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차 안. 밧줄에 묶인 아카데미 생도들은 불안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을 책임져야 할 교수와 호위들은 진즉에 머리통에 구멍 하나가 생긴 뒤였다. ​ 3왕자 카시우스는 이 상황에 침음성 흘리면서 납치범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노리는 게 누구인지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 “……인질은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다른 이들은 놓아줘라.” “─뭐라는 거야, 이 샌님이.” ​ 카시우스의 말을 들은 납치범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다가와 그의 볼따구에 총구를 강하게 들이밀었다. 차가운 쇳덩이가 볼살과 이빨을 비비며 찢어놓는 게 느껴졌다. ​ 강한 철분향이 입안 가득 느껴지는 가운데, 다른 납치범이 왕자의 볼을 찌르는 납치범을 향해 경고했다. ​ “그만. 중요한 인질이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마.” “아앙? 안 쏜다고. 누굴 등신으로 아나…….” ​ 그 대화를 엿들은 카시우스는 이들이 하나로 뭉친 조직이 아님을 깨달았다. 동시에 머릿 속에선 감히 왕족을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를 조직들의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 판데모니엄, 칸의 전사들, 칠왕국의 잔당, 이국의 무리, 단순한 도적떼……. ​ 그러나 그 순간, 카시우스는 강렬한 풀내음을 느끼고 멈칫했다. 그가 아는 한 이런 풀냄새를 풍기는 종족이란 단 하나밖에 없었다. ​ “반왕국연맹.” ​ 엘프Elf. 과거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지금은 왕국에 의해 그 대부분을 빼앗기고 아주 좁은 수림 하나에 갇혀 사는, 그리하여 왕국을 질시하는 종족. ​ 반왕국연맹이란 단어를 들은 납치범들은 순간 입을 꾹 다물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3왕자를 노려보았다. 대충 정답은 맞는 것 같지만 알게 된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건 없으니 내버려 두겠다는 듯한 태도. ​ 아까 전 그들이 말했던 대로, 카시우스의 가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값어치보다 비쌌기에. 고작 정체를 알아내었단 이유만으로 손을 대지는 않는 것이다. ​ “숲 속 요정들의 격도 바닥으로 떨어졌군. 이런 무자비한 습격이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거냐.” ​ 카시우스는 자신들이 습격 당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나타난 마차가 열차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고, 늘 그러했듯 도적떼를 무시하고 나아가려던 열차는 마차에서 발사한 대포에 의해 반파되었다. ​ 열차 옆구리에 생겨난 구멍으로 도적떼들이 우르르 침투하는 가운데, 마차 안에 몰래 침투해 있던 녀석들도 동시에 움직여 순식간에 경비와 호위를 죽이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점령했다. ​ 몇 날 며칠을 계획했는지 모를 이 습격에 아카데미 생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마법사고 기사였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은 아니었으니까. ​ 어디까지나 배움을 받는 수습생. 자신들을 가르치던 교수의 머리통에 구멍이 뚫리고 몸에 납으로 된 쇠구슬이 박히는 데 침착할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냐고?” “그래.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지탄받을─.”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고 왕국을 세웠나.” “……그건.” “나는 안다.” ​ 대뜸 납치범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터져나온다. ​ “나진, 아루, 기미, 하유, 피르……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지. 어때? 너는 너를 위해 죽은 이들의 이름을 아는가.” “…….” “우리는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잊지 않아! 너희 인간들이 수 년전 은원도 잊어버리는 데 반해, 우리는 수백 년 묵은 은혜도 잊지 않는다!” ​ 울분이 터져나온다. 인간의 한평생보다 기나긴 세월 쌓아온 원한이, 이제 막 십여년 살아온 카시우스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이 묵은 관계가 그를 쥐어짠다. ​ 터져나오는 감정에 압도당한 카시우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면서도, 그저 반박하기 위한 말을 입에 담았다. ​ “……열차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목적지를 바꾸는 짓 따위는 하지 못 할 거다. 그리고 열차가 다음 정착지에 도착하면 그걸로 끝. 너희는 모두 체포당할 것이고, 사형 당할 것이다.” ​ 그렇다. 왕자가 여전히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이유. 지금쯤이면 열차가 나포되었음이 통신석을 통해 공유되었을 것이고, 왕자가 납치되었음에 경악한 왕국에선 비상사태를 선포해 기사와 마법사들을, 군대를 소집했으리라. ​ 이들이 아무리 잘나더라도 왕국군과 정면에서 맞붙어 승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애진즉에 왕국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하고 그 땅을 차지했을 테니까. ​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반왕국연맹의 엘프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의 의미가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 “─과연 너희 인간의 상상력이 대단하긴 하더군. 