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김만덕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다. 내가 죽으면 김만덕은 죽는 거고, 김만덕이 죽으면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이 크게 올 거다. 더 나아가 김만덕은 나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의 증거로 겨울이를 내 첩으로 줬다. 그러다 보니 우리 둘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게 바로 정경유착의 끝판왕이라고 봐도 되겠지. 한국에서는 안 좋게 보여지겠지만, 조선에서는 합법이다. 따라서 김만덕에게는 나랏일이라도 어느 정도 거리낌 없이 상의를 할 수가 있는데. 내가 그에게 말한 기밀은 절대 그의 입을 통해 새어 나가는 일이 없다는 신의가 있기에. "그러니까 태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께서 수찬 나리께 경기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방원법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있는지 감찰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는 겁니까?" "그렇네. 덕분에 아주 죽을 맛이지." 방원법은 엄밀히 따지자면 입법 준비 중인 법이다. 그러니 조선 사람 99%는 방원법이 뭔지도 모른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 TV, 라디오가 없어서 가뜩이나 정보 전달이 느린 세상에서 입법 예고도 안 뜬 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을 수야 없지. 그러나 방원법이 만들어져 시행될 거란 사실은 아직 공표가 안 됐을 뿐이지, 딱히 엄청난 기밀이 아니라 알 사람은 다 안다. 김만덕도 한양 시전에서 제법 세력을 갖춘 지 오래인데, 조정의 관리들이 뭐 때문에 갈려 나가고 있는지를 모를 수가 없다. "경기도의 11개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감찰하여야 한다니, 아주 힘드시겠습니다." 저기 11개 군현 중에 목사(정3품 상계 당상관)가 파견되는 고을만 무려 4개, 군수(종4품)가 파견되는 고을도 3개나 있다. 한 마디로 나는 앞으로 나보다 더 높으신 분들이 있는 곳에 쳐들어가서 감찰 활동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일 처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면 사극에 나오는 암행어사 노릇, 즉 관아에 마패 들고 쳐들어가서 '압수수색'을 한 번 제대로 갈겨줘야 한다는 거고 말이다. "감찰도 감찰인데, 더 중요한 건 나를 도와줄 믿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해."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단순히 칼 좀 쓰는 녀석들을 찾으시는 건 아닌 것 같군요." 나를 지켜줄 만한 전력이 될 이들을 찾는 건 의외로 쉽다. 한양 곳곳에서 비번 중인 갑사들을 돈 주고 고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갑사들의 무술 실력, 전투 능력은 어지간한 특수부대 병사들만큼은 될뿐더러, 저들은 말 유지비 때문에 항상 돈에 쪼들리는 녀석들이다 보니... 돈만 제대로 준다면 나를 잘 지켜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갑사를 뽑는 갑사 취재라는 시험이 '한자'로 된 논술 시험을 치는 게 없다 보니 일자무식한 놈들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면 전직 무관이나 무과 준비하는 이들을 데려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할 텐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방원에게 의심받기가 딱 좋다. 아니지, 지금 나를 믿는 정도를 고려했을 때 그냥 '중대한 실수'한 정도로 넘어가 주고 나를 황희 정승 부려 먹듯이 부려 먹고 끝나겠구나. "글을 쓸 수 있고, 회계도 좀 볼 줄 알아야 하고, 장사에도 눈이 밝은 사람이 필요하다네." "...... 저희 가게에 김 행수, 사환 김복돌, 장복이가... 제법 믿을만합니다." "데려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수찬 나리께서 더욱 크게 출세하시면 하실수록, 저는 그만큼 장사를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련탁생이라는 건가?" "예, 같은 연꽃 위에서 태어난 중생이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처럼... 수찬 나리와 저는 이미 한 마음 한 몸이 아닙니까?" 김만덕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나리께서 류정현 그 작자를 그리 보내고 나서, 시전에서의 제 입지가 많이 커졌습니다." "그런가?" "예, 나리. 덕분에 여러 대감, 영감, 벼슬아치, 중인, 상인 댁에서 저희 물건을 많이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나리께 잘 보이려고 하는 경기 수영의 한 권관께서 조금 낡은 대선 2척을 아주 싼 가격에 넘겨주신 일도 있었죠. 시세의 2할 5푼(25%)정도 되는 가격에 넘겨주셨습니다." "이제 배까지 가지게 된 건가?" "여태까지는 300섬(54톤) 정도 실어 나를 수 있는 배를 한 척밖에 가지지 못했는데, 시전에서의 장사가 잘되고 싼 가격에 넘겨주셨기에 살 수가 있었습니다." 21세기 현대 국가에서야 해군에서 쓰던 전함을 민간인에게 넘기는 일이야 없지만, 그건 현대 국가의 이야기일 뿐이다. 조선에서는 군선으로 쓰던 것도 군대에서 쓰기가 좀 애매하면 민간인 업자에게 파는 일이 흔하다. 당연히 화포는 다 떼어버리고 말이다. 그나저나 김만덕도 이제 대선을 두 척이나 가지게 되었다는 건... 