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조차 묻힐 정도로 눈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강아린은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불이 모두 꺼진 도시 속에서, 단 하나—그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만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 “빨리… 빨리….” ​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강아린은 엘리베이터조차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맹렬히 뛰어올랐다.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 -벌컥! ​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서자,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있었다. ​ 정해인. ​ 그는 평소처럼 창의 날을 정성스레 닦으며 무기를 정비하고 있었다. ​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늘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게. ​ 강아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 “해인….” ​ 정해인은 문을 열고 들어온 강아린을 보자, 그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 그가 웃자, 강아린의 심장이 더 옥죄였다. ​ 정해인은 조용히 시계를 보며 말을 꺼냈다. ​ “미안.” ​ 그는 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 때문에 깼구나.” ​ 그는 강아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녀는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 “혼자 간다며….” ​ 정해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내가 가야지.” ​ “나도… 나도 갈래. 제발, 나도 같이 가게 해줘.” ​ 그는 강아린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 “안 되는 거 알잖아.” ​ 그의 뒤편에 걸린 전황판에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유하나, 천여울, 그리고 강아린. 셋의 이름이 함께였고, 성시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 그러나 정해인, 그는 홀로 아프리카 중앙에 떨어져 있었다. 적들이 밀려들어 오는 전선에서, 그는 스스로 마지막 방어선이 될 예정이었다. ​ “너희는 악마를 죽여야 해. 편린의 힘을 얻은 너희가 가지 않으면 안 돼.” ​ 정해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 미소는 왠지 쓸쓸했다. 강아린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쏟았다. ​ 빌어먹을 편린. 그게 문제였다. 그녀의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몸에 박힌 놈을 뜯어내고 싶었다. ​ 혹은 갑자기 사라진, 그 새끼의 편린이라도. ​ “그럼 해인 너는, 너는 어떡해….” ​ 정해인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 “내가 버티는 동안, 너희가 잘 해주지 않겠어?” ​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담담했다. 강아린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 “편린, 금방 찾을 수 있어. 지금 영광이 이 잡듯이 뒤지고….” ​ “… 편린은, 네 개가 끝이야.” ​ 그의 목소리는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 “어떻게… 그걸 확신해….” ​ 정해인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 “내가 언제 틀린 적 있었어?” ​ 강아린의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를 붙잡고 흐느꼈다. ​ “다 잘될 거야.” ​ 그는 그렇게 말했다. ​ 그리고 그 순간의 선택은, 그녀의 평생을 지배하는 후회가 된다. ​ 강아린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났다.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 ‘또….’ ​ 늘 꾸던 악몽이었다. ​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 -슥 ​ 작은 소리가 그녀의 귀를 스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앉아 있었다. ​ 그는 모닥불 옆에 앉아 창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 “해인….” ​ 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정해인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눈에 잠깐의 놀람이 스쳤지만,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되는데. ​ “미안하다.” ​ 그는 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 때문에 깼나 보네. 좀 시끄러웠지?” ​ 꿈속의 그는 차가운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모닥불 앞에서 따스한 온기를 품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강아린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 ​ ​ *** ​ ​ ​ ​ “현대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해진 건 맞아.” ​ 나는 산장 앞에서 몸을 풀며 그녀에게 말했다. ​ “그렇다 하더라도 방심은 안 되는….” ​ 그러나 그녀는 딱히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쭈그려 앉은 채 턱을 괴며 내가 몸 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뭐해?” ​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일어나면서 태연하게 답했다. ​ “그냥, 잘생겨서. 갈까?” ​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손가락이 드러난 글러브를 착용했다. ​ “… 그러자.” ​ ‘몸을 푸는 행위는, 평소에 긴장을 풀고 사는 녀석이나 하는 것.’ ​ 영감이 내게 쉼 없이 했던 말이다. 그녀 정도 수준의 학생에게는 사실 필요 없는 시간이긴 했다. ​ 오늘은 천지 부근까지 갈 생각은 없다. 최대한 점진적으로 접근할 예정이었다. ​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간 지 몇 분, 눈앞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고요한 공간. ​ 나는 눈을 감고 흐름을 느꼈다. 허리춤의 창을 천천히 뽑아 들며 짧게 외쳤다. ​ “전투 준비.” ​ “응.” ​ 강아린은 짧게 답하며 내 뒤로 딱 붙어섰다. ​ 창이 내 허리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눈밭이 들썩였다. 덮인 눈이 솟아오르며 푸른색 눈동자 한 쌍이 서서히 드러났다. ​ 마치 눈밭에 박힌 사파이어 두 개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털로 뒤덮인 거대한 마물, 설표였다. ​ -크르르…. ​ 털의 색으로 보아 아종은 아니다. 강하지만, 해볼 만하다. 게다가 뒤에는 강아린이 있다. ​ ‘선공권.’ ​ 설표는 기본적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마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방어 능력은 약한 편. 즉, 즉시 해야 할 것은— ​ “강아린, 커튼 가능해?” ​ -스슥!