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 머리 위의 천장은 높게 뻗어 있었다. ​ 이 거대한 공동의 끝자락에는 미약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와 암흑 속 공간을 간신히 밝혔다. ​ 나는 본능적으로 그 빛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그리고 그 미약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는 출구의 계단. 그곳, 계단 위에는 누군가가 앉아있다. ​ 그는 등을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무언가를 툭툭 두드리고 있다. ​ 그러나 그를 눈에 담기 시작한 순간까지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 아무 말 없이, 움직임도 없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귀기 어린 기운은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 ‘싸우면 진다… 아니.’ ​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 ‘죽는다.’ ​ 어둠 속 그의 실루엣은 나와 비슷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존재감만큼은 나를 완벽히 압도했다. ​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안녕?” ​ 그가 입을 열었다. ​ “음… 반갑긴 한데, 아직 여기 오기에는 좀 이른 것 같네.” ​ 형체의 얼굴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 “영약 때문인가. 그래도… 정말 잘 먹였어.” ​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거슬림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 나는 허리춤에 찬 창을, 아주 강하게 쥐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팟- ​ 저 멀리 있던 형체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 본능적으로 창을 뽑아 정면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싸늘한 감각이 목을 스친다. 목덜미에 닿은 창의 날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이미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 코앞에 있었지만, 여전하게도. ​ 마치 노이즈가 낀 듯한 모습에,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 “미안해. 깨우려면, 이 방법 뿐이어서.” ​ 목에 칼날이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 “다음에 보자.” ​ 내 시야가 암전됐다. ​ “아마 기억 못하겠지만.” ​ ​ ​ *** ​ ​ ​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어딘지 모를 깊은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한 기분. ​ 신체는 오히려 상쾌했다. 온종일 푹신한 침대에서 잔 것 같은 개운함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포근한 침대의 감촉이 등 아래로 전해졌고, 정신 또한 서서히 깨어나면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낯선 천장이었다. ​ -벌떡 ​ “여기가 어디야.” ​ 주위를 둘러보자, 넓고 깨끗한 입원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는 고층 빌딩의 정경이 펼쳐져 있다. 이불을 내려다보니 병원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드러났다. ​ 그리고, 이제야 떠오르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 ​ ‘옳지… 옳지… 쭉 들이켜.’ ​ 아. 미친. ​ 나는 급하게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맥박의 고동을 느끼며 마나의 흐름을 확인했다. ​ -두근, 두근 ​ 심장 박동의 소리가 고조될수록 마나의 통로를 가늠할 수 있었다. ​ ‘3배… 4배’ ​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이어갔다. ​ ‘아니야… 5배.’ ​ 속도, 효율, 그리고 그 절대적인 양까지. 모든 것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 나는 끌어올리는 마나를 멈추고 머리를 짚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무슨 짓을….” ​ 이 영약은 단순히 마신다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마시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는 있다. 어쨌든 수백 년의 자연지기가 농축된 천혜의 영약이니까. ​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응축된 자연지기들은 거칠고 제어가 어렵다. 섭취한 자는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해 기절하거나, 심할 경우 생명에 위협을 끼칠 수도 있다. ​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호법(護法)을 서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나를 섬세하게 다뤄 몸 구석구석으로 영약의 기운을 퍼뜨리고, 과잉된 부분은 적절히 다스려야 한다. ​ 그런데 몸에서 날뛰는 마나들은 마치 완벽하게 길들여진 듯, 효율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 … 솔직히 야무질 정도로 잘해놨다. 마치 한 톨의 영약도 허투루 흘리지 않겠다는 듯 아주 꼼꼼하게. ​ 천여울은 그 과정마저 완벽하게 수행한 듯했다. ​ “으응… 일어났어?” ​ 부드럽고 살짝 나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아래로 눈길을 내리자 환자용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 그곳에는 시온이 몸을 구부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깨어난 듯, 그녀는 눈을 비비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 ​ “응, 아니야. 