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 숨이 깊게 흘러나온다. 작게 떨리는 어깨, 땀에 젖은 손바닥, 과하게 끌어올린 마나가 신체 내부에서 요동쳤다. ​ 나는 창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창을 감싸고 있던 녹옥빛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 편린의 기운. 파사현정(破邪顯正)이었다. ​ “아이고….” ​ 나는 곡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 할 게 없는, 아니, 교류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소 여유로운 요즘. ​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쥐여주기보단,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지금도 훈련장에서 열심히 훈련하던 참이었다. ​ 주말이지만 텅 빈 실내 훈련장,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 조명은 어둑했고, 나 혼자만이 내는 소리가 안을 가득 채웠다. 말했지만, 교류전은 모두가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라 볼 수 있었다. ​ 내가 중점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간단했다. ​ ==== [권능: 조화의 편린(片鱗)] ①파사현정(破邪顯正) ㅡ 사한 것을 부수어라. ② ??? ③ ??? ==== ​ 나. 정해인의, 편린. ​ “어렵다.” ​ 진심이었다. 진짜 너무 어렵다. ​ 나는 두 번째 확장 권능을 개방하고자 했다. ​ 편린. 이 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중요한 힘. 고위 마인, 혹은 악신에게 대적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저항 수단. ​ 유하나의 질서의 편린. ​ 강아린의 허무의 편린. ​ 천여울의 갈망의 편린. ​ 그리고 성시우… 아니, 나 정해인의 조화의 편린까지. ​ 이 세계에 편린은 정확히 네 개가 존재한다. 더도, 덜도 없다. 정확히 네 개. ​ 모두 다른 기원을 가지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편린은, 마인을 상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 내가 가진 첫 번째 확장 권능, 파사현정(破邪顯正) 역시 마찬가지였다. ​ 하지만 문제는, 이 편린의 잠재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 ​ 편린의 확장 권능은 대상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성장 결과도 다르다. 따라서 원작 주인공인 성시우를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 ‘…난 어떡하지?’ ​ 아예 모른다. ​ 성시우의 루트야 익숙하지만, 정해인의 루트는 나도 처음이다. 파사현정을 기점으로 확장이 시작된 편린의 길은, 이후 어떻게 뻗어나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나도 파사현정(破邪顯正) 자체를 처음 봤으니까. ​ 성시우는 항마(抗魔). ​ 유하나는 악살접(惡殺蝶). ​ 강아린은 패도멸악(覇道滅惡). ​ 천여울은 성화(聖火)이다. ​ 이름도, 방향성도, 성향도 제각각이지만. 첫 번째 확장 권능은 공통적으로 마인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 그리고 두 번째 확장 권능을 해방하는 순간, 그 힘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 따라서, 편린을 이른 시점에 얻게 된 나는, 2차 확장도 빠르게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온갖 시도들을 반복해 왔는데…. ​ “아직 멀었나.” ​ 솔직히 욕심이긴 했다. 아직은, 그 문을 두드리기엔 한참 이른 시점이었으니까. ​ “죽겠네.” ​ 이것저것 다 해보겠다고, 마력을 쥐어짜고 몸을 던져가며 훈련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두 번째 문을 두드리는 시늉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거칠게 숨을 고르며, 잠깐 휴식을 취하던 그때. ​ -철컥. ​ 훈련장 문이 열리는 소리. 누군가가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 훈련장을 전세 내는 것도 여기까진가 싶어 자세를 푼 채 앉은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응?’ ​ 거기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주서준. 그리고 그의 옆엔, 귀엽게 생긴 여학생. ​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온 학생이라는 건 확실하다. 몇 번 지나치며 마주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 둘은 내가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사이좋게 웃으며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나누는 대화와 행동. 거리감 없는 시선과 손짓. ​ 어째 모양새가…. ​ ‘사귀나?’ ​ 딱 그런 느낌이었다. 굳이 남의 연애사까지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진짜 사람 한명도 없을걸? 내가 선배한테 들은 꿀 장소….” ​ 여학생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주서준은 쓱, 안쪽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피식 웃더니, 곁의 여학생에게 말했다. ​ “있는데? 사람.” ​ 난 그의 말을 정정했다. ​ “아니, 없는 거 맞아. 나갈 거라서.” ​ 할 것도 다 했겠다, 겸사겸사 빠져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지나치려는 때. ​ “해인… 이라고 했나?” ​ 주서준의 부름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외모에, 자신감까지 물씬 풍겼다. ​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아, 미안. 