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탐욕의 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과, 그 마력을 무한에 가깝게 공급하는 세계수. 공격 한방한방이 마력강화를 발동한 내게도 치명적이며, 양심 없는 방어력과 딜레이 없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한다. 시련의 탑이 지랄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만은, 아무리 그래도 이런걸 정공법으로 공략하라고 던져놓았을 리가 없다. 25인 기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내가 9층 평균 도전자보다 스무 배쯤은 더 셀 테니까. -콰광! “크헉!” 왕좌를 파괴하자마자, 엘레노어를 공격하려던 하이엘프 왕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역시, 예상대로 왕좌가 놈의 약점이었다. 마력감지로 살펴보니,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놈이 사방팔방에 펼쳐두었던 마법진도 모두 사라졌고, 숨쉬기도 힘들던 마력의 격류 역시 잠잠해졌다. “케헥.” 그리고 나도 거의 동시에 피를 토했다. 이 한 번으로 왕좌를 파괴하기 위해 너무 몸을 혹사했다. 제대로 맞은 공격은 몇 번 없었지만, 그 몇 번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맞은 부위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시스템상 즉사는 안 하지 참. “엘레노어, 문을!” 메르세데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문을 향해 그림자를 날렸다. -콰광!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산산조각났다. 왕좌를 파괴했으니 이제 문은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은 문보다는 쓰러진 왕의 목을 베어서 마무리 짓고 싶은 타이밍인데-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마력강화가 저절로 해제되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출혈량도 장난이 아니고, 내장도 어떻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때, 갑자기 발밑이 꺼지며 시야가 확 뒤집혔다. “억, 뭐여, 씹.” 다음 순간, 나는 엘레노어의 양팔에 안겨 있었다. 그림자 마법으로 나를 불러온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방법밖에 없었어. 어서 빠져나가자.” “아니, 그보다, 확인 사살!” “저자라면 방금 죽었다. 생명 반응이 완전히 끊겼어.” 그건 나도 안다. 내 마력감지에도 저놈은 죽은 걸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걸로 끝이 아니다. 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고 있다고. -드드득!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꼭 빗나가지 않는다. 각혈하며 쓰러졌던 하이엘프 왕의 몸이 이변을 일으켰다. ** 새까만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왕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검은 가지는 거미의 다리처럼 땅을 짚어, 숨이 끊어진 왕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리석구나.” 무한에 가깝던 마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의 마력이 그 죽은 몸에 흐르고 있다. “왕관만 손에 넣으면……너희에게도 내 대의를 이해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왕좌를 부숴 버리다니.”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미친 마법을 난사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세계수는 별의 지맥을 흡수해 성장하는 나무라고……이 의미를 왜 모른단 말이냐?” “이미 이 별은 글렀단 말이다. 우리 엘프가 태어난 시점에서, 이 별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었어!” “왜 엘프종이 뛰어난 마력 지각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 세계수가 바랐기 때문이다, 마력이 넘치는 새 땅을 찾아내기를!” 우리는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두고,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새 땅을 찾지 못하면 세계수는 끝이다, 세계수가 끝나면 엘프도 끝이다! 우리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엘레노어는 나를 들쳐업고 속도를 냈다.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유지하며 함께 달렸다.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빠르다. 이미 하이엘프 왕이 있던 알현실에서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내가 끝날 줄 알았느냐! 비축해둔 힘은 충분하다, 너희는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야!” 그 때였다. 침입자인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하이엘프 기사들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뭐 하는 놈들이냐!” “비켜라!” “메, 메르세데스 님?” 메르세데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호통치자, 기사들이 당황하며 멈춰 섰다. 추방당한 신세라지만, 과거 하이엘프의 제일 기사였던 배경은 어디 가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그 때, 근처의 벽에서 검은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작살처럼 기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저, 저건 대체……!” 가지에 꿰뚫린 기사들은 잠시 버둥거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어 먼지로 변해버렸다. “왕관을 순순히 넘겼다면, 희생해야 할 생명은 인간족 병사들의 것만으로 충분했으나……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새까만 가지가 왕의 목소리를 담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이미 가지도 뭣도 아니다. 닿는 것의 생명을 무식하게 빨아들이는 괴물의 촉수일 뿐. 우리의 퇴로도 순식간에 검은 가지로 둘러싸여 막히고 말았다. 엘레노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여, 나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어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엘레노어는 우뚝 멈추더니, 메르세데스를 한 손으로 잡고 그림자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분수처럼 솟구친 그림자가 우리를 천장으로 사출해 버렸다. -쾅! 콰광! 콰과광! 몇 겹의 천장을 뚫고,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그 충격이 내 내장을 뒤흔들었다. 그렇잖아도 아작나서 곤죽이 되었던 속이 뒤틀린다.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왔다. “으허억, 컥.” 입에서 거하게 피를 토해내며 바라본 지상은 끔찍했다. 왕성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지는 이제 거대한 파도처럼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엘프들을 모조리 꿰뚫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번식하듯 분열해 점점 더 주변을 덮어 갔다. 그 속도는 산불이 강풍을 업고 번지는 것처럼 빨랐고, 뻗어 나간 가지는 이제 세계수를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를 타고 기어오르는 새까만 가지는, 나무의 양분을 흡수하는 겨우살이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런 얌전한 것보다는- 배배 꼬인 수십만 마리의 뱀이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엘레노어도, 메르세데스도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별을 떠나, 머나먼 땅에 새 엘프의 왕국을 세우겠다. 이제 왕관 따위는 필요 없다.” “세계수와 함께 온전히 떠나고 싶었지만, 왕좌가 부서지고 연결이 망가진 이상-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모두 멸망시켜 세계수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시끄럽다 못해 하늘에 쩌렁쩌렁 울리는 전음, 무수한 가시는 이윽고 하나로 얽혀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세계수에 필적하는 크기로 얽혀 만들어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뱀. [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 새빨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처음 보는 메시지를 띄웠다. 월드 레이드, 공격대, 모르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2661 서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들이었다. 동시에 에픽 퀘스트가 한 번 더 갱신되었고, 거대한 뱀의 이름이 허공에 새겨졌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아집이 만들어낸 괴물, 긴 삶을 살며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운 자.]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끝없이 번식하고 번영하며, 최후의 최후까지 꿈꾸는 자.] [살아있는 욕망의 총체이며,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숨쉬기를 바라는 불꽃. 무엇으로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 거대한 검은 뱀은 그대로 세계수를 밑동부터 갉아먹으며 그 마지막 가지까지 부수어 입 안에 넣었다. 탐욕스럽게 생명의 나무를 먹어치우고,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뱀은-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세상을 삼킬 것이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만 출현하는 초대규모 레이드 대상, 월드 보스로 거듭난 왕이 붉은 눈을 빛냈다.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갱신된 에픽 퀘스트의 내용은 이것이 정말로 최후의 싸움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목표는 지극히 단순했다. 저 뱀을 처치할 것. 7층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참을 이어져 온 다크엘프의 서가 마침내 최종장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