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상쾌한 아침이다. ​ 도중에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방해도, 침입자도, 날 막는 요소도 없었다. 그저 완벽한 취침. ​ “… 어?” ​ 그러나 예상과는 별개로, 내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 분명 잠그지 않았나? ​ 분명 걸어 잠그고, 쐐기까지 박아 넣었다. ​ 이걸 대체 어떻게 연 거지? ​ 나는 홀린 듯 침대에서 내려와, 열려 있는 방문으로 나갔다. ​ 시간은 오전 7시. 주말치고는 좀 일찍 일어나긴 했다. ​ 이를 증명하듯, 거실에 깔아놓은 이불 더미 속에서 다른 아이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 대체 어디서 찾았는지 내 옷을 끌어안고 자는 천여울,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자는 하시온, 서로 등을 돌리고 자는 유하나와 강아린까지. ​ 옹기종기 다 같이 모여서 자는게 자못 귀엽긴 하다. ​ 그런데 한 명이 없다. ​ “?” ​ 나는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주방 앞 식탁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는 윤채하를 발견했다. 그녀는 워치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듯 재빠르게 뒤로 숨겼다. ​ “뭐해?” ​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딱 보아하니 잠금장치를 해제한 건 윤채하인 것 같은데. ​ 그녀는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 눈도 못 마주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테이블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 “너 뭐 했어?” ​ 뭔가 반응이 수상한데…. ​ “아니! 아무것도 못 봤어!” ​ 뭘 못 봐. ​ 나는 뭘 봤냐고 물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 있었다. ​ 나는 그녀의 이마로 손을 가져가 딱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 그러자 윤채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약간 주사 맞기 전 움찔거리는 어린이 같은 느낌으로. ​ “…….” ​ “……?’ ​ 귀엽네. ​ - 스윽 ​ 나는 그녀의 이마를 때리는 대신, 부드럽게 한번 쓸어주고는 손을 뗐다. ​ “아….” ​ 윤채하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작고 나른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 모습이 귀여워 볼도 한 번 쓰다듬어줬다. ​ 이상하게 저번 울음 사건 이후, 윤채하에게 못되게 굴지를 못하겠다. 살짝 챙겨주고 싶달까. ​ 뭐 별짓이야 했겠어? ​ 따라서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 그리고는 얼굴을 붉힌 채 나를 올려다보는 윤채하에게 말했다. ​ “쟤네 슬슬 깨워줄래?” ​ “어?” ​ 밥 먹어야지.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며 주방으로 향했다. 어젯밤, 그녀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 솜씨를 발휘할 시간이었다. ​ ​ ​ ​ ​ *** ​ ​ ​ ​ ​ 전 학기의 기숙사에서는 뭔가를 ‘해’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방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냉장고가 넓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 따라서 학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온의 학식이 잘 나오는 편이라 망정이지. ​ 그러나 지금의 기숙사는 다르다. ​ 거대한 냉장고와 최신식 조리기구까지. 따라서 나는 갖가지 식자재를 구비했다. 뭔가 직접 해 먹는 걸 원래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 나는 냉장고를 열어 쓸만한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 양파랑… 호박 정도? 간단한 찌개라도 끓일 생각이었다. ​ “우으응….” ​ 그때였다. 등 뒤에서,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 “일어났어?” ​ “으응… 뭐 해줄 거야…?” ​ 목소리를 들어보니 강아린이었다. 문제는 나는 잠옷으로 입는 얇은 반팔 티셔츠 한장만을 입은 상태다는 것. 그리고 그녀 역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잠옷 차림이라는 점. ​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 등에 전부 닿아, 그 형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손에 든 양파를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강아린이 된장찌개를 먹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았다. ​ “오믈렛. 먹을래?” ​ “응 좋아….” ​ 내 말에, 그녀는 대답과 함께 내 허리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어깨에 턱을 기댔다. ​ “흐우….” ​ 그리고는, 막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남은 한 손을 등 뒤로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간질였다. ​ “아… 아….” ​ 강아린의 입에서, 간지러움을 참는 듯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이 움찔하며, 더욱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손을 뗐다. ​ “자, 이제 칼질해야 하니까. 위험해.” ​ “네에….” ​ 내 말에, 그녀는 아쉽다는 듯이 내 등에서 얼굴을 비비적거리더니 이내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나는 새로 장만한 칼을 들어 보였다. 어제 가온의 비고에서 발견한, 장인이 만든 명품 식칼이었다. 나는 이것마저 몰래 훔쳐왔다. 내가 필요한데 뭐. 서늘한 빛이 주방 조명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걸 본 윤채하가, 옆에서 턱을 괸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 저것보다 긴 것 같은···?" "응? 뭐라고 했어?" "어?! 아니, 그냥, 크고 멋있다고!!" 얼굴은 새빨개져서는.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무시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크게 어려울 것은 없다. ​ 고작해야 6인분. 