 소리인지, 어색한 기침 소리와 중얼거림이 섞여 있다. ​ 나는 피식 웃었다. 워치 자판에 손가락을 올리고, 짧게 답장을 남겼다. ​ [Belief_]: 나중에. 오늘은 나 약속 있어서. ​ 잠시 후, 읽음 표시. 곧바로 한 줄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 굳이 답장하지는 않았다. ​ 이제 곧,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 ​ ​ ​ “바쁜가 ….” ​ 윤채하는 침대에 엎드린 채, 옆에 펼쳐둔 책에 곁눈질을 보냈다. 표지는 여전히 화려하다. ​ [방구석 마법사도 궁금해하는 관계의 법칙~ 궁극의 필살 플러팅 199선!] ​ 저번에 반쯤 장난으로 사용해봤던 책. 처음엔 그냥 심심풀이, 어쩌면 가벼운 호기심 정도였다. ​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윤채하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 그래서 이번엔. 더 신중하게, 더 진지하게. 진짜, 고서를 읽듯이 차분히 활용하려 들었다. ​ 이제 막 4번째 전화를 걸기 직전, 그녀의 눈에 한 문장이 들어왔다. ​ ‘너무 당기기만 하면, 당신에게 질릴 수도 있어요! 적당한 밀당은 필수!’ “그런가….”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녀는 워치를 천천히 내려두었다. ​ “…….” ​ 가만히 기다렸다. ​ “……이 정도면 됐겠지?” ​ 윤채하는 시선을 돌려 시각을 확인했으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 “…….” ​ 역시 안 맞는다. ​ 밀고 당기는 건, 그녀의 적성이 아니었다.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외투를 걸치고, 숙소 문을 열고 나섰다. ​ 그리고 도착한 곳은. ​ 정해인의 기숙사 앞. 정신없이 가다 보니 어느새 여기. ​ 주말의 늦은 오후, 복도는 조용하다. 교류전도 끝났고, 대부분의 인원이 본가로 향한 듯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지 않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원래 남자 기숙사는 여학생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감시가 심한 것도 아니었고, 주말이기도 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아무도 모른다. ​ 그녀는 조심스럽게 모자를 눌러쓰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 ‘걸리면 혼나겠지.’ ​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아주 잠시 숨을 골랐다. ​ 그리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 ‘뭐라고 말하지? 마법 질문? 진로 질문? 아니면 그냥….’ ​ 솔직히, 보고 싶었다고? ​ - 우당탕! ​ 안에서 무언가가 덜컹거리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에서 막 일어난 사람이 허둥지둥하는 몸짓. ​ 아무래도 침대에 누워있던 듯했다. ​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 그러다가. ​ - 끼익…. ​ 조용히 열리는 방문 틈새. ​ 그러나 그곳에서 새어 나온 것은, 후끈한 열기였다. 게다가, 정해인의 향에 기분 나쁘게 섞인 이질적인 체향까지. ​ 그녀는 즉시 손을 휘저었다. 냄새를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 그리고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얼굴. ​ “어?” ​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린 느슨한 옷과, 눕다 일어난 듯 흐트러진 땋은 머리칼의 여성. 볼은 희미하게 상기되어있다. ​ 윤채하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 모의 단체전. 정해인에게 사이드에서 작살났던 그의 소꿉친구. ​ 하시온. ​ 윤채하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그러나 이 상황이 어지러운 것은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해인이는 아르카디아 교단을 방문해, 지금쯤 성지에 입장했어야 했다. ​ 그래서 그 빈 시간을 이용해 그녀 나름의 해피 타임을 즐기러 온 것이었는데. ​ 당연히 방문자도 강아린 유하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슬슬 걸릴 때가 되긴 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까. ​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성은 그녀가 예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 ‘아.’ ​ 시온은 순간, 꽤 귀찮아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 윤채하는 순간적으로 이를 꽉 깨물고 단숨에 문을 열어젖혔다. ​ - 화악. ​ ‘··· 뜨거워.’ ​ 갇혀 있던 열기와 습기 섞인 공기가 복도를 따라 확 퍼졌다. 그녀는 급하게 방 안을 훑었다. ​ 그러나, 다행히도 정해인은 없었다. ​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가 돌아간다. 마치 삐걱거리는 인형처럼. ​ 윤채하의 시선이 시온을 향했다. ​ “하….” ​ 시온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 ​ ​ ​ *** ​ ​ ​ 아르카디아 교단, 외곽 지하 접견실. 나는 지정된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 은은한 촛불과 신성력이 어우러진 공간. ​ 나는, 성지 입성을 위해 대기하는 중이다. ​ 내가 입성할 수 있는 것은 천여울의 시간대였기에. 용사인 요한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잠시 뒤, 복도를 따라 로브를 입은 신관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왔다. ​ “형제님, 성지로의 인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 “아, 네.” ​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한 것이 많다. 수련 효율 뻠핑을 감안한 모래주머니부터, 이것저것 한 보따리 싸 왔다. ​ 그때였다. ​ “왔어?” ​ 신관의 옆에서, 천여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 ‘… 와.’ ​ 처음 보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복장은 평소와는 달랐다. ​ 전통적인 문양이 금으로 수놓아진 성지용 의복. 몸에 꼭 맞게 디자인된 옷은 그녀의 신체의 곡선을 여실히 드러내며 여러 느낌을 동시에 자아냈다. ​ “미안, 이거 옷 입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 천여울은 민망한 듯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 “어차피 안에선 다 벗어야 하는데…참.” ​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 “벗어? 뭘 벗어. 