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라고요.” “엠버 님이에요.” 레온은 묘한 표정으로 엠버를 내려다봤다. 엠버는 무감정한 얼굴로 레온을 올려다봤는데, 그 구도가 꽤 재밌어 나는 크리스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루이나 님? 왜 그래?” “레온 님이랑 엠버 님이요.” “응.” “살짝 그거 같지 않아요? 마왕을 죽이러 가던 길에 갈 곳 없는 어린애를 주운 용사요.” “느낌 있어 느낌 있어.” 크리스가 내 어깨를 마구 두들긴다. 내 말에 공감하는 것이다. 크리스는 추가로 말을 보탰다. “이 경우 레온 님은 엠버 님을 귀찮다는 듯 대하지만, 사실 딸처럼 생각하는 게 맛있어. 엠버 님도 레온 님을 겉으로는 아저씨라 부르지만, 속으로는 아빠라고 생각하고.” “과연 인기 소설 의 작가예요. 맛있는 게 뭔지 아는군요?” “나야 나.” “하아.” 어디선가 한숨이 들렸다면 그건 착각이다. 이 좋은 날 한숨을 쉰다니. 그런 산통을 깨는 인간이 내 파티 멤버 중에 있을 리 없었다. “그렇죠? 레온 님?”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엠버가 뭔지, 왜 내가 불사조의 깃털을 얻으려는지, 불사조의 깃털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전부다. 설명을 들은 레온은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을 감동시킨 자에게 영생의 깃털을 선물하는 건 어떻게 보면 흔한 이야기군요.” “비슷한 예로는 자신을 감동시킨 사람의 마법을 받아 가는 마법사가 있겠네요.” “마법을 주는 게 아니라 빼앗아 가면, 그건 마녀가 아닙니까?” “그래서 제 별명이 마녀잖아요.”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 제시해 주세요.” “저는 가까운 사람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거 같은데, 일단 가까워지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구체적으로는요?” “위기 때 도와준다든가, 같이 온천에 간다든가, 같이 악신의 교단과 싸운다든가, 뭐 이것저것 있지 않습니까.” “그건 구체적이다 못해 너무 지엽적이지 않나요? 뭔가요. 그 특정 인물을 저격한 듯한 사례집은.” 나는 팔짱을 꼈다. 레온의 의견은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적이었지만, 도움이 안 되진 않았다. 확실히 나도 안 친한 사람의 부탁보다는 친한 사람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니까. 예를 들어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잘 안 나는, 미궁부터 마법도시까지 알뜰하게 따라다녔던 페머시기의 부탁보다는 레온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지 않겠는가? 근데 페머시기 걔는 마법 학교에 입학한 걸 분명 봤는데 마주치지를 않네. 나를 피해 다니나? 아님 말고. 친해진다. 그 관점으로 접근하면 레온의 의견 중 쓸만한 게 있었다. 나는 엠버를 번쩍 들었다. 물론 마법으로. 바람 원소에 붙들린 엠버가 축 늘어져 고개를 돌리고, 나는 엠버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저희 친해져 볼까요.” *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대화를 하는 거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사끼리 검을 한 번 맞대보면 실력 파악이 끝나는 것처럼, 나 같은 대화 전문가들은 말 한마디를 섞어보면 모든 게 파악됐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사람의 생각이 반영되는 거라. 주어진 상황에 어떤 말을 고르는지를 잘 관찰하면. 무슨 삶을 살았는지. 무슨 가치관을 지녔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전부. 그렇기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틀렸다. 그 속담을 만든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볼 생각조차 없지 않았을까? 하여간. 얘기가 살짝 돌았는데,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대화는 사람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대화를 꼭 말로만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온천이다!” 크리스가 온천에 뛰어든다. 그러다 요리 주머니가 떨어진다고 주의를 주려 했지만, 그것보다 다른 사람이 달려 나가는 게 빨랐다. [온천이다!] 온천수가 위로 솟구친다. 신나서 수영을 하는 적영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적영 저 녀석. 은근슬쩍 나랑 크리스를 따라 하는데, 저대로 놔둬도 괜찮나 걱정됐다. 이유는 별거 없고, 저러다 나를 따라 해서 나한테 마법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마법은 그 누구에게도 못 줘. 절대. “적영아. 루이나 님의 표정이 이상하지 않아?” [하루이틀 일이 아니잖아.] “하긴. 루이나 님! 뮤란 님! 거기서 뭐해! 얼른 들어와!” “기다리세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로 만들어진 온천 시설이 사방에 늘어서 있고, 시설 중앙에 넓은 온천이 자리 잡았는데, 대체 누가 만든 건지 몰라도 퀄리티가 높았다. 나는 물 원소에서 깨달은 ‘변화’의 특징과 고유 마법 을 응용해 만든 온천수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놀랐다. 온천수가 온천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온천욕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온천수라고 특별한 건 없었다. 온천수는 그냥 뜨겁고 특이한 냄새가 나는 물일 뿐이니까. 오히려 효과만 따지면 가정집에서 목욕물을 준비해 향유를 뿌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온천수는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지 스며드는 느낌이라 해야 되나. 육체를 풀어주는 느낌이라 해야 되나. 아무튼 뭔가 특이했다. 이게 고유 마법까지 사용한 온천수의 힘인가. 