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지 말고 전력을 다해라. 네 모든 걸 쏟아부어.” 뚜두두둑-! 척추와 함께 뽑혀나온 백윤의 머리와 서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텐데, 놓치면 안 되잖아.” 푸욱-! 서준이 뽑았던 머리를 다시 제자리에 쑤셔박았다. 백윤의 몸이 덜덜 떨린다. 꽈앙-! 복부를 걷어차여 날아간 백윤이 희게 질린 낯으로 제 목을 매만졌다. “허억…. 허억….” 쯔르륵-, 뜯겼던 목이며 신경 따위가 혈공의 공능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백서준을 바라보는 백윤의 눈이 덜덜 떨렸다. 살았다. 아니, 놈이 일부러 살렸다. 진혈, 그에 더불어 놈이 스스로의 혈공으로 혹여나 숨이 끊어지지 않게끔 붙들었다. “그륵….” 아직 채 붙지 않은 목에서 공기가 새어나온다. 백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뭐였던 거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백윤과 능월의 시선에 서준이 눈썹을 까딱였다. “뭐 하나? 안 덤비고.” 서준은 스스로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힘의 격류를 차분히 다스렸다. 남궁일맥지간 화위참천거수(南宮一脈之幹 化爲參天巨樹). 남궁일맥을 통해 붙잡은 깨달음은 별게 아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여러 경지. 화경, 극마, 기신경, 화마경. 그것들은 하나의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다. 기둥이 되는 줄기는 이서준이라는 존재 자체. 그 본질을 잊지 않으면 경지 따위는 발 딛고 설 발판에 불과하다. 물론 네 경지를 동시에 이루었다고 네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허나 각각의 경지에는 상응하는 공능이 존재한다. 화경의 경우 신의 비대를 통해 주변 공간을 정과 기로 삼아 영역을 펼쳐내고, 극마의 경우 마로 물들인 정기신을 한데 뭉쳐 폭발적인 출력을 가진다. 화마경의 경우 다른 경지와 어우러지기 쉬우며, 또한 존재 자체를 마로 물들이기에 한 발 더 마에 가까운 존재로 나아간다. 그리고 기신경. 미완성이었던 이 경지는 남궁일맥의 깨달음과 함께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졌다. 그 본질은 기의 비대를 통해 정과 신의 연결을 견고히 하는 것. 그로 인해 초월적인 반사신경과 속도를 얻을 수 있으나, 그 대가로 존재 자체가 기에 가까워져 서서히 자연에 환원된다. 서준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남궁일맥의 거목에서 찾았다. 이미 이룬 세 개의 경지. 이전에 비해 확고해진 스스로의 존재. 그것들로 하여금 자의식을 붙잡고, 이서준이라는 존재의 뿌리를 하계에 내려 굳건히 자리한다. 그리 네 경지를 동시에 성취하니 각각의 경지가 조화를 이룸이라. 서준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조금 더 높은 차원에 발을 내디뎠음을 깨달았다. 뇌리를 불사르는 전능감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부담이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최소한 저 둘을 가지고 놀 시간은 충분하다. 서준은 비대해진 기와 신을 의식하며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하늘에 뜬 태양과 달. 비로소 완전해진 일월이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역천일월공(逆天日月功).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거대한 기둥에 능월의 표정이 굳었다. “백윤…!” 능월은 크게 외치며 창을 힘껏 당겼다. 모든 근육과 내공, 발끝에서부터 이는 회전, 이어붙여 담아낸 창끝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쩌어어어억──────────!! 혼신의 힘을 담은 창과,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역천일월공이 서로를 밀어낸다. 능월은 터져나가는 신체를 혈공을 통해 복구하며 한 발짝 나아갔다. “흐아아아아…!!” 화악-! 밀어낸 창끝이 역천일월공을 흩어낸다. “크웁…!” 울컥-! 피를 토해낸 능월이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백윤! 이대로 죽을 셈이냐!”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백윤을 후려쳤다. 정신을 차린 백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잇사이로 핏줄기가 새어나온다. 비틀대며 일으킨 몸이 자연스레 기수식을 취하고, 백윤은 눈앞의 적을 보았다. “너는 누구냐….” 