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나는 세면대에서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헹구며 생각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다. 지금까지의 이솔의 행동과 생각을 종합해 보자면, 그건 이미 호감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왜지?’ 왜 호감을 느끼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긴 했다. 기억상으로 내가 뭘 한 적이 없어서. 굳이 떠올리자면, 중간고사 때 사소한 도움을 준 게 전부였다. ‘혹시···.’ 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슥 돌렸다. ···흠. “···.” 지나가던 이승아가 이쪽을 보고선 가던 길로 지나갔다 — “아잇··· 왜 아침부터 지랄이지.” 미니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총총 걸어간다. “···.” ······이건 아닌가 보네. 나는 수건을 들고 얌전히 물기를 닦은 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고민은 이어졌다. ‘···외모가 영향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잘생겨서 반했다고 하기엔 그렇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예인 뺨칠 정도로 생긴 건 아니라. 학교엔 나보다 잘생긴 애들이 많았다. 외모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솔은 이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다. “아, 맞다.” 돌아다니며 빵을 우물거리던 이승아가 쩝쩝거리며 말했다. “사람들한테 다 말해뒀으니까, 다음 주 행사 빠지면 안된다?” “어.” 나는 적당히 끄덕였다. 왜 행사가 주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바비도 조금 준다니까. 크게 불만은 없었다. “···?” 나는 시리얼을 접시에 붓다가 눈을 좁혔다. 반대편에 이승아가 떡하고 앉길래. 얘는 왜 여기서 먹지. 아침도 잘 안 먹는 애가 앉아 있으니, 더 이질감이 들었다. 뭐라 할 수도 없으니까, 일단 가만히 있자. “오빠는 이상형 같은 거 없어?” 이승아가 돌연 그런 물음을 해왔다. 살짝 뿜을 뻔했다. — “···혹시라도 있으면 나중에 솔이 언니한테 슬쩍 말해줘야겠다.” 녀석의 미니미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계략의 표정이다. ‘스읍··· 난 또 뭐라고.’ 얘는 가끔 말을 이상하게 끊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 때가 있다. 나는 다시 시리얼을 향해 신경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존나 뜬금없네.” 생각이 안 들린다는 가정하에, 이게 가장 적당한 답이었다. “···.” 이승아가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췄다. 무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 “쓰읍··· 너무 성급하게 꺼냈나?” 미니마가 턱을 쓸어내렸다. 아쉽다는 눈치였다. “···쩝.” 나는 시리얼을 와그작 씹으며 생각했다. 슬슬 이승아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지경이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게 신경 써주는 건 고마웠다. ‘고마운데······.’ 이쪽도 나름의 템포라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느릴 거다. 그러한 관계에 벽을 쌓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부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고. “···.”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인간관계에 느리고, 조심스러웠기에. 상대의 생각이 들리기에. 역설적으로 관계 맺음이 어려웠다. 미니미를 처음 보게 됐을 때, 그동안 잘 지내왔던 친구들과 전부 멀어졌을 정도니. 중학교 시절 썸녀와는······. 됐다. 이건 생각하지 말자.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니다. 어느 정도 감정적 거리감을 두는 것. 이건 경험으로 몸에 밴 습관에 가까웠다. 잠깐의 시간으로 고쳐질 체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 나는 이솔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몸을 비틀며 뭐라도 하고자 하는 녀석을 떠올리면. “···음.” 아무래도. 조금은 바뀌고자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위기감은 들었다. * * * 이른 아침.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는 시간대. 드라마 ‘흑색 세계’가 공개되고 나서 제일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신아영 주변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성비 변화일 것이다. “···.” 신아영은 은밀히 주변을 둘러봤다. 여자애들은 멀리 떨어져서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고. “어제 하이라이트 뉴튜브에 올라온 건데—” 남자애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온다. 사인 부탁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지만. 대신, 드라마 얘기를 핑계로 말을 걸어오는 남학생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영~ 이거 먹을래?” 지누리가 걸어들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애들이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누리나 이솔이 오면 그들도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누리는 은근히 눈치를 주고, 이솔은 대놓고 자기 자리에서 비키라고 하니까. “그럼, 하나만.” 과자를 하나 집은 신아영은 내심 지누리를 반겼다. 그걸 먹자 조금은 참을 만해졌다. ···방과후까지 앞으로 약 9시간. ···9시간. 씁.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 * * 전공 수업을 마치고 복도로 나오자. 나는 반대편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이솔과 딱 눈이 마주쳤다. “···!” 이솔의 행동이 멈췄다. 덜컥 떨리는 것이 여기까지 보였다. — “— — — — —” 똑같이 미니미도 행동을 멈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이즈가 심해졌다. 뚝딱거리는 걸음걸이. 하루 종일 저 모습이었다. “너 어디 몸 안 좋은 건 아니지?” 지누리는 눈썹을 구부리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응.” 이솔이 삐걱삐걱 끄덕였다. 말과는 정반대다. 전혀 아닌 것 같다. “괜찮—” — “----------!” 