뱅퀴셔 숙소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식사를 만든 적도 있었다. ​ 3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 어느새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나는 여섯 개의 오믈렛을 완벽한 모양으로 만들어 접시에 올려놨다.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믈렛이 6그릇이나 나왔다. ​ “맛있게 먹어.” ​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처럼 모여든 아이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퍼먹기 시작했다. ​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 유하나의 감탄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접시에 코를 막을 정도로 집중하며 먹기 시작했다. ​ 좋아해 주니 기분이 좋다. 나도 한 숟갈 크게 퍼 먹으려던 그때. 맞은편에 앉은 천여울이 오믈렛을 음미하더니,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 “난… 나중에 결혼하면 요리 안 해도 되겠당.” ​ 나는 무심하게 오믈렛을 씹으며 답했다. “나는 요리 잘하는 여자가 좋던데.” ​ - 탁. ​ 그러자 천여울이 숟가락을 탁하고 떨어트렸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 “나… 요리 잘해….” ​ 천여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 “진짜로?” ​ “…….” ​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 천여울의 요리 실력은 재앙 그 자체다. 내가 정확히 알고 있다. ​ 그녀는 혼자서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 아주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 ​ ​ ​ ​ ​ ​ ​ *** ​ ​ ​ ​ ​ ​ - 쾅. ​ 마지막으로 천여울까지 내보내고 문을 닫자, 마침내 펜트하우스에 정적이 찾아왔다. ​ 나는 쇼파에 앉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안 나가려는 등쌀을 거의 강제로 떠밀어 내보냈다. ​ ​ ‘에에에….’ ​ 어차피, 또 밤중에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올 거면서 아쉬운 척하기는. ​ 이제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 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학기 중이긴 하나, 임무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중간고사 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는다. 시간 이용만 잘하면, 여러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 크게 보면 두 가지 정도가 있겠다. ​ 우선 첫 번째. 내 편린의 확장 권능 개방. ​ 아… 이게 참. 어느 정도 갈피는 잡은 것 같기도 한데. 결정적으로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다. ​ 이건 억지로 훈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 그래서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고, 지금 뭔가 더 할 것은 없어 보였다. ​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번째, 편린의 빠른 수급. ​ 원래는 다음 방학에나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바티칸에서 얻은 정보. 악신의 인지 범위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는 것. ​ 편린은 단순한 성장 재료가 아니다. 최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전략 자원이자, 핵심 요소였다. ​ 그럼 실질적으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편린의 수급이겠다. ​ 그리고, 며칠 전 강아린을 통해 들려온 하나의 큰 소식이 있다. ​ ‘펜타곤이 연구를 중단했다.’ ​ 연구 과정에서 발생한 통제 불가능한 변수 때문이라고 했다. 편린이야 워낙 불안정한 물질이기에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 이로써 나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생겼다. ​ 나는 워치의 세계지도를 크게 확대했다. ​ 지도에는 이미 발간색 마커가 두 개 꽂혀 있었다. ​ 첫 번째는 중국의 후난성. 유하나의 편린이 잠든 곳. ​ 그리고 두 번째, 미국의 펜타곤. 강아린의 편린이 잠든 곳. 원래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던 곳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불가람의 계승자라는 나의 입지와, 영광 그룹의 후계자인 강아린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그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도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 그러나…. ​ 나는 펜타곤의 마커를 손가락으로 지웠다. ​ 그래도 여기가 낫겠다. ​ 지금 당장 미국과의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도 피곤해질 수 있다. ​ 그들은 분명, 편린에 대한 접근을 허가하는 대가로 내게 여러 가지의 것을 요구할 것이다. ​ 무엇보다, 유하나의 편린은 지금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산속에서 잠들어 있다. ​ 그 말인즉슨, 내가 가면 쉬이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 ‘위험하다.’ ​ 마인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편린의 존재가 들통난 시점에서 빠르게 가야 하는 곳이었다. ​ 물론 아직 시간적 여유는 조금 있을 것이다. 악신의 세력은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쉽게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 나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편린을 습득하면 될 듯했다. ​ 그래도 이걸로 우선순위는 명확해졌다. ​ ‘후난성.’ ​ 내 다음 목적지가 될 곳이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