쩌저적-! 백윤의 숨결이 붉게 얼어붙으며 그의 몸을 감싼다. 붉은 갑주를 입은 백윤의 손아귀 위로 하나의 구체가 떠올랐다. 혈빙옥. 백서준이 그랬듯 오묘한 분홍색을 띤 구체다. “너 같은 놈이 빙궁 소속일 리가 없다.” 하나의 혈빙옥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움켜쥔 백윤이 이를 드러냈다. 빙공과 혈공, 마기, 해와 달, 그리고 영역. 어지러이 얽힌 정보 속 그나마 현실성 있는 정보만을 골라낸다. 일월마공(日月魔功).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다룬다는 마교의 신공. 떠올림과 동시에 부정했다. 그렇다면 저 영역은? 극마의 무인이 영역을 펼칠 수 있는가? ‘아니.’ 백윤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을 거세게 치워냈다. 중요한 것은 놈의 정체가 아니다. 어찌 됐건 놈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모든 정신을 한데 모아 일념으로 가다듬는다. “…너를 죽이고, 나는 벽을 넘어선다.” 찌이잉-! 움켜쥔 혈빙옥이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낸다. 백윤의 눈이 푸르게 번뜩였다. 퓻-! 두 개의 혈빙옥이 서준을 향해 쏘아졌다. 일전의 혈빙옥에 비해 확연히 높아진 완성도. 백윤의 재능을 방증하는 증거였으나, 벽이 너무 높았다. 화악-! 서준의 근처에 다다른 혈빙옥이 흩어진다. 오묘한 분홍빛이 안개처럼 서준의 주변을 맴돈다. 백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쿵-!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서준의 손이 날아든다. 터무니없는 속도. 알아차렸을 때는 코앞까지 다다랐다. 콰악-! 가까스로 피해낸 백윤의 측두부 한 쪽이 깎여나갔다. 붉은 피가 흩날린다. 백윤의 눈이 번뜩였다. 혈공. 피를 다루는 무공이 흩어지는 핏방울들을 붙잡는다. 쩌억-! 빙공이 핏방울을 얼렸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수백의 핏빛 송곳. 화경의 무인이 스스로의 일부로 빚어낸 무구는 신병이기조차 뛰어넘는다. “흡…!” 피와 얼음. 혈공과 빙공. 아득한 벽에 가로막힌 절망과 넘고자 하는 의념. 초월적인 의지에 힘이 깃들고, 뿌옇게 물든 송곳들이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어 아득한 속도로 쏘아졌다. 쉬쉬쉬쉭-! 송곳들이 서준의 신형을 꿰뚫는다. 백윤은 환호하지 못했다. 꿰뚫린 서준의 신형이 흩어진다. ‘이형환위…!’ 재빨리 몸을 돌렸다. 눈앞이 캄캄하다. 그것이 발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꽈아아아앙────────!! 백윤의 머리가 뒤로 크게 튕겨나갔다. 쯔즉, 뜯겨나가려는 목을 붙잡은 백윤이 몸을 숙였다. 쐐액-! 뒤편에서 튀어나온 능월의 창이 허공을 가른다. 능월은 아쉬워하는 대신 그 회전을 이용해 몸을 비틀었다. 서준이 그를 보았다. 툭, 가벼운 발짓. 땅에서 솟구친 새카만 불꽃이 능월의 몸을 뒤덮었다. “흐…!” 불꽃에 감싸인 능월은 허공을 박찼다. 화악-! 갈라지는 불꽃 사이로 서준의 모습이 보인다. 얼어가는 몸. 뻑뻑한 손가락이 창을 움켜쥐고, 수백 년간 익혀온 창술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파악-! 서준이 고개를 틀었다. 창이 그의 머리칼을 스친다. 능월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섰다. “흐아아아아…!!” 눈앞에서 빛이 번쩍인다. 따스한 달빛. 빛이 된 몸. 정신은 앞으로 나아간다. 뜻이 닿는 곳에 창이 자리하고, 어우러진 달빛이 수천의 창격을 자아낸다. 쐐애애애액────────!! 덮쳐오는 빛의 그물. 서준은 오히려 파고들었다. 투둑, 손으로 쳐내 창을 밀어내고, 빈틈으로 욱여넣은 몸을 단번에 펼쳐낸다. 핏-! 날아든 몸이 백윤의 눈앞에 다다랐다. 백윤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손을 내밀었다. 그곳에 맺힌 것은 오묘한 분홍빛의 강기. 서준이 입꼬리를 찢어올리며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콰악-! 서로의 손이 얽힌다. 백윤의 강기는 서준을 상처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강기를 흡수한 서준이 그의 팔을 거세게 당겼다. 우두둑-! “아악…!” 백윤의 팔이 뜯겨나온다. 서준은 뽑아낸 팔을 창처럼 쥐었다. 콰륵-! 일어난 혈공이 팔에 담긴 혈액을 회전시킨다. 우두둑-! 뼈와 살이 핏물에 잠기며 길쭉한 형상을 취했다. 서준은 붉은 창이 된 그것을 손에 쥐었다. 동시에 발을 크게 내디뎠다. 쿠웅-! 축이 되는 왼발. 비틀었던 전신을 단번에 풀어내며, 힘껏 당긴 오른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 투창이 세계에 붉은 궤적을 아로새긴다. 터무니없는 속도. 