하기야. 고유 마법으로 만든 온천수는 어떤 의미에선 최고의 사치품이니까. 효과가 뛰어나도 이상하진 않았다. 나는 온몸을 온천수에 담그고 벽에 몸을 기댔다. 그다음 하늘을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본격적으로 온천욕을 즐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는데, 오랜만에 즐기니 왜 이제야 온천 시설을 만들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좋았다. 이 시설은 철거하지 말고 계속 유지해야겠다. “루이나 님. 기분 좋아 보여.” “기분 좋네요.” 쪼르르 다가온 크리스가 내 왼쪽에 앉았다. 크리스는 나와 마찬가지로 벽에 몸을 기댔는데, 피로가 풀리는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턱을 살짝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적영이 물장구를 치며 온천을 가로지르는 게 시야에 잡혔다. 그 옆에서 엠버가 따라서 물장구를 쳤는데, 나는 순간 찾아온 충동을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엠버 님! 적영! 온천에서 수영하면 다른 사람에게 민폐예요!” “루이나 님? 여기 이용하는 거 우리밖에 없잖아. 다른 사람은 없고.” “아는데 못 참고 말해봤어요.” 실제로 적영과 엠버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수영을 계속했다. …근데 들은 척은 해야 되지 않니 얘들아? 아니라고? 알았어. 찰방. 물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오른쪽. 거기에 뮤란이 조용히 앉았다. 나는 슬쩍 웃었다. “뮤란 님. 이런 파티가 열리면 조용히 구석에만 있을 느낌인데, 의외로 바로 옆에 오네요. 은근 사람이 그립나 봐요?” “…나 갈래.” “자자. 여기 뮤란 님이 좋아하는 벌꿀주가 있어요.” 나는 에서 벌꿀주를 꺼내 뮤란에게 건넸다. 뮤란은 질색하며 벌꿀주를 받았다. “…너는 여기서도 벌꿀주야? 목욕 중에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너무 빨리 도는 거 몰라?” “제 몸은 튼튼해서 괜찮아요.” “…너는 연단 마법을 익혔으니까 괜찮겠지.” 작게 한숨을 쉰 뮤란은 일단 벌꿀주를 한입 마셨다. 마실 거면서 항의하기는. “루이나 님. 나도.” “여기요.” “엘피니엘 남작님. 저도 한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여기요.” 나는 은근슬쩍 끼어든 테리에게도 벌꿀주를 건네고 내 몫의 벌꿀주를 쭈욱—. “루이나. 저도 주세요.” 나는 은근슬쩍 끼어든 8황녀, 타시아에게도 벌꿀주를 건네고 내 몫의 벌꿀주를 쭈욱 들이켰다. 다 같이 모여 온천욕을 하고, 다 같이 술을 마신다? 이 콤보에 당하면 아무리 어색한 사이라도 5분 만에 십년지기 친구가 됐다. “이런 거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진작 좀 만들지.” “플로라 님의 온천을 즐기던 추억이 생각나네요. 저도 성은을 바닥에 깔까요?” “그거 내 눈물 버튼이야…. 잉잉….” 의도치 않게 눈물 버튼을 꾹 눌러버린 나는 이번엔 죽엽청을 꺼내 홀짝였다. 그리고 적영과 수영 시합을 하는 엠버의 모습에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 원래 목적은 엠버랑 친해지는 거 아니었나. 왜 엠버는 저 멀리 있고, 여기서 얘네랑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거지. 뭐,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으니까. 다음을 노리자. * 꺄르륵―. 높은 톤의 웃음소리가 벽을 통과해 허공에 퍼졌다. 레온은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평정심, 평정심, 평정―. ‘루이나 님. 은근 가슴 있다? 의외네?’ ‘서큐버스랑 비교하면 없는 거나 다름없죠.’ ‘그걸 왜 나를 보면서 말해? 나는 서큐버스가 아니라니까?’ ‘당연히 아니겠죠. 서큐버스 퀸이니까요. 그나저나 제 주변 사람들은 다 재능 주머니가 크네요? 뮤란 님도 크고, 테리 님도 크―.’ ……. 레온은 아예 온천수 안에 머리를 담갔다. 그러자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났다. “보기와 다르게 음흉하네. 얌전한 고양이가 더 무섭다더니.” “대놓고 티 내는 고양이보다는 낫습니다.” 레온은 즉시 몸을 일으켜 상대를 노려봤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헤이즈는 레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을 이마에 올렸다. “뭐, 이해는 해. 팔라딘 님이니까. 안 그래도 교국에 묶여 있어 루이나랑 여행 다니기도 힘들잖아? 나는 자유의 몸이라 괜찮지만.” “너무 자유로워서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아, 저번에 날아가셨죠. 죄송합니다. 살살 했어야 됐는데.” “야. 누가 들으면 네가 이기는 줄 알겠다? 우리 동률인 거 명확히 말해라.” “3:2로 전적은 제가 앞섭니다만.” “그건 네가—.” 레온과 헤이즈가 말싸움을 시작한다. 최근 너무 자주 본 광경이었기에 제리는 반응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동시에 제리의 옆에 앉았던 세스도 눈을 감았다. 리치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루이나에게 구원을 받고, 제리의 제자가 된 뒤부터 제리의 행동이라면 뭐든지 따라 하는 세스였다. 동시에 노아는 살짝 동떨어진 곳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동시에 카이렌은 고고하게 옆 온천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페란트가 촐싹대며 웃었다. 동시에 프린드는 무표정으로 턱을 괬다. 동시에. 아카데미의 준교수이자, 어렸을 때 좋아했던 소꿉친구에게 약혼남이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5위계가 된 크로닐 테트리스가 말했다. “여러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크로닐에게 꽂혔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크로닐은 나직이 말을 뱉었다. “이 중에서 루이나 남작님과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