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너는 안 본 사이에 키가 엄청 컸구나?”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도 전이니까요.” 제리의 말에 아델리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현재 우리는 여관홀에 머무는 중이었는데, 나는 우선 방음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잘 작동 중이었다. 덕분에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대충 무슨 소란이냐면. “대스승 아델리안 크로프트다! 세상에!” 그래, 이런 소란 말이다. 나는 페란트를 흘긋 봤다. 페란트는 입을 가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동경하던 사람을 만난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광 많이 했으면 슬슬 집에 가라 페란트야. 아델리안이 말했다. “그래서 제리 너는 아직도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중이니?”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럼 제가 스승님을 버리기라도 하겠습니까.” “아니 뭐 사실 스승으로 모시는 건 상관없지. 그런데 막 나를 신처럼 떠받드냐고.” “신은 과장이 조금 들어갔군요. 다만 스승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 건 사실입니다.” “쯧쯧.” 아델리안이 혀를 찬다. 그 안타까움이 가득한 행동에 제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아델리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처럼 오만한 애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거 안 되니까 독립하면 나를 부인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했지.” “걷는 중입니다.” “걷는 중은 무슨. 제리 너는 나를 신처럼 모시겠다면서, 정작 내 말을 안 듣네. 하긴 신의 말을 곡해하는 건 신도의 기본 자질이니까. 제리야 너 그러다가 100년 걸려도 고유 마법 못 얻는다?” “…….” 제리가 입을 다물었다. 스승님에게 오랜만에 혼나니 기분이 남다른 듯했다. 그런 제리에게 아델리안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뭐, 너는 여자에게 두들겨 맞는 걸 좋아하니까. 안 될 거 같긴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입니까 그건.” 나는 제리를 빤히 봤다. 내 시선에 제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톡톡. 누가 나를 건드린다. 크리스였다. 크리스가 속삭였다. “루이나 님. 루이나 님.” “말하세요.” “아델리안 님 최소 300살 이상인데, 20대 초반으로 보여.” “대마법사가 되면 수명을 초월하는 법이에요.” 8위계 마법사의 별명은 반신. 수명쯤은 옛날 옛적에 인간을 벗어났을 것이다. “하여간.” 아델리안이 입술을 뗐다. 고개를 돌려 아델리안과 눈을 마주치자, 아델리안이 말을 뱉었다. “켈튼은 결국 5위계가 된 모양이구나?” “마지막에요.” “마지막이면 죽기 전에? 그러게 제자 좀 진작 받으라니까. 내 제자 놈들은 하나 같이 말을 안 들어 말을.” 아델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턱을 굈다. “켈튼 걔가 마법 재능은 부족하지만 반짝임은 있어서, 제자 하나만 키우면 5위계에 갈 거 같더라고. 그래서 조언도 해줬는데, 기어코 4위계가 되고 나서야 제자를 받았나 보네. 애가 고집이 워낙 강해서 그럴 거 같긴 했어.” “켈튼 님을 잘 아시나 보네요.” “그럼 잘 알지. 내 제자잖아. 너는 스승이 제자를 잊을 거 같아?” 나는 슬쩍 노아를 봤다. 음…. 잊지는 않지. 노아의 마법은 맛있어 보이니까. 나는 아델리안을 찬찬히 살폈다. 이상할 정도로 아델리안은 내 사정을 잘 알았다. 그걸 넘어 켈튼의 사정도 잘 알았다. 혹시 아델리안도 예지 마법을 보유한 건가? “예지 마법은 아니고, 그냥 8위계쯤 되면 못 하는 게 없어지는 것에 더 가깝단다.” “8위계의 별명이 반신인 데는 다 이유가 있네요. 남의 생각도 읽고요.” “천칭이라. 딱 켈튼이 남겼을 법한 마법이네. 걔는 대가에 집착하던 아이니까.” “아델리안 님도 천칭을 아세요?” “아는 사람은 알지. 흐음.” 아델리안이 나를 훑었다. 그 진득한 시선에 내가 눈을 깜빡인 순간이었다. 아델리안이 툭하고 중얼거렸다. “너 3위계지?” “네.” 상대의 정확한 위계는 아무리 고위 마법사라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런 상식도 8위계 대마법사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제자의 제자야.” “말씀하세요.” “오래 살고 싶으면 천칭, 더는 안 쓰는 게 좋을걸?” 여관홀이 침묵에 잠겼다. 여관이 조용해진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진작 방음 마법으로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지금 조용해진 건 내 일행들이었다. 레온, 크리스, 제리, 뮤란, 노아가 멈칫한다. 갑자기 아델리안이 경고를 하니 당황스러운 것이다. 나? 나는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을 더는 쓰지 않는 게 좋다라. “어째서죠?” “과한 재능이 발목을 잡았어. 너의 경우 재능은 아니지만, 상황 자체는 비슷해.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봤어? 지금 네 꼴이 그래. 수많은 마법이 너를 끌어 내려 위로 못 올라가게 할 거야.” “이대로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경지가 안 오른다는 말인가요?” “정확히 이해했네.” “근데 저는 마법만 쓸 수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는데요? 