쉬러 가는데 붙잡았네.” ​ “괜찮아.” ​ “다른 건 아니고… 채하한테 말 하나만 전해줄 수 있어? 요즘 완전 두문불출이라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 근데 너랑은 자주 만나는 것 같아서….” ​ 윤채하는 요즘 새로 얻은 힘을 다듬느라 바빴다. 수업이 끝나면 아주 방에서 튀어나오질 않는다. ​ 메세지는 자꾸 오긴 한다. 근데 요즘따라 아침에도 그렇고 자꾸 이상한 질문만 하길래 답변도 안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어, 뭔데?” ​ “음… 그냥, 곧 있을 개인전. 우리 둘이 언젠가 만나서 붙게 될 텐데. 나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다고. 그거, 알고 있으라고.” ​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 나는 그를 유심히 봤다. ​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서준은 착실히 성장 중이다.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 “전해줄게.” ​ “오, 고마워.” ​ 나는 짧게 응답한 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채하가 누구야?” ​ “있어, 친구.” ​ 주서준이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 문득, 두 사람이 개인전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 요즘 윤채하는 마법 훈련보다는 내면의 기운을 다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에 주서준은 내외 모두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었다. ​ ‘모르겠는데.’ ​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윤채하가 밀릴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서준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었다. ​ 물론, 윤채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 ‘재밌겠네.’ ​ 이건,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다. ​ ​ ​ ​ *** ​ ​ ​ ​ 라벤더 향이 물씬 풍기는 기숙사 방 안. ​ “왜 대답을 안 하지.” ​ 윤채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 워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조금 전. ​ [summer]: 티라노사우루스랑 카르카로돈토사우루스랑 싸우면 누가 이겨? ​ 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 그녀답지 않은, 아주 엉뚱한 질문이었다. 사실, 보내놓고 그녀 스스로도 당황했다. ​ ‘내가 이런 걸 보내다니.’ ​ …그리고 읽씹. ​ 보기 좋게 씹혔다. 무려 29분째였다. 아, 방금 막 30분째가 됐다. ​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어딘가 억울해 보였다. 워치 옆, 펼쳐진 책상 위에는 두툼한 잡지 한 권이 펼쳐져 있다. ​ [방구석 마법사도 궁금해하는 관계의 법칙~ 궁극의 필살 플러팅 199선!] ​ 아카데미 서점 구석진 공간, 아무도 안 보는 잡지 코너에서 발견한 물건. ​ 처음에는. ‘뭐야 이건?’ 싶은 눈빛으로 넘겼다. 그러나. ​ ‘마법보다 어려운 건 이성의 마음♥’ ‘하루 평균 연락 횟수로 알아보는 친밀도 그래프!’ ‘의미 있는 스킨십 vs 습관적 스킨십! 구별법 대공개!’ ​ 그 어처구니없는 문구들에 황당한 웃음이 나왔지만, 이상하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 [관심 있는 이성에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엉뚱한 질문을 해보세요! 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당신! 반전 매력! 백치미!] ​ 그 한 줄에 설득당해, 결국 ‘궁극의 필살 플러팅 199선’ 중 하나를 골라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 윤채하는 턱을 괴고, 다시 워치의 메세지를 열어봤다. ​ “….” ​ 답장은 여전히 없었다. ​ 입술을 꾹 다물고, 책장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 『방구석 마법사도 궁금해하는 관계의 법칙~』 ​ “아, 씨.” ​ 내가 미쳤지. ​ 저 방구석 마법사라는 키워드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 같다. 마침 그녀는 매우 방구석이었고, 또 엄청 마법사였으니까. ​ 만약 잡지 제작사가 이걸 노리고 만든 거라면, 아주 성공적인 마케팅이었다. ​ “… 확 불태워버릴….” ​ 작게 중얼거리려던 그 순간. ​ -띠링! ​ “!” ​ 귀가 쫑긋. 눈이 번쩍. 윤채하는 반사적으로 워치를 들여다봤다. ​ [belief_]: 미안, 훈련하느라 읽었는데 답변을 못 했네. [belief_]: 아니 근데 자꾸 뭔 질문을 하는거야 뭔 사우루스?? [belief_]: 대답해야 되는 거야? 고민 좀 해보게. ​ “히히….” ​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간다. ​ 그녀의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 최근 들어 자꾸 느껴지는 지금 이 감정. 윤채하에게 있어선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새롭고,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 이상할 정도로 말랑한 기분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 ‘… 진짜였나?’ ​ 윤채하는 힐끗거리며 시선을 책상 위로 옮겼다. ​ “…….” ​ -텁. ​ 그리고는 조심스레 잡지를 덮었다. 마치 귀중한 마도서를 다루듯, 아주 살포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