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썩어빠진 놈들이 너무 많다. 그걸 다 때려잡을 수는 없는 게 천추의 한이라는 생각을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할 것이다. 나는 사학과를 나오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나라를 조금 더 좋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취지로 행정고시를 쳤고, 공무원이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임용 6년 차에 특별 진급으로 서기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류정현 같은 국장 새끼가 자기는 어떻게든 차관보 진급을 해야 하고, 나중에는 차관까지 올라갈 거라며 복지 예산을 정치인의 보여주기식 정책에 돌려버렸다. 나보고도 자신을 따라오면 2년쯤 뒤에 과장 자리를 내어주겠다고 큰소리치길래 나는 엿이나 먹으라고 했다, 참.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난리를 쳤음에도 수많은 가정에 큰 도움을 줄 막대한 양의 피 같은 세금이 정치인 보여주기식 정책에 쓰여버렸다. 설친 대가로 나는 어디 한직에 처박히게 되었고 말이다. 슬쩍 타협했으면 8년 차에 중앙부처 과장 달고, 높은 확률로 행시 출신 차관까지 올라가서 노후에는 대기업 상무, 전무 이사까지 갔을 거다.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내가 출세 내던진 바보 같은 짓거리는 똑같이 하겠지만.' 그때 사건으로 힘이 다 빠져 버려서... 조선에 전생하고는 좀 편하게 살아야지 했는데... 진해 현에 가니 전생에는 내가 도울 수 없었던 백성들을 직접 도울 수가 있었고, 집현전에 가니 조선 백성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편히 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일을 계속하게 된 거다. 미치겠다, 정말. "...... 수찬 나리,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방원법을 제정하셔서 수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려 하시는 데 말이야... 이 법을 악용하려 드는 인간들 또한 왜 이다지도 많은가 이 말일세." 나의 말에 김만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어찌 다 선하기만 하겠습니까? 저도 장사하면서 온갖 쓰레기 다 봤습니다." "...... 그랬겠지." "그래도 방원법은 이제 막 시작한 제도가 아닙니까? 이 정도면 잘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방원법이 이대로만 가면 꽤 괜찮을 거라 생각하긴 한다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개처럼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 세상에서 부정부패를 완전히 없앤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만 천천히, 꾸준히 노력해서 조금씩 개선하는 건 가능하다. 지금이 조선 초기라는 걸 고려하면 고작 이 정도 부정부패에 화를 내는 내가 이상한 것이 맞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는데. "백성들이 알 수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는 실제로 일어난 것의 1~2할도 되지 않지. 실제로 파고 들어가면, 5배, 10배는 넘는 규모의 비리가 있을 것인데." "...... 그렇겠지요." "물론, 거기까지도 눈 감고 넘어간다 치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21세기 한국에서도 이방원하면 '철퇴'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태종 이방원은 무시무시한 숙청 군주로 여겨진다. 하물며 조선에서는 어떨까? 왕권에 도전하면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뚝배기를 날려버리는 악귀 취급이다. 물론, 왕권 도전이 없는 경우라면 이방원처럼 관대한 군주도 없다. 이분은 세 왕자 이름 적어놓은 공으로 아이들이 차고 놀았던 것이 엄연히 방술에 포함되기에, 신하들 모두는 대역죄에 준하는 죄니 일가족을 모두 죽여야 한다며 상식을 이야기할 때, 왕권 깎이는 것을 감안하고서 무죄방면을 명한 왕이니까. 그런데 방원법은 철퇴의 이방원이 자기 이름을 걸고 실행한 법임에도, 벌써 꼼수를 쓰는 인간이 나왔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패는 더 심해질 것이라는 거지. 태상왕 전하께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신 데도 이런 짓거리를 벌였다는 건... 뭐, 굳이 입 아프게 말 더 안 하겠네." 1결 18두의 세금을 어떻게든 소작농들에게 전가하고, 부자들은 늘어난 세금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온갖 술수를 다 쓸 거다. 공납으로 해 먹는 방법도 점차 진화할 거고 말이다. 그런 꼴을 볼 바에야 이방원이 늘 써먹는 방법, 인상적인 일벌백계로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내 은퇴가 늦어지더라도 말이다.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명이라도 더 구할 거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김만덕을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 관아 가까이 갔을 때 포졸이 내게 창을 겨누었다. "...... 통금 시간인데 왜 이렇게 많은 무리를 끌고 관아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당장 물러나십시오. 안 그러면 관아의 포졸을 불러와 나리를 추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집회의 자유가 있는 21세기에도 밤늦은 시간 집회신고도 안 하고 시청 청사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다니면 체포당할 수가 있다. 하물며 조선에서야 말해 뭐 하겠는가? 반역죄까지는 아니라도 태형 정도는 당해도 싼 죄다. 괜히 저항이라도 하면 진짜로 반역죄 혐의를 받아 목이 달아날 수도 있고 말이다. 따라서 이 포졸의 조치는 지극히 옳다. 그러니 나도 공무원답게 절차를 갖춰서 대답해 줘야겠지. 내 손에 들고 있는 마패를 포졸에게 보여줬다. "나는 암행어사 김대붕이다. 