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슬아슬했다. 최대한 빨리 뛰어오긴 했는데, 살짝 늦었다. 적절한 발판이 없었다면 좀 힘들었을 수도. ​ 광장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메두사의 잘려 나간 머리는 바닥을 구르다 멈췄고, 그 주변에는 뱀의 사체가 흩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 교수들과 영웅들이 나를 주시한다. 그들의 시선에는 놀람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 놀랄 만도 했다. 메두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 -우우웅 ​ 손에 쥔 하르페가 미세한 진동을 내며, 점차 빛을 잃어갔다. ​ ‘끝인가.’ ​ 전에 하르페가 사실상 일회용에 가깝다고 했었다. 그 이유가 이거다. 오랜 시간 돌 속에 잠들어 있던 녀석은, 단 한 번 사용하면 힘을 잃는다. ​ 그만큼 강력한 무기였고, 메두사의 목을 단번에 벨 수 있었던 것도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조만간 무기를 하나 구하는 게 좋아보인다. ​ 나는 하르페를 허리에 차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사실상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인물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 내가 속한 B반의 담당 교관, 도한성이었다. ​ “교관님.” ​ 그는 전장을 정리하며 여러 영웅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부상자를 후송하고, 잔여 병력을 정비하며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 ​ 내가 다가가자, 그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듯이 말했다. ​ “해인 학생. 대체 어떻게….” ​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곧장 본론을 던졌다. ​ “양동작전입니다. 메두사는 어디까지나 미끼였습니다.” ​ 도한성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 “…네?” ​ 그리고 내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나는 그의 반응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 “조금 전, 한 마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 “놈은 제 욕망을 꿰뚫어 보며 속삭였어요. ‘전부 줄 수 있다’고.” ​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떠졌다. 그리곤 조용히 중얼거렸다. ​ “…모라스.” ​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모라스는 그만큼 인지도가 있는 마인이기도 했다. ​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 인원 전부가 가야 할 겁니다.” ​ 맞는 말이다, 녀석은 분신을 사용한다. 많은 분신을 잡아도 본체를 잡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으니까. ​ “잠시만요!” ​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남성. 그의 견장에는 어떤 길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그는 단호하게 외쳤다. ​ “모라스가 정말 찾아왔다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 건 맞습니다.” ​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 “하지만 전원이 움직일 순 없습니다. 메두사를 소환한 자들을 역추적하는 게 우선입니다.” “만약 숨어있던 그들이 또 다른 마물을 소환한다면? 그땐 대응할 수 없게 됩니다.” ​ 나는 고민했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 마물은 메두사 하나다. 그들이 추가로 소환할 수 있도록 준비된 마물은 없다. ​ 그러나 이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증거도 없고, 설득할 논리도 빈약하다. ​ ‘어떡할까.’ ​ 나는 짧게 고민했다. 전원이 모라스를 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저 말도 틀린 건 아니니, 적절히 타협하고 빠르게…. ​ 그때였다. ​ “인형술사의 추격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 차분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인물들을 확인했다. ​ 은빛 갑주를 입은 여성.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사제들. ​ 교단의 또 다른 무력 집단. 팔라딘. ​ 용사를 따르는 ‘크루세이더’가 있다면, 성녀를 따르는 ‘팔라딘’이 있다. ​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그녀는 차분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 “우리가 인형술사들을 추적합니다.” “그러니 나머지 분들은 모라스를 쫓아주세요.” ​ 그녀의 말에 반박하던 남성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모라스를 찾는 것이 인형사를 역추적하는 것보다 쉽다. 게다가 팔라딘은 마인 추적에 특화된 집단이다. 그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상황이 정리되자, 도한성이 다른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 그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 “부상자는 병동으로 빠르게 후송하고, 전투 가능한 인원은 바로 해산해 모라스를 추격합니다.” ​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해인 학생….” ​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가 내뱉은 짧은 한숨 뒤,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방금, 그 모습을 보고도 가지 말라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겠죠.” ​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강조하듯 덧붙였다. ​ “그러나 조심해 주세요.” ​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 모라스를 죽이고, 본체까지 찾아낸다. 그게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 ​ ​ ​ *** ​ ​ ​ ​ 소란스럽던 외부와는 달리, 이곳은 신성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촉촉한 공기가 감도는 내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희미한 촛불의 빛이 아른거린다. ​ 그 중심에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닌 여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그 눈길이 마치,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감싸는 듯했다. ​ 가온 부지 내에 있는 아르카디아의 교회였다. ​ 천여울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서늘한 감각을 전했다. ​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그 손에는 누군가가 준 십자가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 “여신님….” ​ 고요한 마음으로, 천천히 기도를 올렸다. ​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은은한 빛이 퍼졌다. 각색의 빛줄기들이 교회 내부를 물들였다. ​ 신성한 향이 공간을 감쌌다. 은은하게 타들어 가는 향초의 향기, 오래된 목재에서 풍겨 나오는 묵직한 기운.