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윤채하는 어두운 공동에 서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서서히 시야가 돌아온다. ​ 내가 공방에 처음으로 입장했던 장소, 거기 맞다. ​ “협회장님! 입구가 열렸…?” ​ 입구를 지키던 협회 직원이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들더니,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 그의 눈동자가 데굴, 하며 내 옆의 여성을 향해 옮겨갔다. 그야, 입장할 때는 나 한명이었으니까. ​ 윤채하. ​ 낯선 공간임에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때, 눈앞의 직원이 윤채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 “… 불가람님?” ​ “아니구요.” ​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일단 틀어막았다. ​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 나는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 ​ ​ ​ *** ​ ​ ​ ​ 정신이, 정신이 하나도 없다. ​ 윤채하와 나는 협회의 최고 등급 조사실로 이동했다. 물론, 말이 이동이지 상당히 귀중한 대접이다. 푹신한 가죽 의자와 고급스러운 조명, VIP 응접실이라 봐도 무방한 장소다. ​ 의자가 너무 푹신해서 긴장을 놓으면 바로 자버릴 것 같다. 워낙, 몸도 피로한 상태라. ​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덕분에 직원들은 야근하게 생겼다. 앉아서 대기하던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 “먼저… 정해인 영웅님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 도착한 협회 담당자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피로가 깊이 깃든 얼굴이었다. 눈 밑엔 다크서클이 비친다. ​ “협회장님이 빠르게 오고 계십니다. 자택에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 “네.” ​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담당자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 “현재 시각, 오후 여덟 시. 공방 시련 종료가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직 저희 시스템에는 별도의 메세지가 표기되지 않고 있습니다.” ​ 말끝을 흐리며, 담당자는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실패한 전례가 너무 많았고, 나도 예외는 아닐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 “혹시… 성공 여부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으실지….” ​ 그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나를 바라봤다. ​ 아직 성공을 알리는 메세지는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묻는 행위 자체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 나는 담담히 답했다. ​ “성공했습니다.” ​ “네?” ​ “아, 맞다. 얘도요.” ​ - 꼬집. ​ 나는 말끝에 손을 들어,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윤채하의 볼을 꼬집었다. ​ “으에ㅡㅡ.” ​ 그녀는 잠에서 깼는지 웅얼거렸다. ​ 소파에 등을 기대고 그새 잠에 들려 하는 것 같길래 바로 깨웠다. ​ “일어나.” ​ 아까부터 담당자가 그녀를 슬쩍슬쩍 힐끔거리던 게 보여서, 내가 그냥 미리 설명해줬다. 정체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니까. ​ “예? 옆에 계신 분도… 말입니까?” ​ “네. 얘도 불가람 님이 직접 지목해서 불렀어요.” ​ 담당자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아직까지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 이해한다. 전례 자체가 없는 일이었으니. 불가람 공방의 시련은 지금껏 늘 단독 수행. ​ 그런데 입장할 때는 한 명, 나올 때는 두 명이다? ​ 직원은 연신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표정은 공허하다. 당연히 메뉴얼에는 없을 것이다. ​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담당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며 동시에 문 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 문이 찰칵하고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 “…….” 윤채하는 눈을 비비며 다시 나에게 기대왔다. ​ 그리고 이번에는 즉시 문이 다시 열렸다. 협회장이었다. ​ “… 해인 군은 정말 나를 많이 놀라게 하는군.” ​ 그는 손을 내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 “우선, 정해인 영웅, 그리고 윤채하 영웅. 모두 축하하네. 