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승아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한 담대한 눈길. 그 눈망울은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솔은 목울대를 넘겼다. “어어···.” 두 손은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치마 끝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 혼란한 심정 속에서, 그녀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오빠한테 고백하지 마세요. 고백하지 마라. 고백하지 마라? “어, 어어···.” 입술이 슥 벌어졌다. 이솔의 얼굴 위로 멍한 표정이 점차 번져갔다. 내가 얘한테 뭔가 실수했던가.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분명 그런 게 아니고선, 그런 말을 할 리가. “어, 그···.” 입술을 뻐금거리던 이솔은, 눈매가 추욱 가라앉았다. 미움받았구나. 시무룩. 조금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아니···!” 그 모습을 본 이승아가 당황하며 양손을 저었다. “아직, 고백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아직?” 이솔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고백은 하라면 하는 것이고. 안 하려면 안 하는 것인데. 아직 하지 말라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일까. “아직이라는 건···?” “그게···.” 이승아는 곤란한 듯,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몸을 꾸물거리며 시선은 바닥으로 향하고 있다. “후—” 반쯤 눈을 감은 이승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냐며, 불만 어린 어투로 중얼거리다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냥 빠르게 말할게요. 알았죠?” 미간을 확 찌푸리며, 이승아는 벽에 탁 손을 짚었다. “으응.” 이솔이 그 기세에 끌려가듯이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저희 오빠가 엄청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거든요?” 이승아는 그 언젠가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가 이승호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거다. 원인도 모를 고열에 시달려서, 밤중에 응급실로 실려 간 적이 있었더랬다. 다행히 열은 금방 내렸지만······.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예요.” 이승아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 이후로 저희 오빠는 연애 감정 같은 걸, 거의 못 느끼는 것 같거든요.” 이승아의 말에. “···어?” 이솔의 행동이 그대로 멈추었다. 보통 일에도 놀라지 않을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안 놀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놀랐다기보다. 현실감을 잃고 멍해졌다. “···.”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승아였지만. 그 어투만큼은 진지했다. 적어도 거짓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진짜로?” “···.” 이승아가 말없이 끄덕였다. “중학교 때 썸녀가 고백한 걸, 그대로 차 버렸거든요. 둘이 원래 되게 좋은 사이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그런 증언이 이어졌다. 이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약간이지만, 신경 쓰이는 화제라. ···일단, 지금은 잠시 넘겨두고. “···아프면서 어디 문제 생긴 거야?” “아뇨, 병원에서 그런 건 아니래요.” 이승아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또 멀쩡하거든요. 화날 때 화내고, 맛있는 거 먹으면 좋아하고.” 감정 자체는 크게 문제없다. “단지··· 감정의 기준치가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흐려졌다고 해야 하나···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 그때 이후로 성향 자체가 뒤바뀐 느낌이라. 평소에 로맨스로 점철된 드라마도 잘 보던 사람이, 그날 이후로는 어딘가 재미없다며 영화를 선호하기 시작하더니. 중간 이하였던 성적은 갑자기 올라가고, 안 하던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만화에 나올법한 등가교환처럼. 무언가를 얻은 대가로, 감정의 한 부분이 흐릿해진 듯. 그는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고백해 봤자. 좋은 답은 못 들을 거예요.” 이승아가 팔짱을 꼈다. 결국, 결론은 이거였다. “웬만한 걸로는 꿈적도 안 할걸요?” “···.” “다른 사람이라면 언니랑 단둘이 약속 잡았을 때부터 호들갑 떨었을 텐데. 저 인간은 미동도 없잖아요.” 이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건 그렇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학습지를 꺼내 들던 이승호다. “그래서 고백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 “···.” 이솔은 대답이 없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화제에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 컸다. “전 사귈 상대로는 오빠는 추천 안 해요.” 이승아가 그런 조언을 꺼냈다. “그 마음을 보답받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언니도 아직 호감일 뿐이라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찾는 편이—” “승아야.” 이솔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승아의 목소리가 덮였다. “···.” 이솔은 고개를 슬그머니 치켜들었다. 어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천히 입술을 뗐다. “···.” ···요즘 들어서 알아차린 건데. 나는 이미 내린 선택에 다른 사람이 참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라. 