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프들을 사로잡은 흑장미 기사단은 그리 생포한 엘프들을 말 등에 짐 싣듯이 실어놓고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엔리는 기사단을 이끄는 루카를 향해 당부했다. ​ “조심해서 전달해라. 중간에 딴 길로 새지 말고.” “넵! 누구 명령인데요.” “그리고 만약 들키면─ 베어버려.” ​ 살인멸구. 목격자가 있다면 죽여서라도 그 입을 틀어막으라는 엔리의 말에 루카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이 일은 결코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무고한 평민이 목격한다면 죽여서라도 그 입을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 물론 이번 작전에 참여한 기사들 중에서도 자신들처럼 엘프를 뒤로 빼돌리려는 이들이 있으리라. 엘프 아닌가. 숲의 요정. 미의 종족. 아름다우며 마법적인 적성마저 뛰어난 생물. ​ 그 숫자만 많았더라도 인간을 넘어 이 세상을 지배했을 상위 종족. ​ “가라.” “조심하세요. 단장.” “조심? 누가?” ​ 루카의 걱정에 엔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루카는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 헛웃음을 털털 내뱉으며 고삐를 쥐었다. ​ 엘프들을 데리고 작전 구역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을 바라보던 엔리는 저 멀리, 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멈춰선 걸 확인했다. 화포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꺼진 것이다. ​ 그 모습을 확인한 엔리는 엘프들이 빠져나왔던 땅굴을 바라보았다. ​ “일하러 가볼까.” ​ 잠시 후, 엔리는 땅굴 속으로 휙- 몸을 내던졌다. ​ * * * ​ 활활 타오른 숲. 새카만 잿더미들이 이곳에 숲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우뚝 솟아 있었다. ​ 마법으로 화재를 진압한 엘프들은 그 광경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평생 살아온, 또 지켜온 숲이 하루 아침에 초토화가 되었으니. ​ “마르실 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너희들 먼저 가라.” “그렇지만─.” “누군가는, 누군가는 뒤를 지켜야하지 않겠느냐.” ​ 반왕국연맹의 간부인 마르실은 그리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피어냈다. 그 표정을 본 엘프들은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하나 둘 땅굴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 엘프들이 땅 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실은 대체 언제부터 엘프의 위상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모르겠단 생각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야속하구나.” ​ 엘프의 위상은 이렇지 않았다. 과거엔 이러지 않았다. 엘프들은 모든 종족보다 훨씬 많은 땅을 제것마냥 활보했으며, 그 발걸음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았고, 찬란한 태양은 늘 엘프들을 축복하듯 내리쬐었다. ​ 지금은 어떠한가? 엘프들은 이제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숨어산다. 숲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다가 인간에게 붙잡혀 노예가 된 엘프가 수두룩하며, 그 영역은 전성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좁다. ​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엘프들을 이런 상태로 내몬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 ​ 휘이이익-! ​ 저 멀리 날아드는 익숙한 화살 소리에 마르실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녀 몸 위로 피어오른 배리어가 날아드는 화살을 튕겨냈다. ​ “─엘프다!” “여기에 있다!” “조심해, 화살을 튕겨낸 걸 보니 마법사다!” ​ 숲을 불태운 인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전원이 마법으로 강화된 갑옷과 칼을 찬 기사들이었다. ​ 기사들은 마르실 한 사람을 보고도 결코 방심하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를 내질러 다른 동료들이 모일 때까지를 기다렸다. 마르실 또한 그런 기사들을 보며 굳이 마법을 영창해 자극하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 “여기 있었구나. 추악한 엘프.” ​ 뒤늦게 도착한 로엔그람이 선두에 서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기수를 쥐었다. 그의 뒤로 대열한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창 한 자루가 자신을 향해 겨눠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 선두에 선 로엔그람이 이들의 대장이라는 걸 직감한 마르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추악? 인간에게 들으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군. 인간들에겐 거울도 없나?” “시끄럽다. 더러운 반역자여! 위대한 그라시아 왕국의 혈족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 “─한 가지 묻고 싶다만.” ​ 마르실은. 자신만만하게 창을 겨누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 “인간은, 너희는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핍박하는 거지? 이 땅은 원래 우리 엘프들의 땅이었고. 우리들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우리 고향에 사는 것이 그토록 불만이더냐?” “헛소리를.” ​ 다만 그 물음에 로엔그람은 일갈했다. ​ “이 땅은 위대하신 초대 그라시아 국왕 폐하께서 정복한 영토요, 패배한 너희들은 초대 국왕 폐하께서 허락하신 땅에서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제 넘게 자신들에게 허락된 것 이상을 넘본 죄! 패배한 주제에 더 한 것을 넘보는 오만함!” ​ 엘프들의 잘못이란 바로. ​ "약한 주제에 강자의 것을 넘본 것이 잘못이로다! 기사단, 거창하라!” “거창!” ​ 창을 겨드랑이에 꽂아넣은 기사들이 박차를 가했다. 신호를 받은 말들이 매섭게 달려드는 가운데, 그 앞에 선 마르실은 열차가 제게 달려드는 듯한 압박을 받았다. ​ 하나하나가 초인인 기사들의 결집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실은 쓴웃음을 내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 “약한 게 죄라 이거지.” ​ 그렇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죄인이 아니더냐. ​ “끄아아아악-!” “무슨-!?” “하마下馬! 하마하라!” ​ 반왕국연맹의 간부. 엘프 대마법사 마르실의 마법이 기사들의 결집을 와해시키며 솟구쳐 올랐다. 대마법사의 마법 앞에 와해된 기사들이 마구 낙마하는 가운데, 마르실은 그리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마법을 주창했다. ​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 물론. 마법사는 기사를 이기지 못 한다. 