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계좌에 짭짤하게 들어온 돈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대머리 아저씨도 그렇지만 일단 큰형이 보낸 돈이 정말 무지막지했다. - 제가 따로 좀 더 보냈어요. 재밌는 거 보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콧소리를 내면서 웃는 형수의 목소리. 큰형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면서 화내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고 깔깔거리며 즐기는 걸 보니 우린 나름 잘 맞을 듯했다. “소! 소! 소! 소!” 아까 소고기 사준다고 한 다음부터 사람이 아닌 뭔가 다른 걸로 변해버린 유아린. 유인원처럼 방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소를 외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할까 살짝 고민할 정도로 웃겼다. 어쨌든. 소를 먹으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소! 소! 소! 소! 음머어어어!” 하나는 아예 골드원 밖으로 나가서 먹는 방법이었다. 주변에 괜찮은 소고기 집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부분이 전당포나 일수 관련 사무실이니 음식점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움머어어엉! 움머어어어!” 또 하나는 그냥 골드원에서 먹는 거였다. 물론, 진짜 더럽게 비싸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늦은 시간까지도 영업하고 퀄리티도 보장되니까. “아, 모르겠다.” 기왕 한 번 먹는 건데 까짓거 비싼 걸로 먹는 게 맞지 않겠는가. “음머어! 소오오오! 움머어어어어!” “적당히 하고 갈 준비해라.” 이제 진짜 소가 되어서는 울어대고 있는 유아린을 말리면서 옷을 입는다. 유아린도 방긋 웃으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냉큼 현관 쪽으로 달려간다. “일단 A동으로 가자. 거기에 소고기 집 비싼 곳 있거든? 그쪽으로…….” “우촌?! 우촌을 간다고?! 거기 1인분에 10만 원인데?” 어? 10만 원은 좀 센데. “우진 님! 관리자님! 주인니임! 제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아아! 지금까지 깝쳤던 저를 마구 때려주세요오오오!” “……에라, 모르겠다. 가자.” 두 명인데 아무리 그래도 얼마나 먹겠는가. “편의점 잠깐 들를까? 가기 전에 과자 같은 거 한 봉지 먹고…….” “주인놈아, 지랄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 그냥 가자.” 공손하게 고개 숙이면서 욕을 박는 유아린. 하긴 한 번 돈 쓸 때 화끈하게 쓰는 게 또 맞긴 하다. 사실 생활비는 이미 여기서 일하던 걸로 어느 정도 충당이 됐으니까. 게다가 여기서 일하는 건 일종의 보너스 개념이고, 가서 따로 알바도 구할 생각이었다. 대나무숲 관리하느라 고생하기도 했고, 성인용품 택배로 붙이는 것도 도와줬으니까. “가자! 최소 2인분은 먹는 거다!” “사랑해요! 진짜 사랑해요오오! 내 남자 너무 멋져어어!” 바로 엉겨 붙어서는 깡총거린다. 은밀하게 사용하던 객실 카드키는 로비에 반납한 다음 우리는 골드원 내부 버스를 타고 A동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저녁 7시. 좀 늦은 저녁 시간이지만 개인적으론 고기를 먹기엔 딱 적당한 시간이지 않나 싶다. 우촌에 도착하자 은근 사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값이 워낙 비싼 곳이라 사람이 몇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딱 봐도 명품을 입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서로 덕담을 나누거나. 혹은 카지노에서 오늘 한탕 제대로 치셨는지 다소 추레한 복장으로 술병을 쌓아두고 즐기시는 분들도 계셨다. 룸도 따로 있었지만 두 사람이니 룸에는 못 들어가고 그냥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소오? 소오오?” 다시 짐승이 된 유아린이 메뉴판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가격이 확실히 세긴 했으나 솔직히 오늘 번 것에 비해서는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일단 꽃등심으로 3인분을 시킨다. “여긴 뭔 김치도 돈을 받아.” 비싼 곳은 원래 이런 건가 하고 혀를 내두르면서 예전에 엄마 따라다녔던 음식점들이 왜 그렇게 나한테 친절했는지 알겠다. 이 가격인데 친절해야지. 고기는 생각보다 금방 나왔고, 우리의 식사 역시 재빨랐다. 고기가 비싼데 생각만큼 크지는 않아서 좀 아쉬웠지만, 그런 마음은 한 입 날름 넣는 것만으로 모두 해소되었다. “흐어억! 넘무 마시써어어어!” 거의 녹아내린 유아린.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맛을 음미하는 걸 보면 데려오길 잘했다. “이게 돈맛이구나.” 사람들이 왜 돈, 돈 거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거 먹으려고 돈 버는 거구나. 맛있어서 자연스럽게 술도 시키게 되었고, 우리는 의도치 않았지만 대나무숲 회식을 하게 되었다. 관리자와 관리인으로서 고생했다고 서로 짠하면서 헤실헤실 덕담을 주고받는데. “그, 둘이 뭐해?” 칸막이 위로 빼꼼 보이는 익숙한 얼굴. 서예린이었다. “예린이? 왜 여기 있어?” 깜짝 놀란 유아린이 묻자, 서예린은 어색하니 굳은 표정으로 애써 대답했다. “으응, 감독님이랑 배우님이 추가촬영 관련해서 회의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거 때문에 왔어.” 보니까 우리보다 먼저 와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룸에 있던 모양이다. “예린 씨?” “오매, 내 눈.” 잘생긴 사람은 후광이 있다더니 진짜였다. 서예린 뒤로 따라온 차승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양손으로 가려버렸다. “크흐흫, 미친넘.” 앞에 있는 유아린은 좀 취했는지 이런 내 반응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어댔으나. 생각만큼 분위기가 가벼운 느낌은 아니었다. “친구분들이세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차승호를 쳐다도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서예린. 나와 유아린을 보면서 표정이 어두운 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 그걸 차승호도 느낀 걸까. 