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손끝에서 마나가 뭉쳐 암막이 펼쳐졌다. ​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는 완벽한 암막. 그 완성도에 나는 감탄했다. ​ 그러나 따로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눈앞의 놈을 해치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 설표는 처음 접하는 검은색 막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것도 잠시, 미세한 몸짓으로 자세를 낮추더니, 몸을 바짝 웅크리며 언제든 공격에 반응해 튀어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 나는 창을 치켜들고 신체를 한계까지 꺾었다. 온몸을 활처럼 휘며 탄력을 끌어모았다. ​ 그리고, 그 탄력을 풀어냄과 동시에 창을 던지고, 허공으로 몸을 쏘아 올렸다. ​ 일종의 궁신탄영(弓身彈影)을 응용한 행위였다. ​ -팡! ​ 창은 암막을 찢고 순식간에 날아갔다. ​ 설표는 기다렸다는 듯 번뜩이는 반응 속도로 날아드는 창을 피하며 뛰어올랐다. 그 움직임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 하지만, 놈이 뛰어오른 그곳에는 이미 내가 있었다. ​ “잘.” ​ 허공에서 쏘아 올려진 내 몸은, 설표와의 거리와 딱 맞아떨어졌다. 내 손끝에서 잿빛 마나가 휘몰아치며 강기를 일으켰다. ​ “왔어!” ​ 일전에 펼치지 못했던, 강기공. 그 잿빛 마나가 응축된 권을 설표의 머리 위로 내려찍었다. ​ -쾅! ​ 강렬한 충격음이 울리며 설표는 눈밭 속으로 그대로 처박혔다. 주변의 눈이 충격파로 휘날리며 바닥이 드러났다. ​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날 놈이 아니다. 놈은 이미 몸을 일으키며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나는 허공에서 소리쳤다. ​ “강아린!” ​ 내 외침이 허공을 가르자, 강아린이 눈밭을 가르며 설표에게로 쇄도했다. 설표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우고 있었다. ​ 그 순간, 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아린의 손바닥이 그 미간에 닿았다. ​ -톡 ​ 정적이 감돌았다. ​ 완벽한 자세의 장이. 놈의 미간에 닿았다. ​ 화려한 마나의 폭발도, 위협적인 굉음도 없었다. 얼핏 보면, 그저 손바닥을 갖다 댄 듯한 느낌. ​ 그러나 나는 허공에서 낙하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야….’ ​ -으드드드득! ​ 설표의 몸이 진동하며 내부에서부터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한 소리였다. ​ ‘암폭(暗爆).’ ​ 나는 그녀의 공격을 지켜봤다. ​ 그녀가 사용한 기술은 마나를 강제로 주입해 적의 내부를 찢어발기고 파괴하는 기술이다. ​ 설표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보며 나는 놈의 죽음을 확신했다. 나는 가볍게 땅으로 착지하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녀는 설표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은 눈을 털고 있었다. ​ “좋은데?” ​ 내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얼굴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 “1등이잖아.” ​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 ​ *** ​ ​ 천지까지의 길을 닦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 영약을 섭취한 나의 컨디션이 예상보다 뛰어나기도 했고, 강아린의 도움도 깔끔했다. ​ 솔직히 말해, 오늘 그녀는 순종적이었다. ​ 늘 주도권을 쥐고 날 부려 먹을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 언제나 만족스러운 전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 우리는 야생에서 멧돼지를 포획해 포식했다. 몇몇 고기는 훈제해 일주일간의 식량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저녁이 되어 산장으로 돌아오자, 창밖으로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수북이 쌓였던 아침과는 전혀 다른 풍경. 이곳의 날씨는 확실히 기형적이었다. ​ 그러다 눈앞이 번쩍했다. ​ -콰과과광! ​ “얼씨구.” ​ 이제는 번개까지 치기 시작한다. 천둥과 번개의 굉음이 멈출 줄 몰랐다. ​ 나는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그곳에는 강아린이 벌벌 떨면서 귀를 막고 있었다. ​ ‘아, 미친.’ ​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강아린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 천둥 번개가 치던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마인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흔한 설정 같지만, 그녀에게 이 기억은 남다른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 따라서 그녀는 천둥소리를 무서워한다. 여기는 귀마개도, 뭣도 없으니 더 심각하다. ​ 훗날 그녀는 그 마인을 직접 찢어 죽이고,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스토리 극 초반에 불과하다. ​ 그 설정을 만든 사람이라는 나라는 사실이 떠올라,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 ‘잠도 못 잘 텐데….’ ​ 내일은 더 높은 곳까지 가야 한다. 그녀가 제대로 쉬지 못하면 탐사에 큰 지장이 생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 “괜찮아?” ​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와 흔들리는 눈빛.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더 위태로워 보였다. ​ 내 안에서 부채감이 묵직하게 스며들었다. ​ 그 순간,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같이 자면 안 돼?” ​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떨리고 있었다. ​ “어?” ​ “그냥… 잠깐만. 옆에 있어 줘.” ​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조용히 말했다. ​ 내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강유성이 마인에게 물들기 전, 그는 그런 방식으로 어린 여동생을 달래주곤 했다. ​ 다 큰 성인인 그녀지만, 상스러운 욕구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 “… 알았어.” ​ 결국, 나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누웠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 -스읍… 흐우우… ​ 그녀가 내 가슴 위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온기와 가까운 거리에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콰과과광!! ​ 다시금 천둥 번개가 쳤다. 그러나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는 데 열중이었다. ​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 “… 괜찮아?” ​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놀란 듯 움찔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바들바들 떨며 내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 그리고는 다시. ​ -흐우우… ​ ‘쯧.’ ​ 아무래도 오늘 편히 잠들기는 글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