역사에 남을 기록을 새겼어.” ​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하지만 협회장의 시선은 여전히 내 옆, 윤채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눈빛에는 당혹감과 의문이 섞여 있었다. ​ “친구입니다.”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얘도 초대를 받았네요.” ​ 뭔가 더 설명하려다가 말았다. 애초에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이게 끝이다. 갑자기 불가람이 윤채하의 방으로 텔레포트를 시켰으니까. ​ “… 허, 뭐 그분이야 워낙 예측 불가능한 불같은 분이시니.” ​ 협회장이 납득한 듯 조용히 웃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장은 한동안 턱을 쓰다듬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시련을 통해 얻은 것은 혹시 무엇인가?” ​ 이번에도 나는 담담히 답했다. ​ “무형의 유산입니다.” ​ “무형…이라….” ​ 그가 되묻는 사이, 나는 창을 대뜸 꺼내 보였다. ​ 검은 천에 감싸 두었던 그것. 금색 음각으로 새겨진 창신이 방 안의 조명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 협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 “… 아름답군.” ​ 나는 창을 다시 덮었다. ​ “저는 제 무구에 불가람 님의 손길을 받았고, 윤채하는 무형의 유산을 얻었습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가….” ​ “이해하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도 이미 충분해.” ​ 협회장은 미소 지으며 우리 둘을 바라봤다. ​ “많이 피로하겠군.” 그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푹 쉬게나. 조만간 기자회견을 잡….” ​ 그때였다. ​ - 띠링. [불가람(不伽藍)의 공방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들을 맞이한다.] [계승의 불씨. 연대의 증표를 가진 자들에게 찬사를.] ​ ​ 금빛 문장이 공중에 겹겹이 떠올랐다. 조용했던 방 안에,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 와아아아아!! ​ 응접실 바깥에서 협회 직원들이 내는 함성이 새어 들어왔다. ​ 나를 비롯한 모두의 눈앞에 시스템 메세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 “허허….” ​ 협회장이 멈춰 선 채 머쓱하게 웃었다. ​ “아무래도 바로 준비해야겠구먼.” ​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워치를 꺼내 들었다. ​ “정해인 군.” 그가 다시 말했다. ​ “아무래도, 쉬지는 못할 것 같네.” ​ ​ ​ ​ ​ ​ *** ​ ​ 결국 우리는 한숨도 쉬지 못하게 됐다. ​ 빈말로도, 나와 윤채하의 상태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 바깥에서는 고작 하루 남짓이지만, 안에서는 거의 몇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까. 몰골이 거지 같을 수밖에 없었지만…. ​ 협회장은 그런 몰골을 보고선, 오히려 좋아했다. ​ ‘오히려 그편이 낫겠어.’ ​ 결국 그는 이해 못 할 소리를 남기고는 먼저 내려갔다. ​ 어쨌든 나와 윤채하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협회의 로비에 도착했다. 오늘 기자회견은 이곳에서 진행된다. 힘들다는 핑계를 삼아, 약식으로. ​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 '무슨 카메라가….' ​ 수십 개의 렌즈가 일제히 이쪽을 향해 돌아간다. 없던 울렁증도 생길 정도다. 이렇게 많을 이유가 있나. ​ 이미 기자들은 협회의 보도자료를 받아든 상태였다. ​ 우리는 무대 위에 올랐다. 정확히는 협회장이 먼저 자리를 잡고, 우리를 가볍게 안내했다. ​ 어차피 옆에는 협회장이 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천천히, 질문은 시작됐다. 질문과 답변은 기본적으로 협회장이 진행한다. ​ 답할 수 없는 것과 잘 모르는 것 정도만 내가. "시작하죠." 협회장의 선언과 함께,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내 질문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 “정해인 군! 대한민국 두 번째 불가람의 시련 통과자입니다! 실질적인 첫 번째라는 분석도 있는데요. 혹시, 이번에 얻은 보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협회장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 “불가람님의 의지에 따라 전해진 무형의 자산입니다.” ​ 기자 중 하나가 다시 묻는다. ​ “자세한 설명은 어려울까요?” ​ “어렵습니다.” ​ 협회장은 단칼에 쳐냈다. ​ 당연히 안되지. 이 방송은 아마, 마인도 보고 있을 것이다. ​ 다음 질문은 빠르게 이어졌다. ​ “시스템 메시지에 따르면 공방이 ‘새로운 주인들’을 맞이했다고 했습니다. 혹시 뒤에 계신 여성분이… ?” ​ 협회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윤채하 영웅은 불가람님의 직접적인 지목에 따라, 공방에 입장했고, 계승의 증표를 받았습니다.” ​ 플래시가 번쩍였다. 