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더미가 된 숲을 기사들이 내달린다. ​ “햣하-! 잡아라!” “도망치는 건 그냥 엘프, 도망치지 않는 건 훈련받은 엘프다!” “생포해, 생포!” ​ 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한 이들이 전리품을 약탈하는 시간. 만일 이게 왕국 영지와 영지의 싸움이었더라면 서로의 감정을 더럽히는 약탈은 금지되었겠지만, 이번 싸움은 영지와 영지의 싸움이 아니다. ​ 기사와 범죄자들의 싸움. 정의와 악당의 싸움. 죄인을 처벌하는 심판봉이다. 덕택에 기사들도, 그들을 통제해야 할 로엔그람도 엘프들을 약탈하는 데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갖지 않았다. ​ 다만. ​ “흐으음…… 이상하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엘프들의 수가 너무 적어.” ​ 숲을 일주한 로엔그람은 제 부하 기사에게 그리 읊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넓은 숲을 살아가는 엘프의 수가 지나치게 적다. 들었던 정보의 십분지 일도 안 될 정도. ​ 이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문받은 엘프가 끝까지 의리를 지켜내고 입을 닫았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엘프들이 진즉에 배신을 알아차리고 미리 도망쳤다는 것. ​ 전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왕국의 고문기술자들은 아무리 고결한 기사라고 할 지라도 그 입을 열게 만들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숲 속에서 자기들끼리 어화둥둥하며 살아왔을 엘프가 버틸 수 있을 자극이 아니다. ​ “……도망쳤군.” ​ 슬쩍-. 로엔그람의 눈이 숲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을 향해 돌아간다. 그러고보니 기사의 수가 처음보다 무척 줄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작전 중 생긴 부상으로 먼저 퇴각했다고. ​ 그럴 리 있나. 로엔그람은 그들이 엘프들을 따로 빼돌렸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그럴 이유는 충분했다. 이번 소집령은 왕의 권한을 이용한 것이라 소집된 기사와 그들의 군주에게 그 어떤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다. ​ 그들이 귀족으로 임명 받았을 때, 기사로 서임 받을 때 계약했던 약속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런 대가 없이 일하는 게 반가울 리 없다. 때문에 알아서 대가를 챙기는 행위는 당연……. ​ ‘……그러고 보니.’ ​ 로엔그람은 뒤늦게 엔리가 이끌던 기사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리 본인이 숲 속까지 들어와 그들을 구해주었던 지라 깜빡 잊고 있었다. ​ 지금 이 상황에 보여야 할 부하 기사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또한 엘프를 몰래 빼돌렸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 “설마.” ​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가 그럴 리는 없겠지. 로엔그람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넘어가지 못 했다. 머릿속 한 켠에는 계속해서 의구심이 남아 그를 괴롭혔다. ​ 그리고 기사의 직감이란 보통 잘 들어맞는 편이다. ​ * * * ​ 클라우디아 령.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영지에 도착한 흑장미 기사단은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별관에 차례차례 엘프들을 집어넣었다. ​ 저택 안에 도착한 엘프들은 공포에 덜덜 떨면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붙잡힌 엘프들이 어떻게 되는 지, 그들의 선조에게. 또 그들의 동족에게 수도 없이 경고 들었기 때문이다. ​ “우린 끝이야…….” “아아- 더러운 인간의 엉덩이를 빨게 되겠지…….” “팔다리가 다 잘리고, 눈알을 파이고….” ​ 최악의 경우에는 변태 귀족에게 끌려가 장난감처럼 다뤄지다가 죽음만 면한 채로 목숨만 부지하든가, 그나마 나은 경우에도 성노예로 끌려가 수많은 남성들에게 희롱당하는 최후를 맞이하리라. ​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될 상황에- 별관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빛과 함께 새카만 머리의 영애가 그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엘프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별관 안으로 들어선 여성을 바라보았다. 귀족이라는 개념을 인간으로 빚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품격 넘치는 모습. ​ 이브 클라우디아는 엘프들을 내려다보면서 가볍게 쯧- 혀를 내찼다. ​ “더럽잖아.” ​ 움찔-! 엘프들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조심스레 운반했다고는 하지만, 땅굴을 헤쳐나온 엘프들의 몸상태가 깨끗할 리는 없었다. ​ “씻겨.” “예, 아가씨.” ​ 이브의 한 마디에 그녀 뒤에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달려가 엘프들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공작가의 메이드답게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들은 손목 발목이 묶인 엘프 수십을 고작 수십 분이 되기 전에 말끔하게 만들어놓는데 성공했다. ​ “???” ​ 그렇게 깨끗하게 씻겨진 엘프들은 다시 한 번 이브 앞에 진열되었고, 깨끗해진 엘프들을 본 이브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을 토로했다. ​ “쯧. 