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깥이 고요해지고, 교회 내부도 한층 더 깊은 정적에 잠겼다. ​ 그리고— ​ -또각, 또각. ​ 낯선 기척. ​ 아니. 예상했던 기척. ​ 천여울은 시선은 여신상에 고정한 채,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길을 잃으셨나요?” ​ 그녀의 목소리는 자애롭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 “이곳은 성녀나 주교 이상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으니, 나가주시겠습니까?” ​ 그러나 침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 -또각. ​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 “하하하….” ​ 교회의 고요를 깨는 듯한, 낮고 불쾌한 웃음.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기묘한 울림. ​ “성녀님, 저에게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둠에 녹아드는 검은 로브, 희미한 촛불에 번지는 가면의 윤곽. ​ 모라스였다. ​ 그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가면의 입가 너머로, 조롱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 “사람들에게는, 모두 욕망이 있습니다.” ​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 “그리고, 그건 성녀님도 예외가 아니겠지요.” ​ 천여울은 다시금 시선을 여신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짧게 중얼거렸다. ​ “팔라딘을 호출하겠습니다.” ​ 그러나 모라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 “소용없습니다.” ​ 그는 나직이 웃었다. ​ “외부에는 메두사가 있습니다.” ​ 그 순간, 천여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모라스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찢어질 듯 끌어올렸다. ​ “그럼 이만, 제게. 보여주시겠습니까? 그 욕망.” ​ 그의 가면 너머, 검은색 동공이 붉게 물들었다.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 ​ 모라스의 능력— 욕망의 개안(開眼). 그것은 상대의 마음 깊숙이 잠재된 진짜 욕망을 꺼내 보는 능력이었다. 설령 상대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 그 붉은 눈빛이 천여울을 향해 번졌다. ​ -스스스슥 ​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 모라스의 몸이 굳었다. ​ “……?” ​ 그의 웃음이 멈췄다. 그리고, 그의 가면 너머에서 번지는 동공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 “……뭐야?” ​ 그가 본 것은. 신앙의 흔들림도. 권력의 욕망도. 세속적인 갈망도 아니었다. ​ 천여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가장 원초적인 두 가지 욕망. ​ 그중 하나는. 너무나도 ‘불순한 욕망’. ​ 정해인이라는 자와의 육체적인 결합. 그러나 단순한 교감이 아니었다. 그 너머, 상상조차 적나라하고 짙게 물든— 차마, 말로 옮길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욕망. ​ 그리고 다른 하나는. ​ 너무나도 ‘순수한 욕망’. ​ 악신의 무조건적 말살. ​ 너무나도 순결하여, 그 자체로 광기처럼 보일 정도로. 그 순수하고 염원에 가까울 정도로 신실한 의지에, 모라스의 입가가 경직됐다. ​ “이건….” ​ 그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욕망을 조종하고 유혹하는 자. ​ 악신의 부활은, 인간이 절대 알고 있어서는 안 될 정보였다. 그럼에도. ​ 천여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라스는 한발짝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알려야 한다.’ ​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천여울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리고. ​ -부스스… ​ 그녀의 손에 쥐어진 십자가가. ​ 조용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 “드디어 됐네.” ​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아노의 성력. 오랜 세월 동안 신성력을 머금고 있던 그 힘을, 그녀가 온전히 흡수한 순간이었다. ​ 그와 동시에— ​ — 쿵. ​ 공간이 일그러졌다. 교회의 내부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기 시작했다. ​ -드르르륵. ​ 목재로 된 문들이 스스로 닫힌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붉게 물들며, 기존의 은은한 빛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빛은 곧 푸른빛으로 변했다. ​ 신성한 푸른빛이 공간을 물들였다. ​ 모라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공간이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재편성’되고 있었다. ​ “…뭐죠, 이건.” ​ 그는 뒷걸음질 쳤다. 이 기운은, 마인으로서 결코 가까이 해야 할 기운이 아니었으니까. ​ “이게 뭐냐고!!” ​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오직. 그 공간의 주인이. 느릿하게 일어나며, 자신의 이름을 선언할 뿐. ​ “성전(聖殿)이 열렸습니다.” ​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교회의 바닥이 푸른 빛으로 빛나며 신성 문양이 새겨졌다. ​ 모라스의 몸이 강제로 붙잡혔다. 중력의 방향이 뒤틀렸다. ​ 공간 자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 미래 언젠가, 수만 명의 마인을 묶고 태워버렸을 그 ‘성전(聖殿)’이— 이곳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 그녀의 손끝이 움직였다. ​ 천여울을 중심으로 허공에서 찬란한 휘장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처럼,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 천여울의 복장이 서서히 바뀐다. ​ 더 이상 수녀의 복장이 아니다. ​ 대신, 그녀의 몸을 감싼 것은— 마치, 신의 대리자와도 같은 선녀(仙女)의 복장. ​ 흰색과 푸른빛이 섞인 얇은 천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 모라스의 몸이 저절로 꿇어앉았다. 마치, 신 앞에서 절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 그녀가 속삭였다. ​ “여기에는, 네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 — 촤아아악. ​ 푸른빛이 성전을 감싸기 시작했다. ​ 그 빛은 기존의 신성력과는 본질이 달랐다. 그것은 오랜 신앙에서 비롯된 힘이 아니라, ​ 단 한 사람을 향한, 오직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그녀가 지금 이 공간에서 모시는 존재는 여신이 아닌,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 “그러니, 조아려. 내가 모시는 신에게.” ​ 그리고 천여울이 손을 내렸다. ​ 그 순간. ​ -콰직! ​ 모라스의 몸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 그의 분신은, 본체로 기억을 전달할 틈도 없이, 완전한 ‘신성의 법칙’에 의해 소멸되었다. ​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 그녀가 모시는 단 하나의 신에게. 사랑하는 그 존재에게. ​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