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안티 메이지 갑작스레 나타나 시비를 거는 인물은 미역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청색 마탑의 문장이 그려진 푸른 로브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청색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 나이는 겉보기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마법사를 외형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 생긴 꼬락서니나 말투는 저따위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나이를 먹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하나,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는 것.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말투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을 훑고 지나간 마력이 무척 싸가지가 없다. 마력을 이용한 스캔에도 일종의 매너……뭐랄까, 시선 처리 같은 개념이 존재한다. 가볍게 슬쩍 훑어보는 감지방식, 몰래 들여다보는 감지방식, 그리고 대놓고 품평하듯 뜯어 보는 감지방식. 이 자식의 마력감지는 맨 후자에 속했다. 시선으로 비유하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고 코웃음을 치는 느낌? 상대를 어지간히 얕보거나, 시비를 걸 생각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내가 먼저 물은 것 같은데.” 나는 전방위로 마력을 전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마법사 역시 그물처럼 마력을 전개했다. “그걸 내가 대답까지 해 줘야 하나? 얼치기도 아니고, 척 보면 알 텐데?” 피식 웃으며 양팔을 벌린 마법사. 놈의 한 손에는 길쭉한 완드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내 미스릴 완드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완드다. 그리고 여태까지 만났던 그 어떤 적과도 다른 이 묘한 마력의 전개법- 확실히 대충 짐작은 간다. “여기의 마탑주냐?” “알면서 왜 묻나?” 실로 죽빵 마려운 태도로 대답하는 놈- 청색 마탑의 마탑주는, 가볍게 손짓해 마법진을 띄워 올렸다. 내 마법적 지식은 여전히 일천하지만, 저것들이 모두 공격과 속박 계열의 마법진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최초의 마력 스캔만 해도 물론 그랬지만, 역시 이놈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를 적대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너는 뭐 하는 새끼신가? 이렇게 보여도 나는 아주 당황하고 있단 말이지?” 청색의 마탑주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몇 개의 마법진이 추가로 떠올랐다. “조금 전에 올라온 보고를 듣고, 기특한 것이 다 있다고 생각해서 설레설레 내려와 본 거란 말이야.” “생판 모르는 어린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려 한다니, 거 참 보기 드문 미담이라고.”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찾아왔다는 놈의 기척이 영 이상해서, 눈으로 직접 보러 온 건데.” 떠오른 마법진이 빛나며, 마탑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확 사라졌다. “너, 이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로군……그렇지?” 전개된 마법진이 일제히 가동을 개시한다. 순식간에 소환된 수십 개의 은색 물방울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여럿 꺼내 일제히 마력을 두른다. 내 뒤에는 꼬마 에인이 있다. 마탑주의 공격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피하기보다는 막아야 한다. -쾅! 무거운 충격이 방패 위를 때렸다. ** 마탑주는 고작 18층에 등장하는 NPC라고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왜냐, 애초에 도전자가 싸우라고 만들어진 상대가 아니니까. 단순한 층수 이상의 무력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방패 위로 부딪힌 은색 물방울의 충격을 몸으로 느끼며, 역시 추측한 대로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그렇지만, 이놈도 18층 수준이 아니구만. “어느 세계에서 건너온 거지? 혈사교 놈들의 헛짓거리가 성공한 거라면, 역시 마계 같은 곳인가?” 마탑주는 은색의 물방울을 손짓으로 조작하며 그렇게 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다. 조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묻고 있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혈사교와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보다. 그것 때문에 혈사교랑 엮어서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고. 혈사교와 관계가 있으면서,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다- 당연히 악마나 마족 같은 거로 생각하겠지. “야, 꼬맹이. 