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에 커다란 이름이 떴다. ​ [세미파이널 2경기] [윤채하 vs 가일] ​ 윤채하의 시선이 그 이름 위에 멈췄다. 칼로스 랭킹 11위 출신의 검사. ​ 가일이었다. ​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재밌겠네.” “가일 정도면 윤채하랑 비빌만 하지.” ​ 하지만 그 중심에 선 윤채하는,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뻔하다.’ ​ 심장이 뛰지 않는다. 긴장도, 설렘도 없다. ​ 오히려 살짝 지루했다. ​ 승부의 끝이, 너무나도 쉽게 그려지는 게 싫었다. ​ 다들 이 경기를 향해 기대를 보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한쪽 손끝이 부드럽게 들어 올려진다. ​ - 3. - 2. - 1. ​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 음성이 울리고, 동시에 윤채하의 입술이 열렸다. ​ “그럼, 갈게.” ​ 다음 순간, 경기장이 타올랐다. ​ 땅 위를 기어가는 불꽃, 허공을 가르는 열기. 열기가 벽면을 타고 솟아올랐고, 시야는 순간적으로 증기로 뒤덮였다. ​ 그리고 그 속에서. ​ 가일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서도 출구를 찾아야 했다. ​ 흐트러진 시야, 뒤엉킨 열기. ​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일점돌파.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향하는 정면만큼은 열려있었다. ​ ‘너무 열려 있다.’ ​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가일은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칼날을 쥐고, 전신을 실어 그 틈으로. ​ 그리고. ​ - 쾅!! ​ 폭발음과 함께, 가일이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관중석을 보호하는 방어벽에 박히며 전투 불능 판정. ​ 심판석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경기장 바닥엔 윤채하의 불꽃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다. ​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진다. ​ “뭐야 방금…?” “가일이 한 방에 밀렸어…?” ​ 열기 속, 불꽃이 잠잠해지고 무대 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 “후….” ​ 윤채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무대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 ​ ​ *** ​ ​ ​ ​ 감탄했다. 그녀는 최근 내 공격을 수없이 받아냈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뭔가 배웠는지. 그녀는 정면을 의도적으로 열어둔 채, 가일의 돌격을 유도했다. 마치 '여기로 오던가.'라는 느낌으로, 길을 터놓고. ​ 그리고 정면에서 받아냈다. 완전히, 그리고 매끄럽게. ​ [전투 종료] [가일 – 전투 불능] ​ 시스템 음성이 울리고, 윤채하의 주변의 불꽃이 서서히 꺼진다. ​ 지친 기색 하나 없다. 오히려 힘이 남아도는 느낌. ​ '성장.' ​ 그녀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 그리고 그때. ​ - 와아아아아아!! ​ 반대편 경기장에서 터져 나온 함성. 관중들이 고개를 돌린다. 전광판에 떠오르는 반대편 경기장의 상황. ​ [주서준 – 승리] ​ 다음 상대가 정해졌다. ​ 예상대로, 윤채하와 주서준의 결승전. 이제, 결승만이 남았다. ​ 결승은 바로 내일. 다음 날 이곳에서 똑같이 치루어진다. ​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짐을 정리해서 경기장의 복도로 나왔다. 어깨에 둘러메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 멀리서 인기척과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웅성대기 시작한다. ​ ‘뭐가 이렇게 시끄럽….’ ​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 그곳에는 인파를 뚫고 그쪽에서 오는 윤채하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만을 정확히 겨눈다. ​ 바로 나. ​ 나는 그녀에게 축하의 한마디를 건넸다. ​ “이긴 거 축하….” ​ - 텁. ​ 그녀는 말도 없이 내 앞까지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툭 내밀어 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 “가자. 방 잡아놨어.” ​ “어디를.” ​ “훈련장.” ​ “…….” ​ 확신이 서려 있는 말투. 방금 경기를 마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눈빛은 차분했고, 뺨은 희미한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 “시간 돼?” ​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며들어 있다. 벌써부터, 다음 전투를 상상하고 있는 눈빛이다. ​ 나는 살짝 웃으며, 그 손목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 “괜찮아. 오늘은 푹 쉬어.” ​ 그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 “오늘은 쉬라고? 그럼… 내일 아침….” ​ “내일도 안되지, 바로 경기 준비해야 되잖아.” ​ “…그럼, 나는 어떡해??” ​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화난 기운이 스쳤다. ​ “이제 훈련 안 해도 돼. 