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현월을 데리고 적당한 방으로 향했다. 남궁수아는 방해하지 않을 생각인지, 아니면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 수련을 한다며 자리를 비켜주었고, 패진광은 그냥 심심하다며 따라왔다.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자면 혈오문에 대한 정보는 그리 정확하진 않네. 문파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라 정보를 긁어모아도 성과가 영 별로야.” “혈오문? 갑자기 거기는 왜.” 패진광이 묻자 서준이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영감님, 쉿.” 패진광이 에잉 쯧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가져온 정보들은 내가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정보들일세. 나머지 것들도 가져오긴 했지만 헛소리에 가까우니 적당히 걸러듣고.” 이내 현월이 품에서 두루마리 두 개를 꺼내들었다. 하나는 현월이 엄선하여 고른 정보들. 또 하나는 신빙성이 없는 정보들. 현월은 그것들을 서준에게 건네주며 정보를 빠르게 요약해 읊었다. 혈오문의 위치, 구조, 전력, 문주의 경지, 문파의 주력 무공,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문진식, 또 그들이 부릴 수 있는 갖가지 수작들까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빠르게 정보들을 뱉어내는 모습에 서준이 감탄했다. “와, 머리 엄청 좋은가보네요? 그걸 어떻게 다 외웠대.” “나름 업으로 삼은 일 아닌가. 이 정도도 못 해서야 안 되지.” 현월이 씩 웃자 입을 다물고 있던 패진광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래서 이건 왜?” “지우려고요. 계속 살수들 보내서 귀찮게 하잖아요.” “허…, 정신 나간 놈들이군. 건드려도 이런 놈을 건드려?” “내가 뭐요.” “모르면 말아라.” 패진광이 픽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월이 작게 감탄했다. “이제 보니 권왕과도 친분이 꽤 두터운 모양이군.” “어?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그걸 모르면 이 일을 접어야지.” “아하. 별 반응 없길래 모르는 줄.” 서준이 픽 웃으며 탁상을 툭툭 두드렸다. 손끝에서 내공이 퍼져나가며 묘한 소리가 울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빠르게 차를 내왔다. 킁킁, 향을 맡아본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건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지.’ 저번에 자신이 내린 차는 그냥 쓴 물이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하녀가 깊게 허리를 숙이고 물러난다. 문이 닫히고, 서준은 두루마리 두 개를 품에 쑤셔넣은 뒤 대신하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무패였다. 춘봉과 함께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 홍월루의 매월에게 받은 두음향의 지부장을 상징하는 패. “호오, 그건?” “뭔지 알죠?” “당연한 말을. 향급 지부장의 패로군. 이런 걸 가지고 있었으면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지 그랬나.” “아니, 뭐.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첫만남을 떠올린 현월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이거 쓸모 있는 건 맞아요?” “글쎄…. 지금의 자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네만. 그 진기재천 아닌가. 아무 지부나 찾아가서 대뜸 멱살을 틀어잡으면 정보란 정보는 다 얻을 수 있을걸세.” “아니, 사람을 무슨 강도로 아나.” 서준이 툴툴대자 현월이 씩 웃었다. “그 외에는…, 글쎄. 사실 하오문이 지부끼리 그리 유대감이 강하진 않아서 말이야. 큰 의미는 없을 걸세. 뭐, 다른 지부장들이 조금 호의를 가질 수는 있겠군.” “그러면 할인 같은 것도 해주고 그러나?” “그거야 지부장 마음이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것도 가져가게.” 현월이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무패가 아닌 금속패다. 가난한 뒷골목과 돈 잘 버는 하남의 차이인가? “나름 성급 지부장 패이니 작은 도움 정도는 될지도 모르네.” “성급? 아니, 하남성 지부장이었어요?” “모르고 있었나?” “의외로 대단한 사람이었네.” “의외는 이 사람아.” 현월이 픽 웃으며 패를 던졌다. 가볍게 받아든 서준이 패를 품에 넣었다. “땡큐요.” “고맙긴 뭘.” “혹시 나중에 누가 시비 걸면 불러요. 조용히 슥삭해드릴게.” “…진심인가?” “반쯤? 일단 두들겨 패주긴 할게요.” 서준이 낄낄 웃으며 바닥에 팔을 짚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아무튼 이제 일 다 끝난 거죠?” “그렇지.” “그럼 좀 놀다 가요.” “하하, 그거 기꺼운 소리군.” 현월은 두 시진 가까이 별장에서 놀다 돌아갔다. * 용봉지회의 예선이 가까워졌다. 춘봉과 남궁수아의 수련을 봐주던 서준은 대뜸 바닥에 드러누워 툴툴댔다. “이 미친 중원. 왜 이렇게 넓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어느새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원상태로 돌아온 남궁수아가 슬쩍 다가왔다. “왜?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자연스럽게 서준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툭. 그리고는 쿡쿡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으니 춘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둘이 왜 이렇게 가까워졌지? 나 없을 때 뭐 했어?” “어허, 금 씨. 너 없을 때 맛있는 거 안 먹었어.” “수상한데….” 우다다 달려와 그대로 서준의 배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춘봉이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중원이 넓은 게 뭐가 문제야.” “문제지. 어디 한 번 가려면 엄청 오래 걸리잖아.” “바보야.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잘하는 거?” 서준이 고민했다. 무공, 주술, 사람 열받게 하기, 연애…. “나 잘하는 거 엄청 많은데?” “이 새끼….” 빡친 춘봉이 서준의 배 위에서 엉덩이를 콩콩 내리찍었다. 뾰족한 꼬리뼈가 서준의 늑골을 강타했다. “커억…!” “경공 하나 만들면 되잖아, 새끼야!” “어?” 맞다. 생각해보니 무공 만드는 것도 좀 잘한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사람이 이래서 여러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살아야 한다. 