그는 힐끔 우리를 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제안해 왔다. “합석하시겠어요? 저희 쪽에 자리가 많거든요.” “……계산은요?” “하하, 당연히 저희가 해드리죠.” “오예! 아린아 바로 자리 옮겨라.” “넵! 선장님!” 우린 바로 고기를 담아서 차승호의 뒤를 따라서 이동했다. 대배우라서 그런지 통이 더럽게 크다. “안쪽으로 고기 4인분 추가욧!” “여기 냉면이랑 된찌도 하나씩 추가욧!” 들어가면서 따로 추가 주문도 해준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귀엽다고 웃어대는 걸 보면 역시 대배우. 난 이제부터 차승호 팬이다. “으음?” 우리가 룸 안으로 들어오자 감독으로 보이는 남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대배우님께서 곧장 서예린 친구들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아하, 예린 씨 친구들? 맘껏 시키세요.” “이미 시켰습니다!” “구석에 찌그러져서 맛나게 먹고 가겠습니다!” 밝게 웃으면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나온 고기와 냉면을 흡입한다. 서예린의 시선이 빤히 우리에게 꽂히긴 했으나, 저쪽 분들이 우선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예린 씨한테 따로 배역을 하나 주려고요. 각본가도 처음엔 안 된다고 했는데, 에린 씨 촬영분 보자마자 바로 오케이 떨어졌어요.” “아, 네.”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거 봐라. 오늘도 대나무숲에 섹x 하고 싶다고 써놓고. “대사가 많지는 않고. 몇 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게 임펙트가 좀 있어. 캐릭터성이 확 부각된다고 할까?” “네에.” “괜찮겠어요? 너무 부담되면 안 해도 괜찮지만 그래도 우린 예린 씨가 꼭 해줬으면 좋겠어.” 감독이란 사람이 부드럽게 말해주자 옆에서 차승호가 서포트를 들어간다. “예린 씨 이번 걸로 얼굴 한 번 알리고 들어가는 게 굉장히 좋은 기회예요. 아직 YS랑 계약이 안 되어 있으니까 일반인이 현지에서 감독 눈에 들고 배우가 됐다 이런 서사도 쓰기 좋고요.” “…….” 확실히 좋은 기회긴 하다. 특히나 서예린도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서예린의 시선이 내게 빤히 닿더니 숨을 고르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러더니. “잠깐…… 고민을 해봐도 괜찮을까요?”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것 같은데 감독과 차승호는 따로 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서예린이 나간 자리를 나 역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반대편에서 고기를 먹던 유아린이 벌떡 일어난다. “다녀옴.”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았어도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았던 걸까. 방금까지 고기에 정신 팔렸던 것과 다르게 시크하게 일어나서는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진 느낌. 냉면으로 속을 시원하게 만들려고 국물 한 모금 크게 들이키자 남은 감독과 차승호 배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이름이…….” “김우진입니다.” “아, 우진 씨.” 차승호는 어색하니 웃으면서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예린 씨, 할 것 같나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세요?” “두 분이 좀 친해 보이셔서…….” 친하긴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을까요? 본인도 나름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그런가요?”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차승호는 약간은 안심한 듯 보였으나 하고 싶은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닌 듯했다. “크흠.” 그걸 알아챘는지 대신 끼어든 감독. “내가 애들 일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혹시 예린 양이랑 사귄 적이 있다거나?” “어, 음…….” 3분 정도? 서예린 어머니한테 걸렸을 때 3분 사귀고 헤어지긴 했다. “아뇨?” 근데 솔직히 3분을 사귀었다고 말하긴 좀 모호하니까 일단 부정했는데. “그럼 짝사랑인가?” “그런 것 같은데요.” 서로 결론을 내린 두 사람. 감독은 나를 쳐다보면서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진 군, 예린 양은 아마 배우가 될 거야. YS에서도 눈여겨보고 있고, 전폭적으로 지원이 들어가겠지.” “…….” “우리가 봤을 때, 예린 양이 우진 군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아.” 아까 그렇게 티를 냈으니까 알 수밖에 없겠지. “대강 압니다.” 솔직하게 대답하자 둘은 살짝 당황했으나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예린 양한테 잘 말해줄 수 있겠나? 보니까 우진 군은 여자친구도 있잖나.” “배우가 될 예린 양을 위해서예요. 같은 배우로서 말씀드리자면, 스캔들 같은 건 최대한 피해야 해요. 그리고 애초에…….”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으나 차승호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사는 세계가 다릅니다. 배우가 되면 예린 양도 알게 될 거예요. 우진 군이 지금 쳐내 주는 게 가장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기는 겁니다.” 웃기긴 했다. ‘내가 감이 좋긴 하네.’ 서예린이 배우가 되는 걸 본 순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진 건 벽이었으니까.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이 그토록 격하게 체감되었기에 아마 지금까지 내가 심란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방금도 일부러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 그냥 고기에만 정신 팔린 척했었다. 그나마 이렇게 대놓고 말해주니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그건.” 나는 다시 고기를 먹으며 대꾸했다. “서예린이 선택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