내가 알려주고 싶은 건 다 알려줬어.” ​ 그녀의 눈빛에 순간 불안감이 스친다. ​ “채하야.” ​ 나는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 “지금은 너한텐 나보다, 네가 스스로 해야 할 게 더 많아 보인다.” ​ 그 말에,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무언가 말하려다 입술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내리깐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뒤, 윤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 ​ 나는 그 등을 조용히 바라봤다. ​ 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세상이 인정한 천재니까. ​ ​ ​ *** ​ ​ ​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번진다. 달빛은 반쯤 가려진 커튼 사이로 살짝 비치고, 조용한 기숙사 안엔 아무 소리도 없다. ​ 윤채하는 그날 훈련을 완전히 망쳤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웠다. ​ 베개 위에 이마를 댄 채, 조용히 머리를 ‘콩. 콩.’ 부딪힌다. ​ - 콩. - 콩. ​ 벽에 뻗은 다리가 느릿하게 ‘톡. 톡.’ 무의식적으로 리듬을 타며 흔들린다. ​ - 톡. - 톡. ​ 입술은 단단히 깨물려 있었다. ​ ‘쉬라고?’ ​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말투. 스르륵 손목을 떼던 그의 손길. 말없이 건네던 그 눈빛. ​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걱정 해주는 것 같아 좋았는데. ​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나니 몸은 더 뜨거워졌다. ​ 윤채하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손끝이 이불 끝을 조심스레 감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쉰다. ​ 눈을 감자, 오늘의 전투가 다시 떠올랐지만, 이내 때려치웠다. 영양가가 하나도 없었다. ​ 생각은 금세 방향을 틀었다. ​ ‘내일은 결승.’ ​ 그 순간, 눈꺼풀 아래에서 떠오른 건 오늘 경기의 상대도, 내일 있을 상대도 아닌 며칠 동안 그녀를 수십 번, 수백 번 넘게 꺾어내던 사람. ​ 정해인. ​ 그 모든 타격의 감각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 숨이, 조금 뜨겁다. ​ “하….” ​ 달뜬 숨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심장은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동쳤다. 몸에는, 식을 줄 모르는 열기가 서서히 번졌다. ​ 윤채하는 두 손으로 이불 끝을 꼭 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 ‘만족이 안 돼.’ ​ 그의 궤적을 마음속에서 다시 되새기며, 몸 안의 열을 조심스레 식혀가며. ​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잠에 들었다. ​ ​ ​ ​ *** ​ ​ 결승전이 열리는 날. 아카데미의 중앙 경기장엔 이미 인파가 가득했다. 좌석은 만석이었고, 입석 구역조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오늘의 마지막 대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두 천재 마법사의 전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 유명한 마탑까지도. ​ 그 순간. ​ 전광판이 천천히 밝아졌다. ​ [윤채하 vs 주서준] ​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순간, 경기장 전체가 숨을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 윤채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볍게 숨을 고르고, 시야의 끝을 바라봤다. ​ 익숙한 얼굴이 있다. 주서준. ​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 “이번에는 내가 이길게.” ​ 주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에는 의지가 실려있다. ​ 그는 한 번도 윤채하를 이긴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 지금껏 그는 늘 그렇게 말해왔고, 그에 대한 윤채하의 반응은 늘 비슷했다. 시큰둥한 얼굴, 혹은 조용한 무반응. ​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 “아니.” ​ 반면, 윤채하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조용히 타오르는 표정이었다. ​ “오늘만큼은, 절대.” ​ 기대하고 있었다. 주서준은 윤채하의 표정을 읽고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 “웬일이야.” ​ 처음이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보이는 것은. ​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관중석은 숨을 삼켰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조용해졌다. ​ - 3. ​ - 2. ​ - 1. ​ - 와아아아아아!! ​ 카운트가 끝남과 동시에, 함성이 폭발했다. ​ 두 천재 마법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 캐스팅에 돌입했다. ​ 윤채하의 발밑에서 붉은 마나가 맴돌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화염 창 수십 개가 허공을 가르며 형성된다. 그 창끝마다 불꽃이 튀고, 열기가 일렁인다. ​ - 쉭, 쉭, 쉭. ​ 그와 동시에, 주서준의 앞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푸른 마나가 나선처럼 엮이며 공중에 떠오르고, 그 중심에서 하나의 거대한 구체가 천천히 고동친다. ​ “……!” ​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 “… 압축 연산?” ​ 주서준의 특기. 