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Knight. 아아- 가증스러운 이름이여. ​ 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1미터 거리에서 기사와 만난다면 그는 칼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지 못할 것이며, 3미터 거리에서 만난다면 칼자루 잡는 것만 얼핏 볼 수 있을 것이고, 10미터 거리에서 만난다면 그제야 기사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사란 존재는…………(후략)…………. ​ 에서 발췌. 저자 칼 보후텐. ​ *** ​ 열차의 복도는 무척이나 좁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으며, 좌석과 사람, 온갖 짐들이 통행에 방해가 된다. ​ 괜히 납치범들이 열차를 목표물로 삼은 게 아니다. 이 안에서라면 기사들의 초인적인 움직임이나 마법사들의 마법 사용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배우지 못 한 무지렁이들도 총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초인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 실제론 아니었다. ​ “으, 으아아아악-!?” ​ 총구를 마구 돌리며 상대를 겨낭한다. 그러나 상대를 조준하는 그 순간, 이미 상대는 그 자리에서 벗어난 뒤였다. ​ 상대는 복도뿐만 아니라 좌석 의자, 벽, 천장. 밟을 수 있는 틈이 미세하게 존재하는 틈들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움직임. 그 움직임 앞에선 정말로 거미줄에 붙잡힌 벌레마냥 마땅한 저항도 하지 못 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노련한 사냥꾼에게 사냥당하듯,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검끝이 딱 한 치 급소를 찌르고 지나간다. ​ “끄, 으으읅…!” ​ 목에 구멍이 뚫린 납치범들은 생명을 담은 둑에 구멍이 난 것마냥 다급히 손으로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밑 빠진 둑에 물이 차오를 수 없듯이, 구멍난 신체를 그깟 응급조치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 털썩- 많은 피를 잃어버린 납치범이 쓰러지자, 엔리는 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앞칸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연 순간,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납치범들이 곧장 총구를 들이밀었다. ​ 그토록 소리내지 않으려 애썼음에도 결국 침입을 들키고 만 것이다. ​ “쏴─!” ​ 납치범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엔리의 시계(視界)가 멈춘다. ​ 마치 세상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듯 했다. 멈춰버린 세상 속, 엔리는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납치범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 한 명, 얼굴에 뒤집어 쓴 복면으로도 가리지 못 한 특징적인 귀가 눈에 띈다. ​ 화살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 엘프였다. ​ ‘귀쟁이가 있었군.’ ​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만, 청력이 엔리 못지 않게 좋은 엘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엔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제게 겨눠진 총구를 바라보았다. ​ 엔리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검을 대여섯 번 휘둘러 총알 대여섯 개를 베어내는 일또한 불가능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세상은 진즉에 엔리 왕국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노예들로 정리됐을 테니까. ​ 그러나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 한다고 하여서 총알을 피할 수 없는 건 아니었고. ​ 마찬가지로 총알보다 느리다고해서 총알을 벨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 엔리의 시선이 총구가 향하는 그 끝을 향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저 총구가 향하는 방향이 마치 레이저처럼 선명하게 엿보였다. 그리하여 다섯 개의 총알이 겹치는 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 서걱-. ​ “뭐, 뭐?” ​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제 몸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을 모조리 베어낼 수 있었다. 사수가 한 번 기회를 놓치면 그 다음은 온전히 기사의 차례였다. 엔리는 잽싸게 달려가 당황하는 납치범들의 목을 베어냈고. ​ 머뭇거릴 틈도 없이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음 칸. ​ “─비겁하다고 하진 않겠지, 기사여.” “아-.” “우그러들어라.” ​ 엔리는 마법에 의해 우그러지는 열차를 보았다. ​ * * * ​ 아카데미 생도들의 납치를 주도한 건 반왕국연맹이지만, 납치범들 모두가 반왕국연맹의 일원인 건 아니었다. 납치범들 중에는 그냥 인생이 망해버린 범죄자나 귀족에게 엿을 먹이고자 하는 복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한두 명이면 모를까, 수십 명을 모조리 연맹원만으로 모집할 수는 없었다. 