진해에서 올라오는 모든 특산품을 한양뿐만이 아니라 한양 근처에 있는 큰 고을에도 팔겠다 생각하여 통 크게 투자한 것이겠지. "나리를 돕는 것이 제 성공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혹여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나리를 따라가면 어떻겠습니까?" "가게는 어쩔 생각인가?" "제 밑에 있는 박 행수가 일을 참 잘합니다. 한, 두 달 정도는 맡겨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쉬운 여정은 아닐 텐데." 암행어사가 막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위험한 일은 아니라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험한 길을 말 타고 이리저리 누비고 다녀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겠는가? 김만덕도 벌써 40대 중반이라, 슬슬 몸이 예전 같지 않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내가 걱정하는 기색을 눈치챈 김만덕이 주먹을 쥐고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제 나이가 45세라고는 하나, 마음 하나만큼은 아직도 약관(21세)일 때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방원법은 단순히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만을 위한 법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김만덕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세금으로 인한 부담이 줄면, 그 돈으로 쌀밥만 지어 먹겠습니까? 고등어도 사고, 대구도 사고, 가끔은 과일도 사 먹을 것입니다. 가죽신도 사서 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제가 파는 곶감, 오동나무 식기, 멸치를 사줄 손님이 지금의 몇 곱절로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경제가 호황이면 먹을 것, 입을 것 등에 들이는 돈 씀씀이가 커진다. 한 마디로 소비가 늘어나서, 김만덕 같은 상인들의 매출이 확확 늘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상업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법이 바로 대동법이니... 방원법이 시행되고 나면 조선 전국에서 특산품 생산량이 급증하고, 지역 곳곳에 시장이 생길 거다. 그 시장의 상인들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대항해시대가 열려서 유럽인들이 인도를 향해 목숨을 걸고 항해를 시작한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한양으로 뛰어올 것이다. ‘대한양시대’가 열리는 셈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있는 모든 고을에 시장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부유해진 백성들이 소비할 물건을 나르기 위해 바닷길도 열릴 것이고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물자가 전국 곳곳에서 들어오고 나가며 소모가 되겠죠. 그 과정에서 상인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돈 욕심이 가득하군." "상인이 돈 욕심을 안 부린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돈 욕심 안 부리는 상인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걸 믿느니 차라리 예쁘고 날씬한 여자에게 모텔에 가자고 하면서 '오늘은 손만 잡고 잘 거야, 오빠 믿지?'라는 소리를 하는 남자가 정말 손만 잡고 잘 거라 믿는 것과 동일한 거다. 손만 잡다가, 가슴도 만지고, 그러다가 성관계도 맺는 되는 거고... 자연스럽게 그날부터 사귀기 시작한 1일이 되는 거지. "소인은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남들이 다 가난해 굶어 죽는데 저 혼자 부자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성정이 남들 고통받는 걸 알면서도 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홀로 부유한 자는 결국에는 처참한 꼴을 당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경주 최 부자댁인가? 그 집안은 동학 농민운동이 벌어져서 양반 가문이 싹 다 썰려 나갈 때도 평소 워낙 많이 베풀었기에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계속해서 베풀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덕을 많이 쌓은 덕분에 남들 다 죽어 나갈 때 살아남았다는 부자가 의외로 많다. "나라에 도움이 될 뿐 더러, 저의 사리사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인데. 제가 나설 수 있으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나한테는 김만덕 같은 이가 꼭 필요하다. 저 사람이 있어야 시장에서 공물 가격으로 삥땅 치는 아전을 잡아낼 수 있고, 사찰에서 벌이는 헛짓거리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 지금 당장 떠나야 하니, 서둘러 채비하게나." 그리고 나는 곧장 암행어사 출두를 위해 길을 떠났다. “겨울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아니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나 혼자 중얼거린 소리에 김만덕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