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의 불은 꺼져 있었다. 천장의 스크린만이 푸른빛을 내리쬐며, 공간을 어슴푸레하게 밝힌다. ​ “나보고 믿으라고 하지 않았어?” ​ “… 흠, 흠.” ​ 강아린과 천여울은 나란히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그 스크린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스크린엔 교류전 단체전 팀 구성 결과가 올라온다. ​ 두 사람 모두 멘토 멘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정해인과 같은 팀이 되려면 무작위로 배정되는 4인 슬롯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과거 반 배정처럼, 이번에도 강아린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을까 했는데…. ​ [정해인 / 윤채하 / 유하나 / 조유리 / 김대현 / 윤상혁 / 한이리 / 고민준] ​ 보기 좋게 실패했다. ​ 강아린은 눈을 찡그리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 “…하.” ​ 천여울은 머리를 책상에 박고 있었다. 손끝이 책상 위를 느릿하게 두드린다. 톡. 톡. 톡. 감정도 없고, 규칙도 없는 맥없는 리듬. ​ “방식이 무작위긴 한데, 같은 팀으로 한 번이라도 싸워본 학생들 위주로 먼저 선발했다더라.” ​ 강아린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천여울은 대답 없이, 그대로 있었다. ​ “추첨 담당 교관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물이라, 영광이랑 접점도 없고.” ​ 천여울은 대답 대신, 더 깊게 머리를 박았다. ​ “…이럴 거면 멘토멘티라도 할 걸 그랬나.” ​ 강아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였다. ​ “뭘 어떻게 해.” ​ 천여울이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 “얼마 없는 여학생은 유하나가 귀신같이 채갔고. 다른 학생들은 거절하고. 그럼 남은 건 남학생인데…” ​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 “나보고 다른 남자랑 멘토멘티를 하라고? 죽자는 거지.” ​ “동감이야.” ​ 강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은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푸른 빛이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화면 위로 또 다른 팀 구성이 올라왔다. ​ “근데 하시온 얘는 어디 갔어? 이년 설마 또 기숙사에….” ​ 천여울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강아린이 화면 하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저기 있네.” ​ 자세히 보니, 작게 떠 있는 문구 하나. ​ 모의 교류전 적대팀장 [하시온] ​ 천여울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시선이 스크린 하단에 고정된다. 천천히 화면이 전환되며, 가온이 구성한 대항팀의 명단이 떴다. 하시온은 그쪽에 편입되어 있었다. ​ 모의 교류전을 위해 가온에서 일부 인원을 차출해 적대팀을 구성했다. ​ 천여울의 눈매가 좁아졌다. 시온의 팀 바로 옆, 정해인의 이름이 또렷이 찍혀 있었다. ​ “…얘네 해인이 조랑 붙는데?” ​ “그러네.” ​ 모의전이 곧 시작될 듯 화면이 어둡게 변했다. 시작 카운트가 떴고, 양 팀의 대진 구도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 ​ ​ ​ *** ​ ​ ​ ​ 정신이 하나도 없다. ​ 체력장 때문에 일정이 꼬였는지, 가온에서는 팀 구성과 모의전을 같은 날에 진행하기로 했다. ​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다 외우기도 전에 장비부터 챙기게 됐다. ​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사람 빼고는 전부 아는 얼굴들이었다. 일정이 밀렸기에 가능한 한 기존에 함께 훈련해본 인물들끼리 팀을 짜려 했던 듯하다. ​ “또 같은 팀이네.” ​ 나는 눈앞의 김대현과 윤상혁을 보며 말했다. 윤상혁이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 “나야 좋지 뭐.” ​ 그가 이렇게 들떠 있는 데엔 이유가 있다. 교류전에 포함되는 것 자체로 매체를 통해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은 전부 차세대 영웅이고, 누구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있었다. ​ 게다가 가온은 굳이 ‘적대팀’을 따로 만들어 선발되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간접적인 참여 기회를 주기로 했다. ​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게 끔 경험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 만약 적대팀에도 못 뽑혔다면 뭐…. ​ ‘어쩔 수 없지.’ ​ 그것도 다 운이다. ​ 통성명할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10분 후면 전송 장치가 작동해, 각자 배정된 구역으로 텔레포트 될 예정이니까. ​ 그때, 멀뚱거리던 낯선 얼굴이 하나 다가왔다. ​ 한이리였다. ​ “저기… 안녕….” ​ 과거 모의 던전 실습 때 상대 팀이었던 학생이다. ​ 함정을 설치했던 그 팀. 