그러나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기사를 상대할 수 있으며. ​ 숲을 제 공방처럼 사용하는 대마법사는 능히 정면에서 기사단을 깨부술 수 있었다. ​ “죽어라, 쓰레기들.” ​ 대마법사의 마법이 기사단을 향해 내리꽂힌다. ​ * * * ​ “하아, 하아…….” ​ 마르실은 숨을 헐떡이며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가라앉혔다. 짧은 사이에 상당한 량의 마력을 소모해서인지, 머리가 핑 돌고 있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해를 끼칠 기사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 ​ 기사들은 모조리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갑옷에 걸린 마법이 생명을 보호한 모양이지. 그러나 기절한 이상 그것도 의미 없었다. ​ 기사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법을 영창하려던 그때였다. ​ “그 사람을 죽이는 건 조금 곤란한데.” “─!!”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 했던 마르실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을 무렵, 그녀는 제 팔이 하늘 높이 수놓는 모습을 보았다. ​ 대체 언제 꺼내서 휘두른 건지도 모를 검이 녹색 머리 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마르실은 잘려나간 팔뚝을 부여잡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 “……너는?” "엔리. 클라우디아 령의 기사.” “……마르실이다.” “그래, 마르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엔리는 자신이 빠져나왔던 땅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 “이거, 막아주지 않을래?” “……뭐?” “다른 사람들이 못 찾게. 무너뜨려달라고.”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르실은 땅굴을 무너뜨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할 예정이었지만…… 자신을 공격한 인간이 그런 부탁을 해오다니? ​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가운데, 엔리는 뭐 어쩔 거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 “이 땅굴이 다른 기사들한테 발견되면 조금 곤란하거든.” “……하겠다.” “고마워.” ​ 그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마르실은 마법을 영창해 땅굴을 무너뜨렸다. 이것으로 인간들은 이곳에 땅굴이 있었단 사실도, 이 땅굴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지도 알아내지 못 할 것이다. ​ 도망친 엘프들은 이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 마르실은 그리 생각하며 녹색 머리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 “─죽일 건가, 인간.” “음…… 아무래도?” “역시 그런가.” ​ 엔리는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를 살려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마법사인 건 틀림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빼돌릴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 제아무리 엔리라고 할 지라도 이 장소에서 들키지 않고 그녀를 빼돌리는 건 무리였다. 적어도 이 장소에 있는 모든 기사를 죽이든가 해야겠지. ​ 그리고 아무리 엘프 대마법사라 할 지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기사를 죽이고 그들이 모시는 귀족 군주들과 척을 질 정도로 가치 있지는 않다. ​ “그렇다면.” ​ 그 사실을 깨달은 마르실은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마력을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히고자했다. ​ 허나. ​ 발버둥친다고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엔리가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리기가 무섭게 복부에 칼이 박혔고, 그녀는 내장을 쏟아내며 바닥을 굴렀다. ​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었다. 엔리는 고통이라도 덜어주고자 빼낸 칼날을 다시 한 번 휘둘렀다. 피가 낭자하고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 아무리 엘프 대마법사라 할 지라도 내장을 뽑아내고 머리를 잘랐는데 살아나진 않겠지. 그리 생각한 엔리는 시체를 뒤로 하고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 품 속에서 포션을 꺼내 그들의 입 안에 흘러넣자, 하나둘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 “여긴…….” “깼으면 어서 일어나시죠. 로엔그람 경.” “엔리 경…? 자네가 여긴 대체.” ​ 엔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돌려 바닥을 구르는 마르실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 시체를 본 로엔그람은 뒤늦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기절 하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 엘프 대마법사의 마법에 휩쓸려 차례차례 쓸려나가던 그 기억. 왕실 제2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당하던 그 장면들…. ​ “……자네가, 쓰러트린 건가?”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하하- 말이라도 고맙군.” ​ 엔리의 갑옷에 생채기는커녕 흙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로엔그람은 엔리가 자신들을 띄워주기 위해 입 바른 말이나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허나,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자신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자신들을 띄워주는데 그걸 굳이 반박할 정도로 아둔하진 않았다. ​ 다만……. ​ “정보로 들었던 것보다 엘프들의 수가 적더군. 분명 어딘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네.” “아- 그렇군요.” “같이 찾아보겠나?” ​ 로엔그람은 공을 나누겠다고 제안했다. 마르실만한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만나는 것들은 아무런 힘 없는 엘프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 말을 타고 움직이는 기사들의 사냥감. ​ 그러나 엔리는 잠시 고민하는 척 침음성을 흘리더니, 웃으며 거절의 멘트를 날렸다. ​ “아뇨, 사양 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나?” “예, 뭐. 괜찮습니다.” ​ 엔리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로엔그람이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굴러다니는 엘프 대마법사의 머리가 있었다. 어째선지 홀로 주변과 색이 다른 땅도……. ​ “공은 이미 충분하거든요.” ​ 그 말에 로엔그람은 기사의 귀감을 만났다는 듯 감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