그만한 수를 몰래 모으는 것도 문제였지만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연맹에 크나큰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니. ​ 그렇게 모은 납치범들은 당연히 문제가 많았다. ​ “우와- 씨이버어얼… 뭘 먹으면 젖탱이가 이렇게 커지십니까? 귀족 나으리?” ​ 엘프 나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범죄자 녀석이 총구로 아카데미 생도 중 한 명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왕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곧장 말렸겠지만, 귀족 한 명쯤 건드리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야. 이건 뭐, 내가 봤던 어떤 창녀보다도 크네. 나으리. 아예 그쪽으로 전향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단골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그만하세요.” “어이쿠, 무서워라. ─이 씨발련이.” ​ 짜아악-! ​ 이런 곳에서 들릴 거라 생각한 적 없는, 날 것의 폭력으로부터 발현된 소리가 울려퍼진다. 화들짝 놀란 귀족들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는 가운데, 뺨을 얻어맞은 코델리아 영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납치범을 올려다보았다. ​ 귀족의 뺨을 후려친 납치범은 평민이 귀족의 몸에 손을 댔다는 배덕감에 흥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 “여기가, 응? 아직도 너희 저택인 줄 알아? 여기가 안방 같아? 편안해? 불편하게 해줄까!” “꺄아아악-!” ​ 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을 강제로 일으킨다. 고통과 공포에 젖은 코델리아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어댈 뿐이었다. ​ 그 모습을 본 납치범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가학심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열차 안 온도를 일순간 낮춰버릴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가 낮게 울려퍼진다. ​ “─어이.” ​ 평민이라면 자연스럽게 몸이 굳을 수밖에 없는. 선천적인 푸른 피로 자아낸 카리스마가 강타한다. ​ “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을 보게 해주마.” “……하, 하하-! 어이쿠, 무서워라.” ​ 납치범은 분명 그 목소리에 떨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상황에선 아무도 자신을 해칠 수 없으리란 이성이 본능을 이겨냈다. ​ “손.” “읏-!” ​ 꽈아아악-! 납치범의 손이 코델리아의 가슴을 거칠게 쥐어짠다. 창녀에게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저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라는 듯이. ​ “댔는데?” ​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하자, 분개한 3왕자가 마구 몸을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팔다리가 묶인 상황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만무. 납치범은 그런 3왕자를 비웃듯 내려다보며 나린에게 물었다. ​ “상처만 없으면 되는 거지? 이 년, 좀 써도 되나?” “……다른 칸으론 가지 마라. 여차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사람들 앞에서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귀족 아가씨랑 한다니까 이상하게 흥분되네?” ​ 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좌석 안쪽으로 코델리아를 집어던진 납치범이 천천히 바지춤을 풀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지저분한 성욕 배출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 뭐, 금방 끝나겠지. 인간의 성교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들었으니까. 기껏해야 3분에서 5분……. ​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나린이 그리 생각하며 발광하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경계하는 가운데. ​ ─타아앙! ​ 아주 미세한. 엘프의 청력으로나 겨우 들을 정도로 작달막한 소음이 나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 안 그래도 열차는 시끄러운 물건이다. 마석을 태우며 내는 증기 소리, 굴러가는 바퀴 소리, 중간에 뻥 뚫린 객실에서 나는 바람 소리와 수많은 승객들이 내는 소음까지. ​ 그러나 방금 들려온 총성은 그런 소음들 사이에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 “─잠깐.” “엉? 왜?” “침입자다. 벌써 누군가 왔나보군.” ​ 나린의 말에 납치범은 화들짝 놀라며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기껏 재미 좀 보나 했더니만…… 그는 기다란 총기를 들어올리며 열차의 문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 ─퍼버벙! ​ 이제는 인간인 납치범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총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정말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납치범이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나린은 정령들을 불러모으며 앞으로 나섰다. ​ “처리하고 오지. 