돌파관창. ​ 윤채하의 화염 창은 수십 개로 퍼지며, 전장을 장악하려 한다. 반면, 주서준은 그 모든 것들을 정면에서 뚫겠다는 방식이다. ​ 두 마나가 내뿜는 압력에 공기가 일그러진다. 마치, 두 사람의 공간 사이에 거대한 틈이 생긴 것처럼. ​ 그리고 시작은, 윤채하였다. ​ “가자.” ​ 윤채하가 작게 속삭이자, 화염 창 하나가 빠르게 궤도를 그리며 날아든다. ​ 그걸 신호로, 수십 개의 창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창들이 허공을 타고 휘몰아친다. ​ 그러나. ​ - 쾅!!! ​ 주서준의 돌파관창이 그 중심을 찢으며 전진했다. 화염 창 여러 개가 동시에 부딪혔지만, 마나의 결이 다르다. 윤채하의 마법은 타오르는 성질. 주서준의 마법은 녹이며 관통하는 성질. ​ 서서히 정면이 뚫린다. 윤채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주서준의 입가에 확신에 찬 미소가 번졌다. ​ - 파르르르르…! ​ 하지만 그 순간. 윤채하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 그러자. ​ 수십 개로 나뉘었던 화염 창 중 하나가. 공중에서 멈칫하더니, 모든 창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전부, 정면으로. “……!” ​ 주서준의 표정이 굳는다. ​ 화염창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진다. 점점 두꺼워지고, 길어지고, 짙어진다. ​ 그것은 단순한 창이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는 하나의 장창(長槍). 그리고 그 끝은, 태양처럼 고동친다. ​ - 화르르륵!! ​ 정해인의 고유 기술. 카테나치오의 변형, 팔랑크스. ​ 윤채하는, 그 기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재해석했다. ​ ‘어때?’ ​ 그녀는 이 기술을,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었다. 그리고 이 첫 움직임을. ​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 폭발음이 전장을 휘감는다. 화염의 장창이 돌파관창을 짓누르고, 꿰뚫고, 찢어버렸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누가 이겼지?” 마탑의 인원도, 칼로스와 가온의 교수진들도 궁금해할 때.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타오르던 열기가 가라앉고, 전장은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 파괴된 마법진의 흔적 위, 주서준은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 승자는 명확했다. 윤채하는 서있고, 주서준은 주저앉아있다. ​ 그는 자신이 만든 파편 더미 속에서 고개를 들어, 조용히 웃었다. ​ “…멋있다. 채하야.” ​ 질투도, 아쉬움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인정. ​ 주서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윤채하가, 마음을 먹기 시작한다면, 스스로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 그리고 그녀는 지금. 확실하게 마음을 먹어버린 모양이었다. ​ 윤채하는 주서준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고마워.” ​ 감사였다. 그가 없었다면, 정해인이 이토록 자신을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 그녀 또한, 진심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 윤채하의 짧은 인사에, 주서준의 눈이 살짝 떠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그리고 그녀는 이내. ​ 고개를 돌렸다. ​ ‘어디 있어?’ ​ 관중석을 훑는다. ​ 지금의 이 승리를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누군가를 찾는다. ​ 한 사람. ​ 그리고. ​ 눈이 마주쳤다. ​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는 유난히 선명했다. 조용히, 아주 작게 웃고 있었다. ​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 ‘잘했어.’ ​ 그의 입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 한마디가, 귓가에 울리듯 선명하게 들려온다. ​ 윤채하의 심장이 조용히 고동쳤다. ​ 수없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는 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 그의 시선 하나에, 온몸이 다시 뜨거워진다. ​ 윤채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권능인 아 프리오리로도 분석할 수 없다. 논리로, 분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샘물처럼 솟아나, 조용히 터져나온다. 어쩌면, 저 멀리 서 있는 그를 향해.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았다. 가끔, 세상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는 아주 최근에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미지의 감각이 주는 충만함이 너무도 벅차고, 기분 좋았다. ​윤채하는 조용히 웃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소 짓게 된다는 게. 그 이름 석 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의 감각이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게. 이렇게나···. 황홀한 일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