중간고사 때도 그렇고, 수학여행의 아쿠아리움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이솔은 한순간, 숨을 후— 들이키며. 내뱉을 말을 일부 정정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쪽에서 보낸 고백으로 잘 안될 거라면. 그 반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승호가 내게 고백하도록. “···꼬실 거야.” 이솔은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말하고 나니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그 이상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점진적인 연애를 하고자 하기에. * * * 홀로 남은 방 안. 이승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눈이 깜빡거렸다. 발가락이 꾸욱 접혔다. “와우···.” 이승아의 표정이 부끄러움으로, 미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보는 이쪽이 다 놀라서. 설탕 한 스푼을 그대로 퍼먹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로맨스 드라마가 굉장히 보고 싶어질 정도로. “하, 참···.” 방금 전의 광경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된다. 아래로 살짝 떨어진 회색빛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동공으로 비치는 풋풋한 감정.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미묘한 음습함. 그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로맨스물 한 편 뚝딱이었다. “···.” 그때. 현관에서 삑삑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나왔다.” 이승호가 태연한 표정으로 걸어들어왔다. 한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있다. “아.” 이승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마치 혼자 애니메이션 보던 중, 부모님이 방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녀는 정색하며 그를 바라봤다. “···복 받은 새끼. 넌 용돈 절반으로 줄여라.” 그를 보고 있자면,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 이승호는 어이없다는 듯 의문 부호를 떠올렸다.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중지였다. 그는 사 온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아.” 이승아는 그걸 보고 눈빛을 빛냈다. 저게 있었지. “흠흠~” 이승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냉큼 그걸 열어젖혔다. 봉투에 든 간식이 이것저것 많았다. 뒤적거리다가 매콤 감자칩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눈치껏 사 오긴 했다. “···이솔은?” 집 안을 살피던 이승호가 물었다. “공부에 집중 안 될 것 같다고, 먼저 돌아간대.” 이승아는 이솔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당당하게 말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시 뽀짝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다다다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나가면서 안 마주쳤어?” 이승아의 물음에. “안 보이던데.” 이승호는 간식을 선반 위에 정리하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나 보다. 참 부끄러움이 많은 언니다 싶었다. “···.” 가만히 선반을 정리하던 이승호가 떠보듯이 물었다. “···말했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반 위를 향하고 있었다. “말했지.” 이승아도 괜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그도 그럴게. 나중에 돼서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내가 말하는 편이 더 낫잖아.”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고백받았을 때 이리저리 설명하며 거절하는 것보다는. 구차하게 이승호가 직접 말하는 것보단. 역시, 다른 사람이 말하는 편이 신빙성이 오를 테니까. 또 상처를 주진 않을 테니까. “···.” 이승호도 동의한다는 듯 조용히 있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 턱에 손을 괸 이승아가 헛웃음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감정 중에 연애 감정만 흐릿하다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생겨난, 저 이상할 정도로 기민한 눈치와 등가교환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야. 어디 가냐.” 이승아가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이승호를 붙잡았다. “? 왜.” “아니, 뭘 당당하게 지나가냐고.” 이승아는 눈을 찌푸리며 그를 추궁했다. 당당하게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도와줬으니까, 너도 나 좀 도와야지.” “······원하는 게 뭔데.” 이승호는 잠시 침묵했다가, 주춤주춤 몸을 돌리며 물었다. “크게 어려운 건 아니고.” 이승아가 휴대폰을 두들겼다. “이거 봐봐.” 화면을 내밀었다. 그걸 본 이승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코믹 축제?” “응, 다음 주 주말에 여기에 부스 열 생각이었거든.” 코믹 축제. 일정 기간마다 여는, 모든 오타쿠들의 오프라인 행사. 2차 창작물들을 사고팔거나, 코스프레를 볼 수 있는 이벤트 회장인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행사가 아닌가. 이승아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장래 희망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주기적으로 이곳에 참여하곤 했다. “원래 오기로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갑자기 입원해서.” 그런고로. “이번에 행사 뛰는 거 도와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