여기서 기다리도록.” ​ 철컥-. 나린이 범죄자에게 아카데미 생도들을 맡기고 빠져나간 그 순간.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밧줄을 풀어헤치고 범죄자를 덮쳤다. ​ “커허억-!?” ​ 갑작스런 기습에 반응하지 못 한 범죄자는 총을 빼앗기고 마구 얻어맞았다. 얼굴이 피떡이 되어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할 정도가 되고 나서야, 크리스토퍼는 묶여있던 아카데미 생도들의 포박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 “죄송합니다. 전하. 조금 더 빨리 움직였어야 하는데…….” “─나는 괜찮다. 그보다, 코델리아는-.” “……저, 도. 괜찮아요.” 좌석 안쪽.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킨 코델리아는 애써 웃음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 “아, 아하하- 이거 어쩌죠…… 더럽혀져, 버렸네요.” “……코델리아. 그런 말 하지 마라.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끝까지 당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 물론 범죄자에게 몸 이곳저곳을 만져지기는 했지만 순결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고작 그 정도로 더럽다며 사랑하는 여자를 쳐낼 정도로 순결에 집착하진 않았다. ​ 슬피 우는 코델리아를 끌어안아 달래준 뒤, 압수당한 지팡이를 회수한 3왕자는 아카데미 생도들을 이끌고 나린이 향했던 방향으로 전진했다. ​ “원군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귀족된 몸으로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 ​ 겉으로는 그런 명분이었지만, 실속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열차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원군과 합류하는 쪽이 더 수월하리란 판단. ​ 그렇게 열차의 뒷칸으로 향한 아카데미 생도들은─. ​ “뭐야, 저게……?” ​ 그곳에서. 기사를 보았다. ​ * * * ​ 까드드드득─! ​ ‘마법!’ ​ 열차가 우그러드는 순간, 마법임을 깨달은 엔리는 곧장 몸을 날려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창틀을 붙잡고 열차 위로 올라탄 순간, 그가 발 딛고 있던 열차가 마치 큐브처럼 쪼그라든다. ​ 차량 안에 있던 좌석이요 쇳덩어리 차체까지 모조리 박살난 그 모습을 본 엔리는 옅게 신음했다. ​ ‘안에 있었으면 죽었겠네…….’ ​ 마법의 무서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강력한 초인 기사조차 죽여버리는 위험성. 이 마법이 전장에서 펼쳐졌더라면 수십에서 수백에 달하는 병사가 아무렇지 않게 죽어버렸으리란 걸 쉬이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동시에─ 이런 마법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 한 이유가 앞 차량에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열차 안으로 진입했다. ​ 반왕국연맹이 열차를 나포할 때 만든 구멍이었다. ​ 열차 한 량을 아무렇지 않게 박살낸 엘프 마법사는 구멍을 통해 들어선 엔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그걸 피해?” ​ 그럼 순순히 맞아주겠냐. 엔리는 굳이 적과 대화하지 않고서 검을 들어올렸다. 포대보다 강력한 마법사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 한 이유. ​ 그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며, 기사는 그런 빈틈을 찌르는데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엔리가 공작저에서 일하며 베고 찌르며 죽인 마법사의 수가 두 자릿수를 가볍게 넘어가니- 이 거리에선 마법사가 무슨 수를 강구하던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 “엘-드리온!” ​ 엘프가 영창을 외우자 나무로 만들어진 차량이 꿈틀거리며 엔리의 몸을 노려온다. 그러나 그를 읽고 먼저 움직인 엔리는 그 공격들을 모조리 회피해내며 엘프의 앞까지 다가갔다. ​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엔리의 눈동자를 본 엘프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검이 엘프의 목을 베어가른다. ​ “컥, 커어억…!” ​ 납치범은 주동자로서 생포할 필요가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차량 하나를 순식간에 우그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존재다. ​ 그가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무슨 해를 끼칠 지 모르는 이상, 살려두는 건 악수였다. ​ 푸욱- 검을 꽂아넣어 확인사살까지 마친 엔리는 제 뒷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는 3왕자와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 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납검한 엔리는 왕자 앞에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 “구하러 왔습니다. 전하.” “어, 어어- 그러니까…….” “엔리. 클라우디아 령의 기사, 엔리입니다.” ​ 결코 칭찬할 수는 없는 예법. 그러나 아카데미 생도들은 꿀꺽 침만 삼킬 뿐이었다. ​ 그들 모두를 포함해 교수와 호위까지 혼자서 제압한 엘프 마법사를 단칼에 죽여버린 기사 앞에서 그깟 예법을 지적하는 귀족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