삐쩍 곯았잖아.” ​ 먹여. 예, 아가씨. ​ 이브의 한 마디에 메이드들은 곧장 수십 인분의 식사를 준비했고. 과연 밥까지 먹여줄 수는 없었는지 일시적으로 손목을 풀어놓게 되었다. ​ 놀랍게도 손목을 풀고 식사하는데 그 어떤 감시도, 경비도 없었다. 식당 안은 음식과 식기로 가득했고. 엘프들은 아무렇지 않게 날카로운 식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엘프들이었지만, 밥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들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진수성찬에 눈이 돌아갔던 것이다. ​ 이 나라에서 엘프는 기본적으로 죄인이거나 노예다. 숲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상상도 못 하며, 당연히 식사 또한 숲에서 나는 도토리나 열매를 주워다 먹는다. ​ 고기는 정말 아주 가끔밖에 먹을 수 없는 수렵민족. 그런 이들에게 아주 오랜만에 값비싼 고기와 과일, 생선 따위를 들이미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 “의도가…… 뭐지?” “……여기 독이 들은 거 아냐?” “엄마! 이거 먹어봐요! 맛있어요!” ​ 아직 어린 엘프들은 이 상황에 마냥 웃음보를 터트릴 뿐이었지만. 인간불신이 기본적으로 깔린 어른 엘프들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 다행히 그렇게 의심했기에,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거나 탈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이었다. ​ “탈출 시도는? 아무도 없다고? 그래? 그럼 본보기는 필요 없겠네.” ​ 식사가 끝난 이후 뒤늦게 돌아온 이브는 그리 말하며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자신과 똑같은 지성체를 보는 것이 아닌, 말 잘 듣는 가축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충실한 가축에게 보상을 내리는 법이다. ​ 엘프들은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별관을 빠져나와 그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클라우디아 공작이 특별히 관리하는 숲이었다. ​ “이제부터 이 숲이 너희들의 영지야. 너희들끼리 알아서 촌장을 정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러 와. 별관까지 자유롭게 이용해도 좋으니까.” ​ 머나먼 옛날. 엘프들이 이 땅의 지배자였을 무렵. 그럴 때에나 볼 수 있었던 양지 바른 숲. 햇볕이 중간중간 잘 스며들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숲이었다. ​ 숲을 배정받은 엘프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이토록 잘해주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저…… 인간 아가씨?” “이브 님이라고 불러.” “이, 이브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희는 대체 여기서 뭘 하면 되는……?” ​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 한 엘프들 중 한 명이 총대를 매고서 이브에게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브는 이런 것도 모르냐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그 엘프를 노려보았다. ​ 눈빛만으로도 사람 여럿은 죽여봤을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으니, 엘프는 절로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연찬해.” “예, 예?”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활을 쏘고, 정령을 다루고, 마법을 배우면서 스스로를 단련하라고.” ​ 살아라.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평범하게. ​ 이렇게까지 귀한 대우를 해주면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이브는 한 마디를 남긴 뒤 모습을 감추었다. ​ “쓰임이 있을 때 알아서 부를 테니, 그때까지 준비해.” ​ 이브가 정말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떠나간 직후. 엘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인간은 모두 그들을 하나의 소장품쯤으로 여기며, 노예로 붙잡아 거래하고, 희롱하고 괴롭히며 망가뜨렸다. ​ 그러나. 인간은 믿을 수 없어도 행동은 믿을 수 있었다. ​ “……어쩌지?” “이대로 도망치는 건…….” “안 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데다가…… 아이들까지 있는 걸.” ​ 아무런 속박도 감시도 없는 이상 이곳을 탈출하는 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그 어떤 엘프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 했다. ​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는 숲 바깥을 선택하는 것보다야, 배부른 가축이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 사실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 “……이브 님은, 사실. 좋은 사람이 아닐까?” “내가 생각해도 그래.” “아아- 마음씨 착하신 분.” ​ 지금까지의 행적만 보았을 때. 이브가 보여준 행적은 악역영애라기보다 엘프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당의 탈을 쓴 위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