왜 벗어.” ​ 나는 다급하게 물었으나, 그녀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그건 들어가면 알 일이고~” ​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농담이겠지. 그래도 성녀인데···. ​ 우리는 천천히 성지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지 입구에 다다랐다. ​ 거대한 문은 닫혀있고, 그 앞에는 용사의 문양을 달은 신도 두 명이 서있었다. ​ 그때. ​ - 우르르르…. ​ 두꺼운 문이 천천히 진동하며 열렸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묘하게 무겁게 느껴진다. ​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 요한이었다. ​ “하….” ​ 훈련에 지친 듯, 온몸이 땀에 젖어 있다. 그가 나오자 대기 중이던 신도들이 일제히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의 땀을 닦아내고 수건을 건넸다. ​ 정적을 깨듯 옆의 신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이제, 두 분이 들어가실 차례입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여울 역시 짧게 숨을 들이쉬고, 옆으로 걸음을 맞췄다. ​ 신전 천장 너머, 유리 채광창을 통해 달빛이 스며든다. 이미 달이 중천이었다. ​ “자, 잠깐.” ​ 그때, 막 나가려던 요한이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우리를 본 듯, 그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 그의 시선이 천여울에게 잠시 머문다.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로 옮겨진다. ​ “둘, 둘이 들어가는 거야?” ​ “그렇습니다.” ​ 신관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 ​ 요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그때, 내 옆에 있던 천여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소매를 더듬더니, 망설임 없는 손길로 내 팔을 끌어안았다. ​ 그녀는 단 한 번도 요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들어가자.”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뗐다. ​ “어.” ​ 성지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문턱을 넘는 순간, 성지 내부에서 퍼지는 신성력이 피부에 와닿는다. 숨을 들이쉬자, 폐 깊숙이까지 차오르는 차갑고 맑은 기운. ​ - 우르르르르…. ​ 문이 닫히며,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밀실이 완성되었다. ​ 고요하게 내려앉은 빛줄기. 빛은 오직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뿐. 은은한 빛이 성지 내부를 감쌌다. ​ 성스러운 기운이 사방에 스며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치 차가운 신성력이 폐 깊숙이 스며드는 듯한 기분. ​ 경건함보다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 나는 두 발로 땅을 가볍게 디뎠다. 그리고 몇 번의 점프. ​ “미쳤네.” ​ 느낌이 다르다. 나도 설정만 하고, 이용할 생각은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철저히 성녀와 용사의 전유물이었으니까. 신체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 난 싸 온 짐들을 풀어헤쳤다. ​ 모래주머니에, 근력밴드를 비롯한 여러 도구들. 내게 허락된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 이 짧은 시간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선 효율적인 분배가 필요했다. ​ 지금부터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 “나 지금부터 좀 바쁠 것 같아서, 각자 할 거 열심히….” ​ 천여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그때. ​ - 스르륵…. ​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 “야, 너 뭐….” ​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성스러운 예복을, 천천히, 한 겹씩 벗고 있었다. 소매를 풀고, 허리끈을 느슨히 하고, 자연스럽게 옷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 진짜 벗는 거였어? ​ - 스르륵…. ​ 이제 슬슬 위험하다.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반대로 돌렸다. "옷 좀 여며. 눈 둘 곳이 없잖아." ​ “그게 아니고, 성지 내부에 떠다니는 신성력을 더 잘 받아들이려면… 피부를 최대한 노출해야 하거든.” ​ 아? ​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오히려 내가 예민한 건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천여울은 별 생각없는데, 나만 유난인 느낌. ​ “그래…?” ​ 이론상으로는 이해가 됐다. 실제로, 손등처럼 드러난 피부에 좀 더 느껴지는 것 같긴 하다. 옷으로 덮인 부위는 상대적으로 둔한 느낌이고. ​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다 벗을 건 아니야, 너도 조금은 벗는 게 좋을걸?” ​ 천여울의 말에 설득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 이왕 온 거 좀 더 잘 받아들이면 좋지 않을까. ​ 나는 웃옷을 살짝 벗어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 할 건 해야지. ​ 그때. ​ “해인아.” ​ “어.” ​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그대로 숨을 삼켰다. 스르륵. ​ 천이 흘러내리며 드러난 그녀의 반 나신.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예복 아래, 옆구리의 선이 고요히 드러났다. 달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어깨와 골반을 따라 부드럽게 번진다. ​ 예복 아래, 그녀가 걸친 복장은 예상 밖이었다. ​ 성스러움보단, 신성력을 흡수하는 데 특화된 기능성 복장. 가릴 곳은 정확히 가리되, 노출되는 피부 면적은 최대. 어찌 보면 성지에서 입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옷이었다. ​ 성스러운 공간의 기운과 그녀의 대비되는 모습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 그녀는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엔 익숙한 장난기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겹쳐 있었다. ​ “어때, 나 예뻐?” ​ 얼굴이 뜨거워진다. 뭔가를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어.” 아무래도, 오늘 훈련에 집중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