순간, 기자 몇 명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결국 노골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 “두 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 이번엔 내가 직접 답했다. ​ “친구 사이입니다.” ​ 그 한마디로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사진기자들이 다시 셔터를 갈기기 시작했다. 이유가 뭔가 했더니, 윤채하가 갑자기 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뭐야?’ ​ 얘 왜 이래. ​ 그러더니, 내 손에서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 윤채하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 “친구 아닙니다.” ​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내 손에 쥐여줬다. 말없이, 아주 평온한 얼굴로 ​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지금 뭔 짓을 한 건지는 알까? ​ “잠깐만요, 그러니까….” ​ 그러나 기자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대응 다운 대응을 하기도 전에 질문은 계속됐다. 향후 진로 계획, 훈련 재개 시점, 차기 행보에 대한 기대감. ​ 결국 해명하는 건 포기했다. ​ 사실, 이 회견의 목적은 하나였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 ​ 내 영웅적인 입지를 올려두는 것. ​ 그런데, 슬슬 피로감이 몰려온다. 공방에 있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쌓였던 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윤채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인터뷰를 마치고자 했다. ​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질문이 들어왔다. ​ “해외 길드와 단체들이 벌써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질 텐데, 혹시 어떤 대응을….” ​ 나는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조금 갸웃하며 말했다. ​ “예? 오지 말라 하세요.” ​ 기자단이 술렁였다. ​ “어차피 안 갈 거니까요.” ​ 나는 마무리하듯 덧붙였다. 그 말에 기자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 나는 잠깐 시선을 들었다. ​ 조명이 눈을 찌른다. 얼른, 이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 “이걸로 마무리하죠.” ​ 협회장의 마무리 멘트가 떨어졌고, 회견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기자회견이 끝나자, 우리는 정리된 경호 라인을 따라 리무진에 탑승했다. ​ 협회장이 직접 리무진 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 “수고 많았네.” ​ 윤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 타자마자 내 무릎에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숨을 쉬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 그 모습을 본 협회장은 리무진 문을 닫기 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해인 군, 혹시 애인 있나?” ​ 뜻밖의 질문이었다. ​ “없습니다.” ​ 협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다행이군. 오늘 정말 고생했네. 그리고 축하하네.” ​ 그는 문을 닫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다행이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너무 피로했다. ​ 차가 조용히 도로를 달린다. 윤채하는 여전히 고요하다. 내 무릎에 머리를 박은 채 숨만 규칙적으로 쉬고 있다. ​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의 워치를 켰다. ​ ‘지금쯤이면….’ ​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벌써 관련 기사들이 메인에 줄지어, 나와 윤채하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 “…?” ​ 그런데 문제는, 그게 시사나 이슈 탭이 아니라는 거다. 연예 탭이었다. ​ 기사의 첫 제목부터 가관이다. ​ [불가람 공방의 계승자들, 연인 사이?] [“친구입니다.” 그리고 “친구 아닙니다.” 상반된 입장?] [들어 갈 때는 혼자, 나올 때는 둘? 묘한 기류… 내부에서 로맨스 있었나] ​ 나는 화면을 내리다 말고, 워치를 꺼버렸다. ​ “아.” ​ 그제야 협회장이 내게 차 타기 전에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너무 피곤해서, 그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 인제 와서 돌이켜보니…. “하….” - 꽈아아악. ​ 나는 그대로 잠든 윤채하의 양 볼을 잡아당겼다. 도망도 못 가게 양손으로 양쪽을 동시에, 정성껏. ​ 말랑 쫄깃한 감촉이 손에 가득 차오른다. 기분은 좋은데,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는 아니었다. ​ “에….” ​ 눈도 못 뜬 채로 뭘 중얼거린다. ​ “이 금쪽아….” ​ 윤채하의 볼에 남은 손자국이 붉게 올라왔다. ​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