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메르세데스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꼬락서니길래, 대뜸 덤비기보다는 말을 걸어 본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칼빵 한대 놓고 시작할 걸 그랬다. 눈깔이 완전 살인마 눈깔이다. 증오며 분노며 살의며 격한 감정은 죄다 저기에 고여 있다. “네놈이 어떻게, 인간 주제에……역시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그 와중에도 내가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눈깔은 완전 맛이 갔지만, 인지능력이나 이성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아니,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어……!”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성을 포기해 버리는군. 나도 긴장 속에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쿠르릉, 하는 마력강화 특유의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르세데스의 몸에 마력의 빛이 휘감겼다. 예전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마력강화를 쓴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쿠르릉! 나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곧바로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검을 받아내었다. 조건도 동등한 덕분에 제법 잘 받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하긴, 서로 마력강화가 없는 상태에서의 기본 스펙부터 저쪽이 위였으니까. 당연한가. 게다가 템빨인 나와 다르게 마력강화의 수준 자체도 저쪽이 더 높은 것 같다. -콰광! 메르세데스가 내 검을 위로 쳐올림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서로의 마력이 부딪히며 생긴 반발력이 만들어낸 여파다. 마력강화 사용자끼리는 흔한 일이라던가. 검을 쳐낸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카이트 실드 형태를 한 방패의 끄트머리로 내 가슴께를 노렸다. 뾰족한 방패인 만큼 저 공격의 위력은 육중한 도끼질에 가깝다. -콰각! 내 방패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막아낸 뒤, 반댓손의 검을 휘둘러 목을 노린다. 메르세데스는 날밑을 이용해 익숙한 듯 막아냈고, 그대로 손목과 어깨를 놀려 소드 레슬링으로 이어갔다. 근력에 차이가 있는 만큼, 이런 대치가 이어지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 [혼신] 버프를 발동해 근력을 증폭시켜, 억지로 대치 구도를 깨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놀고 있던 다리를 휘둘러, 기습적으로 킥을 날렸지만- 바로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다시 방패를 휘둘러, 뻗어진 내 다리를 그대로 내려찍으려 시도했다. -콰앙! 단순한 공격이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패가 내려찍은 지면이 쩌적, 갈라졌다. 자세가 낮아진 메르세데스를 향해 측면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바로 방패에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거리를 좁혔고,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나도 방패를 이용해 막아낸 뒤, 다시금 이어진 초근접에서의 힘겨루기. “눈깔 봐라.” 여전히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메르세데스에게 한 마디 던져 보았다. “흐으!” 메르세데스는 이를 악문 채 어정쩡한 소리를 뱉으며, 격하게 몸을 비틀어 공격했다.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잘 된 일이다. 저번 결투 때와 비슷하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린 탓에 움직임이 과격하고 단조로워졌다. 이건 무조건 내가 이긴다. ** 나도 7층 때보다 여러모로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메르세데스는 버거운 상대다. 근력과 순발력 양면에서 월등하고, 기본적인 검술 실력도 우위, 마력강화의 숙련도마저 역시 압도적. 하지만 승패는 그런 스펙적인 우월함에서 갈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투 때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졌다. -콰앙! 내 방패에 얼굴 측면을 거하게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 마력강화는 백 퍼센트 아이템에 의존하는 템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월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속력, 내 체력과 지구력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는 싸움이 이어지고 부상이 늘어나며, 점점 마력강화를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현 시점에 이르러서 그 출력은 초반의 절반 정도, 내 제한적 마력강화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스펙이 거의 동등하게 맞춰졌으니, 내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를 추격해 허리춤의 손도끼를 휘둘렀다. “크윽!” 막아내지 못하고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한 메르세데스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내겐 [혼신]과 [약점 간파] 같은 다양한 스킬, 그리고 투척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술이 있다. 거기에 부상을 입으면 더 강해지는 최상급의 전투 지속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메르세데스가 단기 결전으로 끝낼 수 있는 스펙 차이를 갖지 못한 시점에서,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 더러운……더러운 인간 주제에,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악을 쓰고 덤벼드는 이유는 뭘까. “못 죽인다니까.” -콰직! 