한 가지 길이 눈에 보이면 다른 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우리 금춘봉…! 너 천재였구나…!” 서준이 벌떡 일어나 춘봉을 번쩍 들어올렸다. 허공에 붕 떠오른 춘봉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흥, 이제 알았어?” “맞아! 우리 춘부이는 천재야! 내가 멍청했어!” “음음, 좋아. 더 해봐.” “천하제일귀!” “이제 식상해.” “어른 춘봉!” “뒤진다 진짜.” 서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할 일 리스트에 개쩌는 경공 만들기를 추가했다. 생각해보니 이제껏 황운신공이나 패력괴신무에 포함된 경공을 익히긴 했어도, 그걸로 뭔가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황룡도하는 나름 쏠쏠하게 써먹긴 했지만…, 솔직히 그게 속도에 특화된 경공은 아니다. ‘뭔가 더 없나?’ 분명 잊고 있었던 것들이 더 있을 터. 이 기회에 정리나 할 겸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벌써 두 개나 생각났다. “아.” “또 뭐.” “그러고 보니까 그거 있잖아. 사흑련 무공.” “그게 왜?” “나중에 너한테 그거 베껴서 써도 되나 물어보려 했는데, 아직까지 까먹고 있었네.” 춘봉이 사흑련을 아주 싫어하는 만큼 나름 중요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춘봉이 표정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그걸 굳이 왜?” “눈앞에서 써주면 좋아 죽지 않을까?” “…흠. 좋은 생각인데? 좋아. 합격.” “굿.” 그리고 또 하나. 서준의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무거운 시선이 남궁수아를 향한다. 그 시선을 받은 남궁수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발갛게 달아오르려는 볼을 애써 식히며, 그녀가 슬쩍 물었다. “왜, 왜…?” “누나.” “으응….” “때가 왔어.” 느닷없는 말에 춘봉과 남궁수아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준이 선언했다. “오늘, 팔씨름 다시 해.” 이제는 자신 있었다. 패력괴신무도 궤도에 올랐겠다, 오늘이야말로 실추됐던 명예를 되찾을 날이다. 춘봉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네. 그거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냐?” “이건 중요한 일이야.” 서준이 바닥에 드러누워 척, 하고 팔씨름 자세를 잡았다. “들어와, 누나.” “으음…. 그러면 우리 내기 하나 할래?” “내기?” 서준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무조건 이기는 내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지. 무슨 내기?”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오호. 무슨 소원인데?” 후후, 남궁수아가 웃으며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입맞춤.” “뭣….” 서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조차 춘봉에 비할 수는 없었다. “무, 뭐, 뭐…!? 이, 입맞춤!? 입술에!? 그런 파렴치한…!” 기겁한 춘봉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남궁수아는 진지한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이 너는?” “어….” 이거 사실 그냥 져주는 게 이득 아닐까? 팔씨름은 다음에 이기면 그만이고…. “나중에 정해도 되나…?” “그럼 물론이지.” 남궁수아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무슨 소원이든 상관 없어. 정말로 뭐든지….” “오….” 서준이 감탄하는 사이 남궁수아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무를 수 없다. 팔씨름 자세를 취한 두 선수와, 심판 춘봉. “이익…!” 이를 악문 춘봉이 서준을 째려보았다. 저 새끼 일부러 지는 거 아니겠지? 하지만 이건 자신이 막아서 어떻게 될 일이 아니다. 둘이 좋아서 입을 맞추겠다면 자신이 뭘 어쩌려고. 다만 바라는 것은…. “…시작!” 춘봉의 신호와 함께 서준과 남궁수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남궁수아는 진심을 다했다. 가녀린 팔에 핏줄이 서고, 얼굴이 찡그려져 조금 못난 모습을 보일 만큼. 하지만 팔은 중앙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막상막하. 아니, 남궁수아는 빠르게 깨달았다. “아….” 툭, 가볍게 넘어간 남궁수아의 손등이 땅에 닿았다. “드디어…!” 서준의 압도적인 승리. 기쁨에 찬 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내 명예를 되찾고야 만 것이다. 그의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이 걸렸다. “소원은 나중에 생각해서 말해줄게.” “…응.” 시무룩해진 남궁수아는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평소의 미소를 되찾은 채 검을 잡았다. “그러면 수련이나 마저….” 그때, 서준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불쑥 다가온 그의 모습에 남궁수아의 눈이 부릅 뜨였다. 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친다. 이내 서준은 살짝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이마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건 서비스.” “어…?” 양손으로 이마를 가린 남궁수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왜 자꾸….” 예상하지도 못한 때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궁수아가 푹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에 가려져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헤프게 올라가 있었다. 그걸 모두 직관한 춘봉은 그냥 열이 뻗쳤다. “뭐, 뭐 써비쓰? 어디서 되도 않는 연애 소설 같은 거라도 봤냐? 그딴 말을 진짜로 하는 새끼가 어디 있어!” “오구, 우리 춘봉이도 뽀뽀해줄까? 이리 와.” “필요 없어! 꺼져!” 삐죽 혀를 내민 춘봉이 우다다 달려 사라졌다. 잔뜩 삐진 모양이다. 좀 있다 실컷 달래줘야지. 실실 웃던 서준은 소매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고개를 젖혔다. 열심히 놀았으니 이제 할일을 해야 할 때. ‘경공이라….’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속도. 멀리 떨어진 곳조차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그런 경공.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걸 가장 우선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