본능이 능월의 목숨을 구했다. “크윽…!” 꽈앙-! 능월이 반사적으로 창을 올려쳤다. 투창을 막아낸 창이 크게 휘어진다. 서준은 예상한 듯 무심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화경의 신체로 이루어진 무구는 신병이기조차 뛰어넘는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쩌어어어억──────────!! 피로 된 창이 터져나가며 능월의 몸을 얼려낸다. 화륵-! 남아있던 새카만 불꽃이 그 위로 번졌다. 눈을 부릅 뜬 능월이 전신의 내공을 터뜨렸다. 화악-! 터져나온 기파가 불꽃을 걷어낸다. 허억…. 허억…. 크게 지친 능월이 허리를 굽힌 채 서준을 보았다. 그의 호흡에는 약간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괴물 같은 놈….’ 이어 백윤의 모습을 살핀 능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백윤의 몸을 뒤덮었던 붉은 갑주는 산산이 조각났고, 뜯겨나간 왼팔은 재생할 기미가 없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한 줄기 투지뿐. 이를 드러낸 백윤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으아아아아…!!” 경지를 넘어선 초인의 포효에 주변 공간이 몸부림친다. 백윤이 푸른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나는…!” “아니.” 어느새 백윤의 목을 움켜쥔 서준이 그를 비웃었다. “흥이 깨졌어.” 퍼어억-! 백윤의 사지가 터져나간다. 내부의 혈액이 칼날처럼 회전하며 그의 몸뚱이를 갈아냈다. “끄으윽…!” “슬슬 멸신회에 대해 듣고 싶은데.” “백윤…!” 능월이 급히 달려들었으나, 이미 너무 지쳤다. 상처 사이로 스며든 서준의 내공을 몰아낼 여력조차 없었다. 쩌어억-! 능월의 몸에 남은 내공이 얼어붙으며 상처가 터져나간다. “끄아아…!” 콰가각-! 날카롭게 솟은 얼음 기둥들이 능월의 몸을 꿰뚫어 고정했다. 그의 몸뚱이가 십자가에 내걸린 듯 공중에 떠 덜렁였다. 고통에 신음하던 능월은 문득 소름끼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까드득-! 까드득-! 묘한 소리. 백윤과 능월의 주위로 군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리들이 이를 갈아댄다. “미치겠군….” 저것들의 용도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에게 잡아먹힌다. 포식자에게 사냥당한 피식자의 말로는 뻔하다. 허나 능월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능월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사지말단에서부터 그의 몸이 얼어간다. 그를 일별한 서준이 몸통만 남은 백윤을 보았다. “그래서, 맨정신에 얘기해 줄 생각은 있나?” 백윤은 혈인경의 무인이다. 화경에 비견되는 수준의 강자라는 뜻이다. 최소한 황제에게 붙잡혔던 잡어보다는 훨씬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터. “끄으….” 목을 틀어잡힌 백윤은 흐릿한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 심연 역시 그를 바라볼지니.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본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백윤의 심장을 옥죄었다. 허나 그 두려움보다도, 억울함에 가까운 의문이 앞섰다. 백윤은 미뤄두었던 의문을 끝내 입에 담았다. “도대체 넌…, 누구냐….”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 허나 서준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 그가 말한다. “춘봉이 오빠.” 알 수 없는 대답에 백윤의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일그러진 표정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네놈…, 끝까지….” “뭐, 아니면 이쪽이 알아듣기 쉬운가?” 백윤을 빤히 바라보던 서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멸사천군 이서준. 백윤의 눈이 부릅 뜨였다. * 북해빙궁의 심처. 거대한 옥좌 위에 걸터앉은 백설향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대계 앞에서 네가 뭘 할 수 있을 듯싶더냐, 백서준.’ 놈에게 허락된 것은 기껏해야 발버둥뿐. 이미 놈은 외통수에 몰렸다. 그것이 꼭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도 같은 신세라. “후후….” 북해빙궁주, 설혈요후(雪血妖后) 백설향의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