이거 잘 갖고 구석에 숨어 있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앞으로 나오면 안 된다.” “진혁악마님, 싸울 거야?” “싸우기 싫은데 싸워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휘말리지 않게 잘 숨어 있고.” 나는 에인에게 방어와 은신 기능이 있는 아이템을 몇 종류 챙겨주고, 검과 방패에 골고루 마력을 둘렀다. 싸우기 싫다고 말한 참이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도 않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는 일단 한 대 패주고 싶었거든. 문제는 상대방이 마법사이기도 해서, 함부로 싸우다가는 에인이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 일단 방어용 아이템을 챙겨주긴 했지만, 저걸로 제대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아스테리오스랑 싸우면서 섬 하나가 개박살났던 걸 생각하면, 마력강화를 키고 뛰어다니기만 해도 위험할 거다. 투척 같은 요란한 전법은 불가능할 거고, 반격 위주로 최대한 간결하게 싸울 필요가 있겠다. “오호라, 꼬마 쪽이 악마 사역자인 건가? 악마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한편 청색 마탑주는 에인의 ‘진혁악마님’ 이라는 호칭을 듣고,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테고, 저 꼬맹이 앞에서 나는 악마가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에인은 내가 악마라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사역자는 무슨, 저건 진짜 무해한 어린애니까 괜히 건들 생각 마시지?” “무해한 어린아이가 너 같은 괴물과 함께 다닐 리가 있나, 웃기는군!” 마탑주가 손짓하자, 거대한 은색 물 덩어리가 출렁이며 나를 향해 쏘아졌다. 청색 마탑에 걸맞은 물 속성 마법, 하지만 다루고 있는 저 물방울은 누가 봐도 물이 아니다. 아마도 액체 금속이나 뭐 그런 거겠지, 색깔과 무게를 보면 수은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려나. 아마도 어딘가의 커뮤니티일 텐데, 수은의 비중은 물의 13배에 달한다고 읽은 기억이 있다. 저 커다란 액체 덩어리는 얼핏 봐도 백 리터는 넘을 것 같은 크기, 수은이라고 생각하면 몇 톤을 훌쩍 넘겠지. 그런 게 유체의 특성을 살린 채로 고속으로 날아든다. 충격량은 교통사고 따위를 아득히 넘을 터. 하지만 강력하기로는 내 방어력 역시 못지않다. -콰앙!! 날아드는 액체금속을 방패를 이용해 정면에서 받아쳤다. 평범한 18층 도전자가 이따위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방어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을 거다. 공격이 재빠르고 정확하기보다는, 한방 한방의 위력이 매우 파괴적인 타입으로 보이는데. 아마 원래대로라면 원거리 포격전이나 기동성을 살려서 싸워야 하는 상대일 거다. “꼬맹아, 괜찮냐?” 나는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에인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에인은 내가 준 아이템을 모두 재빨리 가동하고, 혼자서 나름대로의 마법 방어막까지 쳐 둔 상태였다. “응, 근데 이거 깨졌어.” 하지만 충돌 순간의 충격파가 닿은 모양인지, 방어막에는 흠집이 나 있었다. 역시나. 이 거리라면 내가 마력강화를 켜고 도약하기만 해도 여파에 휩쓸릴 거다. 일이 귀찮아졌네. 그 사이, 액체금속의 덩어리는 이제 원뿔 모양으로 형태를 바꿔서 나한테 쏟아지고 있었다. -쾅! 콰앙! 콰광! 어처구니없는 위력의 액체금속 탄환을 방패로 막아내며, 침착하게 한 걸음씩 전진한다. 젠장, [신속]을 키고 단번에 도약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생고생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괜찮은 부분이 하나 있긴 하다. “뭐냐, 어떻게 이토록 단단하지……?” 내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놈의 표정이, 보고 있자니 아주 재미있다. 분명 마탑주는 매우 강하다. 보통의 18층 도전자는 결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거의 모든 속성의 공격에 내성이 있으며, 마법 내성도 별도로 갖고 있다. 거기에 모든 피해를 60% 감소시키는 [강철의 혼]까지, 나는 마법사 계열의 완벽한 카운터다. 마탑주고 나발이고, 지금의 나를 마법으로 돌파하려면 월드 보스 수준은 기어나와야 할 거다. -쾅! 콰광! 액체금속 세례를 뚫고 마침내 에인이 숨어 있는 자리로부터 거리를 벌려 냈다. [혼신] [신속] 두 가지의 버프를 사용해 단번에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마탑주를 향해 뛰어든다. 점점 긴장으로 굳어가던 마탑주의 표정이 단번에 사색이 되며, 놈의 몸 주변을 액체금속이 감쌌다. 유체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마력을 통해 고정해 둔 액체금속의 방어막, 과연 얼마나 단단할까. 뭐, 사실은 별 관심 없다. 얼마나 단단하건 오러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니까. -푸욱! 얇게 오러를 두른 [강철 직검]이 방어막을 그대로 관통해, 마탑주의 어깨를 찔렀다.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만 하고 끝났겠지만- 넌 싸가지가 없으니 하나 추가해야겠다. [라이트닝 차지] [대전] [약점 간파] “끄아아아악!” 검을 타고 흘러들어 간 번개 속성의 마력이, 마탑주의 전신을 지져버렸다. 역시 물 속성한테는 전기 속성 공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