어차피 일어나려던 참이었어….” ​ -하암. ​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길게 하품했다. ​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 ​ “밤중에 잘못될까 봐 옆에서 지켜보라더라. 그래서 그냥 있었지.” ​ “고마워.” ​ 내 짧은 대답에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 -벌컥 ​ 그때, 묵직한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병실로 들어오는 인물. 2m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키와 단정히 빗어 넘긴 백발, 그리고 턱에서 뺨까지 이어진 깊은 상처. ​ 영감이었다. ​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 “쓰려졌다길래 와봤는데 멀쩡한 걸 보니 괜히 왔군.” ​ 묵직한 목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 “에이, 할아버지 또 그러시네. 어제 저녁에도 오셔놓고.” ​ 영감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 그의 눈빛이 내게 고정된 채 눈이 푸른색으로 일렁였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다. ​ “… 대체 어디서 뭘 주워 먹은 거냐?” ​ 영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의문과 경계가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그러게 말입니다.” ​ 영감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 “일어서 봐라.” ​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심장 박동은 안정적이군. 마나는…” ​ 그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 “단단하다.” 영감이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나 검사를 받아보긴 해야겠어.” ​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 “그래야죠.” ​ 그는 침대 옆에 붙어있던 인터폰을 들어 짧게 대화했다. 이내 전화를 끊은 영감은 손목을 굴리며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움직여라.” ​ 명령 같은 한마디. ​ “예.”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 ​ ​ *** ​ ​ ​ 검사 결과를 듣고 나오는 길이다. ​ ‘건강에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탈이네요, 허허.’ ​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시설로 꼽히는 영광 병원의 의사가 직접 한 말이다.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 ‘그럴 것 같았다.’ ‘다행이다~’ ​ 영감과 시온은 의사의 설명을 듣고는 무심하게 떠났다. 시온은 등교했어야 했고, 영감은 워낙에 바쁜 사람이다. ​ 나 또한 퇴원 절차를 밟고 병원을 나왔다. ​ ‘네? 누가요?’ ​ 결제 대금은 이미 전부 처리되어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알려달라고 했는데, 알려주질 않았다. ​ “누구지….” ​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영감일 것이다. ​ 그렇게 병원 문을 나선 순간, 문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 문이 열리더니, 날렵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 깔끔하게 다려진 깃, 완벽한 각도의 넥타이. ​ ‘협회.’ ​ 한눈에 봐도 협회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 “별일 없이 퇴원하셔서 다행입니다, ‘묵귀’님. 저는 협회 소속 영웅 김길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이아노의 무덤 건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 “글쎄요, 제가 등교해야 해서.” ​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가온과는 협의가 끝난 상태입니다. 머리를 식히며 오늘까지만 정양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협회에서는 미리 손을 써놓은 듯했다. ​ 사실 어차피 따라갈 생각이긴 했다. 그냥 한번 튕겨봤다. ​ “예, 그러죠.” ​ 세단의 내부는 넓었다. 좌석은 푹신했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 “출발하겠습니다.” ​ 차가 출발하자, 나는 어깨를 기대며 가방을 쥐었다. 십자가는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 “성녀 후보님께 들었습니다.” ​ 차가 도로를 달리길 몇 분, 운전을 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 “이아노의 무덤을 발견하신 것도 정해인님이며, 모든 권리는 정해인 님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 “네, 뭐.” ​ 틀린 말은 아니었다. ​ “… 어제 저녁부터 일본 영웅 협회에서 온 인사들이 정해인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던 모양. 일본에 있어서 이아노는 상징적인 인물이기에 한걸음에 달려온 듯했다. ​ “… 영약, 그리고 이아노의 십자가까지. 혹시 어떻게 사용하실 예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그러나 그는 아차 싶었는지, 급히 말을 덧붙였다. ​ “아 물론, 저희는 영웅의 던전 권리를 완벽히 존중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있어야 일본 측에 대한 대응과 협의가 더 수월할 테니, 혹여 협조해 주실 부분이 있다면….” ​ “먹었어요.” ​ “예…?” ​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됐다. ​ “제가.” ​ 진짜로.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