둔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한쪽 팔을 쳤다. 부러지는 손맛이 있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덤벼들었다. 역시 상태가 이상하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제 몸을 신경 쓰지도 않고 덤벼온다. 처녀 엘프의 귀를 잘라버린다는 게 무척 심한 일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원한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쾅! 발길질로 메르세데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허리부터 나무에 부딪힌 녀석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마나를 전부 다 썼는지 마력강화도 끊겼고, 사지 중 멀쩡한 부위가 한 군데도 없다. 나처럼 재생 능력이나 HP에 따른 시스템의 보정도 없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거다. -드드득, 드득!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부러진 팔 대신 어깨로 몸을 지지하고 억지로 일어섰다. 검을 쥐고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비틀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든다. “아아아아아아!!” 이제는 아예 악쓰며 소리까지 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길질했다. -쿵! 또 한번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는 이마와 무릎으로 땅을 문대가며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지저분해진 얼굴에서 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비탄과 원망. 흙먼지로 칠갑된 메르세데스의 뺨에서는 이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네놈 때문이다, 다 네놈 때문이야……!”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원망받아 보는 건 정말로 처음이다. 솔직히 당황스럽다. 아니, 좀 이유는 말해주고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해일 수도 있잖아. “네놈 때문에, 전하는……!” 오, 마침 맥락을 파악할 키워드가 나왔다. 전하라면 그 하이엘프 왕자 놈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놈에게 딱히 뭔가 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처음 만났을 때 팔을 꺾어버린 거랑, 여자 뒤에 숨느냐고 야유한 것 정도? 이 정도로 원망받을 만큼 거창한 짓은 전혀 안 했다. 귀 자른 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케이, 일단 제압한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자. “좀 자라.” 나는 그대로, 메르세데스의 명치에 플라잉 니킥을 꽂아 기절시켰다. ** 나는 기절시킨 메르세데스를 다크엘프 마을로 끌고 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려면 일단 정신을 차리도록 회복을 시켜야 할 테고,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니까. 정확히는 회복은 시킬 수 있는데, 회복돼서 일어난 이 녀석이 날뛰면 다시 제압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펜던트를 재충전하기 전에는 다시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메르세데스는 침상에 눕혀진 후,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여, 여기는……” “어, 일어났냐.” 정신을 차린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검을 뽑으려 했다. “움직이지 마라, 혹시 또 지랄발광할까 봐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서 마법을 잔뜩 깔아 놨거든.” 당연하지만 검과 갑옷은 싹 다 압수해 놨고, 침상 근처에는 제압용 마법을 잔뜩 깔아 놓은 상태다. 메르세데스는 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죽일까 했는데, 이것저것 궁금한 게 좀 생겨서.” “네놈에게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죽여라.” “안 물어봤는데 니가 먼저 지껄였잖아. 뭔진 모르겠는데, 내 탓이라며?” 아무래도 말실수였는지, 메르세데스는 ‘큿’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붙잡힌 엘프 여기사가 ‘큿, 죽여라’ 라고 하는 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몰랐는데, 예전 그 왕자놈이 왕위를 계승했다며? 네가 말한 전하가 걔 맞지?” “……” “나 때문에 그 전하가 어떻게 된 것처럼 말했잖아, 엘레노어한테 그 얘길 하니까 그러더라고.”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다. “다크엘프에게 선전포고를 한 건 그놈이라고, 엄청 뜬금없고 이상한 타이밍에 싸움을 걸었다던데.” 두 엘프 진영은 8층 시점에서부터 사실상 전쟁 중이었지만, 정말로 전쟁이 선포된 것은 왕이 바뀐 이후라고 들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건 선대 왕이 아니라, 그 어설퍼 보이던 왕자놈이었던거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간의 교류가 끊긴 지도 백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 놈과 약혼 관계로 오래 알고 지냈던 엘레노어의 말에 따르면, 무척 황당했다고. “네 꼬락서니도 어째 좀 이상하고, 너희 쪽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니냐?” 메르세데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막 던져 봤는데,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다. “어디가 내 탓인지, 좀 들어 보자.” 메르세데스도 분명 이 에픽 퀘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