그는 저번 있었던 일 때문에 뭔가 켕기는 게 있어 보였다. ​ “지난번엔… 미안했어.” 한이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괜찮아.” ​ 나는 짧게 답했다. 사실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그 일 때문에 한동안 안 좋은 시선이 그를 따라다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윤상혁과 김대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주는 눈치다. ​ 잠시 후, 다른 인물이 다가왔다. 고민준.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친근한 태도다. ​ “하하, 나는 여기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부탁해.” ​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고, 돌아가며 악수를 청했다. 성격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 -띠링! ​ 그 순간, 눈앞의 전광판이 켜지며 상대 팀 명단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시선을 옮겼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 “아이고.” ​ 나는 중얼거렸다. 모의 교류전이기에 쉬엄쉬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피곤하겠네.” ​ 상대 팀에는 시온의 이름이 있었다. ​ 나와 시온은 영감의 밑에서 자랐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같이 공유했다. 우리는 서로의 방식을 외울 정도로 훈련했고, 숨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따라서, 그녀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건 뭐…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 이러면, 팀 리더는 내가 맡을 수 없다. 전부 읽힐 게 뻔하다. ​ 이번 모의전의 설정은 단순했다. ​ ‘던전 브레이크 발생 현장. 민간인을 구출하라.’ ​ 우리는 영웅 진영, 상대는 마인 진영. ​ 던전 브레이크는 종종 내부의 마력 역류로 인해 자연 발생할 때도 있지만, 마인 혹은 빌런의 개입으로 강제 발생할 수도 있다. ​ 그럴 경우, 영웅은 민간인을 보호하거나 탈출시키는 것이 목적이고, 마인은 민간인을 인질로 삼거나 더 큰 혼란을 유도하는 데 집중한다. ​ 결국 중요한 건 이거다. 누가 먼저 민간인에게 도달하느냐. ​ “우리 리더는 누가 할까?” ​ 윤상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 시선이 나를 향했다. ​ “해인이….” “해인….” ​ 유하나와 윤채하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자르듯, 빠르게 유하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 “유하나 네가 하는 건 어때? 우리 중에 순위도 가장 높으니까.” ​ 유하나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알았어. 그럼, 내가 해볼게.” ​ 유하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곧장 브리핑을 시작했다. ​ 그래도 가온답게, 팀 내부의 역할은 밸런스 있게 나뉘어 있었다. ​ “일단 본대에는 김대현, 윤채하, 조유리, 윤상혁, 고민준, 그리고 해인이가 들어가.” ​ 역시 맡기길 잘했다. 정리 속도도, 설명의 흐름도 매끄러웠다. ​ “전위는 해인이하고 김대현. 윤상혁이랑 고민준은 중앙 마법사들 보호하면서 붙어주고 나는 왼쪽 사이드. 한이리는 오른쪽 사이드로 움직이면 될 것 같아.” ​ 각자의 특성을 살린 정석적인 구성이었다. ​ 8명이 한 공대를 이루는 순간. 본대와 분리되는 사이드 인원이 발생한다. 비효율적인 뭉침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대 영웅의 기본 전술이었다. ​ 뭉치면 집중력이 생기지만, 공간 장악력이 떨어지기에, 사이드 운영은 기동성과 판단력이 우수한 인원이 맡는다. 유하나는 철저히 그 기준을 따르고 있었다. ​ 모두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여졌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이제 곧 전송 장치 가동됩니다. 전원 준비하세요!” ​ 조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의 실습실 벽면의 마력판이 순식간에 빛을 품는다. ​ 사방이 얇은 청백색 파동에 감싸지며, 발밑의 전송진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웅. ​ 공간이 휘는 감각이 느껴진다. 귀가 멍해지고 무게감이 몸을 짓누른다. ​ “어?” ​ 누군가의 탄성이 들려온다. 잠깐의 어지러움이 지나가자…. ​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수풀로 우거진 도심이었다. ​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른 이끼. 유리창 너머로 자라난 넝쿨. 깨진 도로 위로 들풀과 덤불이 비집고 올라온다. ​ 던전 브레이크.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진 순간, 던전 고유의 특성이 바깥 세계를 침식하며 번져나간다. ​ “구현 잘됐네.” ​ 가온의 모의 던전은 이런 부분까지 완벽히 구현한다. ​ 우리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민간인을 확보하는 것. ​ “진형 갖추고, 출발하자.” ​ 망설일 틈도 없었다. 