지금 나는 급한 공무를 위해 안성 관아에 온 것이다." "송구합니다, 나리." "어서 관아의 문을 열어라." "나리, 지금은 통금 시간이라 군수 나리께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날이 밝으면 다시 와주십시오." 그의 말이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니 잘하고 있는 저 포졸에게 괜히 실랑이를 걸거나 화를 내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 대신에 나는 김만덕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김만덕이 내가 임금께 직접 받은 교지를 펼쳤다. "어명이오!" 어명이라는 말에 포졸들이 바짝 엎드렸다. 그 안의 내용을 다 읽어주니, 저들은 한결같이 얼굴에서 식은땀을 비처럼 흘렸다. 군교(부사관, 장교에 해당)급이 아닌 포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어명으로 여기를 마음껏 감찰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버썩 얼어붙은 거겠지. "어서 군수 나리를 깨우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본 어사는 어명에 따라 안성군을 철저히 감찰할 것이니, 너희는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하라." "예, 나리!" 조선에는 지금까지 암행어사 제도가 없었다. 그러니 암행어사가 뭔지 아는 사람은 과장 조금 보태서 이방원, 세종대왕님, 그리고 나밖에 없다. 그래서 어명을 받아 어떠어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한 교지가 필요했다. 안 그러면 포졸이 저 새끼 역도놈이라면서 체포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내 손에 진품 교지가 있는 이상, 이제부터 이 관아의 포졸들은 내가 죽으라면 죽고, 춤추라면 춤을 춰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만덕, 어디부터 감찰하는 게 좋겠나?" "소인이 생각했을 때, 방원법에서 가장 문제가 될 것은... 세금을 징수할 때 기준이 되는 됫박입니다. 됫박에 들어가는 쌀의 양을 1할 정도만 늘여도, 백성들에게 무려 1할이 넘는 세금을 더 징수할 수 있습니다." "됫박 하나만으로 1할이 넘는 세금을 횡령할 수 있다 이거지?" "예, 어사 나리." 나는 관아의 문을 지키고 있던 포졸 중 한 명을 가리키고서 말했다. "관아의 창고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게." "예, 나리. 이쪽입니다, 따라오십시오." 포졸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 있는 쌀가마니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컸다. 이 자식들 이거 됫박 크기를 교묘하게 속여서 규정보다 더 걷은 게 틀림 없는 것 같은데. "...... 됫박 가져오게." 됫박을 받자마자, 나는 곧장 조선 도량형 표준 측정기인 유척을 꺼내서 됫박의 크기를 쟀다. 여기 사또도 바보 멍청이는 아닌지 김만덕이 말한 것처럼 됫박의 크기를 실제 표준 됫박과 비교했을 때 1할 넘게 키우는 짓까지는 안 했지만... "음, 됫박의 크기가 5푼(5%) 정도 다르군." 안성 백성들은 세금을 낼 때 자기도 모르게 5%를 추가로 내고 있었다는 거다. 이게 1 됫박일 때는 얼마 안 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다 합치면 쌀 수십 섬 어쩌면 수백 섬 어치는 될 거다.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공물로 바쳐질 배도 보니까,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여기가 뭐 무등산 수박처럼 수박 하나에 1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고급 배를 다루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크기가 생각보다 좀 작은 것 같다. "공물은 이미 다 올려보낸 건가?" "아직 공물로 바칠 배를 다 구하지 못해서 사들이는 중입니다." 포졸의 목소리, 표정, 눈빛, 몸짓을 보니 대충 알 수 있다. 분명히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 있다는 것을. "배는 어디에서 사들이고 있나? 새로이 시행된 법도에 따르면 고을의 장시에서 사야 할 텐데..." "저 그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내부 고발이다. 그래서 군 부조리 척결이 어렵다고 하지. 부조리를 못 참고 고발하면 고발자의 남은 군 생활 동안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해서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 자네 고향이 어딘가?" "전라도 광양현입니다. 군역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한다면, 본 어사의 직권으로 자네를 고향에 돌려보내 주겠네." 어차피 군역은 교대로 하는 거라, 내가 한 번쯤 빨리 보내줘도 크게 형평성에 어긋나지는 않을 거다. "칠장사의 승려를 통하여 사들이고 있습니다." "...... 그렇군." 내가 그렇게 정보를 캐내고 있을 때, 창고 안으로 군수가 서둘러 들어왔다. 암행어사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겨, 옷을 아주 정갈하게 차려입고 왔다. "아이고, 김 어사.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 여독부터 좀 풀고 날 밝은 내일 하는 것이..." 어, 나는 범죄 현장에서 범죄자와 타협 따위 안 해. "이제부터 안성 관아의 창고를 어사의 권한으로 잠그고, 안성 군의 모든 업무는 본 어사가 대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군수께서는 숙소로 돌아가 편히 쉬시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 아아, 이것이 바로 봉고라는 것이다. 21세기에서도 공포의 상징으로 불리는 '압수수색'이라는 거지. 그리고 수색을 마친 다음, 나는 어사의 직권을 조금 남용해서 안성 군수를 한양으로 보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양에 가면 검은색 곤룡포를 입은 이방원이라는 분이 철퇴를 들고 반갑게 맞아주실 거다. "...... 자, 이방 이제 우리 다시 건설적인 대화를 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