꼭 경지가 안 올라가도 돼요.” “저위 마법사가 고위 마법을 끝없이 수집하는데, 아무 일도 안 생길 거 같아? 그 끝은 파멸이야.” 무려 8위계 대마법사가 건넨 조언이었다. 당연히 타당한 근거가 있었고, 높은 확률로 저 조언을 따르지 않으면 파멸을 맞이할 것이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나는 나직이 거절했다. 그런 내 행동에 아델리안은 평온한 태도로 물었다. “왜? 마법은 좋은 거니까? 마법은 아름답고, 멋있고, 환상적이니까?” “아니요.” 나는 마법을 사랑하지만, 마법이 꼭 저렇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마법은 나를 파멸시킬 수 있다. 그걸 명확히 인지하는 중이었다. 다만. “천칭은, 제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거든요. 제게 해를 끼칠 리 없어요.” “…….” 아델리안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나도 아델리안을 응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아델리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이네.” “그렇죠?” “내가 그걸 간과했네. 너 생각보다 감각이 좋구나?” “재능 있나요?” “재능이 없는데 용케 파악해서 놀랐다는 뜻이었어.” “그럴 수가.” 8위계 대마법사 공인 노재능이라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아델리안이 기지개를 켰다. “내가 켈튼 성격에 진짜 괴상한 제자를 만날 거 같았는데, 내 생각보다 더 괴상한 애를 제자로 받았네.” “스승님의 스승님이 추천해 준 마력 수련법은 애용하고 있어요.” “진짜 기가 막히지? 내가 딱 너 같은 애 제자로 받을 거 같아서 추천한 방법이야.” 덕분에 마법 사용이 편해져 항상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근데 파멸까지는 아니어도 점점 경지를 올리는 게 힘들어질 거야. 이건 괜찮아?” “괜찮아요.” 아쉽지만, 을 사용하는 대가라고 치면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계속 부딪히면 어떻게든 되겠죠.” “긍정적이라 좋네.” “아델리안 님.” “뭐 물어보게? 성배?” “이미 다 아시네요.” 대체 무슨 고유 마법을 보유했길래 저리 다 아는 걸까. 예지는 아니라고 했으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종류의 마법인가? 근데 그런 마법이면 온 세상에 분신을 뿌리고 다니는 게 안 되잖아. 진짜 뭘까. “성배라.” 아델리안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아델리안은 이내 내게 질문했다. “성배의 위치만 알려주면 되니?” “혹시 달라고 하면 주기까지 하나요?” “안 될 거 알면서 되면 좋으니 일단 찔러보는 그 성격, 꽤 마음에 드는구나.” “감사해요.” “미안하지만 주는 건 힘들어. 내가 지금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여유가 안 생기네?” “8위계인데요?” “반대야. 8위계니까 안 생기는 거지.” 8위계의 별명은 반신이다. 반은 필멸자, 반은 초월자. 그리고 바꾸어 말하면 그건 반쯤은 인세의 법칙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됐다. 어쩌면 8위계가 필멸자들의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선, 일정한 제약을 해결해야 되는 걸지도 몰랐다. “제약이라고 하면 거창하지. 네가 뭘 생각하든 그것보다 널널하거든.” “그런데 왜 안 되는 건가요.” “말했잖아. 벌여놓은 게 너무 많아서 거의 한계치라니까.”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는 건가요.” “알잖니.” 제자 육성이 그 정도로 행동치 용량을 많이 차지하는 일이었다고. 하긴, 아델리안은 분신 마법으로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을 동시 육성 중이니까. 납득이 될 것도 같고 안 될 것도 같았다. “그럼 성배의 위치라도 알려주세요.” “성배의 위치만 알려주면 돼? 네 목적은 화상치료 아니니? 나라면 네 화상도 치료해 줄 수 있는데?” “그건 안 돼요.” “왜?” “너무 의리 없잖아요.” 그래도 레온과 크리스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이제와서 나만 빠지는 건 조금. 성배의 위치를 찾을 방법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성배의 위치를 알려준다는데 거기서 대신 화상치료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어.” “다 물어보셨으면 이제 알려주세요. 성배는 어디에 있나요?” “그거 말인데.” “네.” “아무 대가 없이 바로 알려주기는 역시 곤란하지?” “뜸을 이만큼 들여놓고 그렇게 나오신다고요.” 이 스승의 스승. 제자의 제자라고 잘해주는 척하더니, 대가를 받으려고 해?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무슨 대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돈은 아니잖아요.” “당연히 돈은 아니지. 그거 말고 내가 원하는 게 있어.” “어떤 건가요.” 내가 궁금해 묻자, 아델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별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만든 마법을 테스트해 주면 돼.” “어떤 마법인가요.” “어떤 마법? 그렇네.” 아델리안은 볼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다가, 이내 말했다. “마법사 자동 육성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