유하나는 이미 지도를 확인한 듯, 빠르게 진형을 지시했다. ​ 그 순간, 나는 유하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유하나.” ​ “응?” ​ “사이드는 내가 설게.” ​ 현장을 확인했다. 수풀로 엮인 건물 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속속들이 들어서 있다. ​ 기다란 검을 가진 그녀로서 이 필드의 사이드는 수직, 수평 모두 공간 제약이 심하다. 게다가 나무까지 타야 하니, 그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 현장을 확인하고 진형을 조율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 유하나는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으로서 팀원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 “알았어. 왼쪽 사이드 부탁할게.” ​ 수용은 빨랐다. ​ 카타스트로피는 기숙사에 두고 왔다. 교류전에서는 개인 무구의 사용이 제한되기 때문에, 지금 내 손에 쥔 건 가온에서 제공한 표준형 창이다. ​ 겉으로 보면 검과 창은 모두 긴 무기지만, 실전에서의 운용은 완전히 다르다. ​ 검은 휘두를 공간이 필요하다. 직선, 곡선, 연속 동작까지 전부 고려해야 한다. ​ 그러나 창은 한 방향만 뚫으면 된다. 직선 돌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율을 뽑을 수 있었다. ​ 내가 나무를 잘 타기도 하고. ​ -콰앙! ​ 멀리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함께, 브레이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유하나를 중심으로 본대는 진형을 유지하며 이동했다. ​ 나는 좌측 숲으로 빠졌고, 반대편 사이드는 한이리가 맡았다. ​ -바스락. ​ 수풀을 밟는 소리. 낙엽이 가볍게 눌린다. 나는 나무와 건물 사이를 넘어 다니고 있었다. ​ 사이드의 첫 번째 역할은 간단하다. ​ 기본적인 시야 확보, 본대와 떨어진 공간에서 각을 넓혀 포위망을 만들고, 잠재적 위협을 조기에 차단한다. ​ 나는 본대 쪽에 시선을 고정하며 움직였다. ​ 그때, 본대의 전방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 그린 자이언트. 돌과 이끼로 덮인 거대한 골렘이었다. ​ 전형적인 정령형 몬스터. 던전 브레이크와 함께 튀어나왔을 것이다. ​ ‘저 정도면….’ ​ 본대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이러면 지원은 필요 없다. 주변에서 전투 현장으로 접근하는 자잘한 몬스터들을 정리해주기만 하면 된다. ​ -쾅! ​ 윤채하의 화염구가 그린 자이언트의 복부에 직격했다. 무거운 돌덩이의 몸체가 흔들린다. ​ 흐름이 좋다. ​ 이러면 조금 더 전진해서…. ​ 그때. ​ “!” ​ -쐐애애애액! ​ [일체지각(一切知覺)이 발동됩니다!] ​ 시야의 방향과 상관없이, 나는 날아오는 살기를 느꼈다. ​ 화살. 정확히, 본대를 향한 직선 궤도. ​ 나는 고민 없이 창을 꺼내어 그대로 던졌다. ​ -챙! ​ 창날과 화살촉이 공중에서 충돌했다. 궤도가 비틀렸고, 튕겨진 화살은 근처 나무줄기에 깊숙이 박혔다. ​ 나는 그대로 도약해 창을 낚아챘다. 몸을 돌려, 향하는 시선을 틀었다. ​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 너에게. ​ “왔어?” ​ 사이드의 두 번째 역할. 상대 사이드와 조우했을 때, 반드시 이길 것. ​ 일반적으로 사이드는 본대를 지키기도 하지만, 상대 본대의 측면을 선제공격하기도 한다. ​ 그러나, 보통 수적 우위에 있을 때 쓰는 방법이다. 동일한 수의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여기까지 파고들었다는 건… 일반적인 전술이라 보기 어렵다. ​ “시온.” ​ 모든 걸 도외시하고, 나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 왼쪽 사이드에 있을 나를 만나기 위해. ‘읽혔네.’ ​ 이번에도, 나는 시온에게 읽혔다. 역시 시온은 못 속이겠다. ​ 나는 나무줄기를 세게 밟고 도약했다. 감각이 이끈 방향, 그곳에 분명히 그녀가 있다. ​ 수풀 몇 개가 젖혀지더니, 곧 본대를 향해 활을 겨눈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날카로운 눈빛, 땋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 눈동자. ​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 “상대로는 오랜만이네?” ​ “그러게.” ​ -쐐애애액! -챙! ​ 두 번째 화살이 발사되었다. 나는 다시, 반사적으로 창을 던졌다. 이번에도 창은 정확히 날아가는 궤도에 적중했고, 화살은 방향을 잃었다. ​ “우리끼리 오붓하게 노는 건 어때?” ​ 나는 창을 회수하며 말했다. ​ 시온은 조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 “나는….” ​ 그녀의 활 끝이 나를 정확히 겨냥한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 위험할 만큼 여유로운, 그리고 어딘가 야릇한 미소였다. ​ “늘 좋아.”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 -쐐애액! ​ 세 번째 화살이 공기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