엘프들은 평생 듣도보도 못 한 물건들을 만들어내. 당장 이것만 하더라도 그렇지.” ​ 엘프는 그리 말하며 제 손에 든 총을 들어올렸다. 천둥을 내는 도구. 엘프들을 더더욱 좁은 구역으로 내몬 물건. ​ 그리고 동시에 백발백중의 사수인 엘프들에게 있어 더더욱 찰떡궁합인 무기. ​ 수천년 살아온 엘프도 이런 물건을 만드는 방법 따윈 몰랐다. 그러나, 만들 줄 모른다고 하여서 사용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 “그러나 그 문명의 이기가 언제까지고 너희들에게만 웃음 지을 거라고 생각하지?” ​ 끼이이이익-! 그 순간 열차가 흔들리고 잠시 굉음이 울려퍼진다. 기우뚱거리던 열차가 균형을 되찾은 순간, 카시우스는 무언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열차가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다. ​ “우리들이 누구인지 잊었느냐.” ​ 엘프. 대자연의 사랑을 받는 종족. 정령사이며 드루이드. ​ 그들에게 있어 실시간으로 궤도를 만드는 것쯤은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이를 이용해 열차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또한. ​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오로지 엘프에게만 허락된 기예였다. ​ * * * ​ “하아암…….” ​ 열차의 꼬리칸. 바깥을 바라보며 주변을 경계하던 호크는 저 멀리, 먼지구름을 피워내며 달려드는 말 한 필을 보면서 총을 들어올렸다. ​ “미안하지만 여긴 이미 우리가 선점했……거든!” ​ 타아앙-!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강력한 천둥이 친다. 눈앞은 순식간에 탄연으로 가려졌다. ​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손을 내저은 호크는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기수가 총에 맞고 떨어졌음을 확신했다. 연기 때문에 보진 못 했지만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말 위에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 사실을 깨닫고 여유롭게 총알을 재장전하던 그때. ​ “뭐 하나 물어보지.” “어어-!?” ​ 호크는 제 앞에 나타난 녹색 머리 사내를 보면서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곧바로 총구를 들이밀며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사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여기에 아카데미 생도들이 있나?” ​ 꿀꺽-. 호크는 답하지 않고 그저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묵묵히 호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 “야- 방금 뭔 소리─.” “오지마!” ​ 그리고 그때. 총소리를 들은 제 동료들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꼬리칸으로 들어온 순간. 사내는 문 너머 포박당한 시민들을 보고서 검을 뽑아들었다. 이곳이 자신이 목적지로 삼은 그곳임을 확신한 것이다. ​ 건방지게-. ​ 호크는 감히 검자루를 잡는 시대착오적 기사님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기사가 아무리 재빨라도 총알보다 빠를 순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 티잉-. ​ 이보다 더 가벼울 순 없는 소리가 한 번 가볍게 울려퍼지고 난 이후. ​ 털썩…… ​ 호크를 포함한 일행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 납치범들을 쓰러트린 엔리는 걷는 속도를 높이며 앞칸으로 나아갔다. 총 소리가 연달아 두 번이나 울렸다. 앞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인지하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 엔리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 -뭐야? -뒤로 한 번 가봐. 혹, 기사들이 벌써 뒤쫓아 왔을 수도…… -엄마, 엄마아아…. ​ 엔리의 귀에는 앞칸과 그 너머,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뱉는 다양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서 있는 누군가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는 이의 목소리,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등등. ​ 그 모든 소리를 기반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 열차의 길이, 열차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납치범들의 수, 그들이 지닌 무기의 종류. 그리고. ​ -……구조대가 온 건가? -전하……. -크윽, 인질만 아니었어도… ​ 왕자와 귀족들로 보이는 이들의 소리까지. 눈을 뜬 엔리는 곧바로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검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열린 문틈 너머로 칼에 찔린 납치범이 윽- 하고 멈춰서는 게 보였다. ​ 칼자루를 밀며 문 너머로 향한 엔리는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납치범들을 보며 가볍게 검을 뽑아냈다. 피가 칼날을 타고 뚝뚝 흐르며 바닥을 적셨다. ​ “씨발, 쏴─.” ​ 촤아악-! ​ 그 다음은. 기사의 독무대가 이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