미니미의 노이즈가 더 심해졌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중간중간 ‘쪽팔’ 이나 ‘민망’같은 단어가 섞여 새어 나왔다. ‘뭐지.’ 어제 이승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 됐다. 이 상태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슬슬 가자.” 이제 동아리 시간이다. 나는 교실에서 가방을 챙겼다. “나는 오늘도 연습 있어서. 솔아 이거 좀 부탁할게.” 지누리가 사유서를 이솔에게 건넸다. “응.” 그녀가 주는 건, 또 멀쩡히 잘 받는다. — “계속 빠지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지누리의 미니미가 작은 기타 케이스를 고쳐 매며 눈치를 봤다. — “그래도 무대에서 연주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니까.” 무대라니. 어디서 길거리 공연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미안, 나 먼저 가볼게.” “어.” 먼저 자리를 뜨는 지누리를 향해, 잘 가라며 적당히 손을 들었다. 그렇게 단둘이 남았다. “우리도 갈까?” “···.” 이솔이 말없이 끄덕였다. 가방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저건 긴장감일까. 글쎄. 생각이 안 읽히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거의 부실까지 다다랐을 무렵. “··· 잠깐만.” 이솔이 먼저 부실로 들어가 보라며 몸을 틀었다. 그 방향을 보니 볼일이 급했던 모양. “···.” 나는 끄덕이며 먼저 부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안으로 들어서자,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부장과 부부장이 보인다. “어··· 왔냐?” 부장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카드 뭉치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아, 맞아. 너한테 상담 들어왔어.” 부장이 그리 말했다. “저한테요?” “어.” 부장이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흰 봉투가 하나 놓여있다. 가끔 이런 일이 있다. 대면 상담을 하면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내담자가 상담 내용을 원하는 사람에게 말할 권리란다. — “···뭐······승호라면 알아서 잘하겠지······으음······.”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탓인지, 미니미의 생각이 일부만 드문드문 읽혔다. 나머지는 카드 게임에 관련된 생각들이었다. ‘어디···.’ 나는 서약서를 쓴 후, 상담 신청서를 그걸 펼쳐봤다. “···어. 이거 진짜예요?”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 * * 터덜터덜 아무도 없는 복도까지 온 신아영. “후우···.”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벽에 등을 붙였다. 어느새 진이 다 빠졌다. “···.”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정신 차리자며 볼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오늘은 꾀병이나 핑계가 아니라, 합법적인 연유로 동아리도 빠졌으니까. ······ 전공 수업이 마쳤다. 탁탁탁탁. 신아영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계단을 토도도도 내려와서. 선생님 앞에서 살짝 속도를 줄이며 눈웃음을 지었다가. 배후로 들어온 순간, 빠른 경보로 걸어 나갔다. 목적지는 여느 때와 같았다. 드르륵— 문을 열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어, 왔어~?” 부부장인 박민지가 제일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그 말에 부실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승호도 있고, 그 옆에 부장도 보인다. 지누리는 연습한다고 안 온 것일 테고······ 웬일로 이솔이 안 보였다. 그것에 잠시 의문을 가진 순간. “···.” 뒤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솔이 들어왔다. 앞머리가 살짝 젖어있다. 어디서 세수라도 하고 온 걸까. “···어, 왔었구나?” 이솔은 그녀를 보고 눈썹을 들썩이고선 살짝 스쳐 지나갔다. “···.” 이승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보다는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공부할 거야?” “그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어?” 이솔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건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엉덩이가 들썩였다. “신아영이랑 상담이 잡혀서.” “으응?” 이솔의 눈이 이전보다 더 커졌다. 방울만 해졌다. “고민거리가 생겨서···. 오늘 상담 받기로 했거든.” 신아영은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 이솔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평소보다 조금 초조해진 듯 입술을 뗐다. “그럼 나도—” “1대1 상담이야.” “어··· 그러면 내가—” “상담은 승호 얘가 더 잘할 것 같아서.” 신아영이 이솔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짚었다. 가볍게 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그리고 솔이 너는 공부해야 하잖아.” 기말고사가 한 달 하고도 반밖에 안 남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착실히 해둬야지. “···.” 이솔의 입술이 앙 다물렸다. “대신, 공부는 민지 언니가 봐주신대.” 신아영이 시선으로 옆을 슬쩍 가리켰다. 박민지는 카드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 이솔의 대답은 없었다. ‘음.’ 신아영은 이솔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걸 방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그래,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들어가자.” 신아영은 이승호를 데리고 안쪽 상담실로 들어갔다. 미닫이식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 틈새 사이로 이솔의 벙찐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신아영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좀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쪽도 열심히 기다렸으니까. 하루니까. 딱 하루만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솔아, 이 정도는 이해해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