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호조 본청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화기애애했다.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이 활짝 피고 그런 건 아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미소가 활짝 피어있다. 모든 조선의 관료들을 '대학원생'으로 만들어 버린, 21세기 대학교수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종대왕님의 업무 세례에도 불과하고 무려... 10일 가까이나 '정시퇴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호조 판서 황희는 자기를 보고 인사 안 하는 큰 죄를 저지른 참상관을 보고서도 껄껄 웃었다. 원래라면 정신줄 놓고 일 생각만 하는 걸 보니, 아주 충신 났다면서 일 폭탄을 던져주어 '예법'에서 벗어난 행동을 질책해야만 하는데. 그런 갈굼조차 안 하고 싶을 만큼 다들 행복하였다. "자, 오늘도 다들 정시퇴청을 위해 열심히 일하세나." "예, 판서 대감." "김 정랑, 각 고을에 설치되는 장시를 감독할 관원들의 녹봉에 얼마나 예산이 필요할지 계산 다 한 건가?" "예, 대감. 그리고 세금이 얼마나 걷힐지도 대략 계산해 두었습니다." "이번 고과는 호조 관원 모두가 상상(최고 등급)을 받을 수 있겠군. 아주 바람직해." 이게 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집현전 GPT 김대붕에게 맡긴 뒤 해결책을 짜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희는 자기를 대신해 열심히 일해주는 집현전 노예를 위해 인삼이랑 말린 전복 같은 귀한 식재료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소한테도 종종 보양식으로 낙지를 먹이기도 하는데,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는 와중, 녹색 옷을 입은 말단 관리 한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황희를 찾아왔다. "대감, 큰일 났습니다." "허허,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뭐, 창고에 쌓아놓은 쌀을 쥐가 먹기라도 했나? 쌀 몇 가마 없어지는 거야 늘 있는 일인데..." "그런 일이 아니라... 집현전의 김 수찬 나리께서 상의원 장 별좌 나리와 함께 농기구를 새로이 17가지나 고안했습니다." 황희는 그 말을 듣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10가지가 넘는 새로운 농기구를 만들어냈다니. 그것도 김대붕을 집현전에 박아 넣고 모두가 돌려쓰자 말했던 게 얼마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저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러나 저 말단 참하관이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이 훈훈한 분위기를 깨는 거짓말을 일부러 하지는 않았을 터... 오늘도 당연할 거라 생각했던 정시 퇴청이 날아가 버린 현실에 황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세히 말해보게." "김 수찬의 제안을 받아 상의원 장 별장과 장인들이 야근을 불사하더니 무려 새로운 농기구 17가지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 효능이 몹시 뛰어나다고 합니다." 좋은 농기구를 만들면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다.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 당연히 백성들의 생활 수준도 올라간다. 하루 두 끼만 먹던 백성들이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며, 지주인 양반들도 더 많은 쌀을 얻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새로운 농기구가 만들어졌다는 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문제가 하나, 정말 딱 하나 있다. 그 새로운 농기구를 보급하는 데 필요한 예산, 보급하기 위한 방법, 정책을 짜는 일의 중심에는 '호조'가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희는 농기구가 가져다줄 이익보다 앞으로 끝없는 야근에 시달려야 하는 자신의 미래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 어디 어떤 물건인지 장계부터 보여주게." 황희는 참하관에게서 낚아채는 기세로 장계를 가져왔다. 장계에 적힌 내용을 하나, 하나 읽어 나갈 때 황희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났으니. 이런 물건들이 만들어지다니 앞으로 농업 생산량은 제법 크게 오를 것이다. 얼마까지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황희 본인도 막대한 밭을 가지고 있는 땅 부자가 아닌가. 그러니 재산이 어마 무시하게 늘어날 것이다. 탐관오리까지는 아니라지만, 돈이 몹시 좋은 황희로서는 매우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허허, 참으로 좋구만. 이런 농기구들이 만들어지면 농사짓기가 참으로 편해지겠어." 용미(수력을 쓰는 양수기)를 쓰면 여태까지 수로를 팔 수 없었던 곳에도 물을 보낼 수가 있다. 그러면 그만큼 개간할 수 있는 땅이 늘어날 것이다. 족답식 수차라고 적힌 기구를 써도 물을 밑에서 위로 끌어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거중기라는 놈은 김대붕이 보를 지을 때 '흙이나 돌을 들어올리기 편하게 한다.'라고만 해놓았으나... 이는 성을 지을 때에도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다. 성 지을 때 사람이 다치면서 생기는 손실 대부분이 무거운 돌을 일정한 높이까지 들어 올릴 때 생기는 건데... 이걸 줄일 수 있다고? 빨리 무조건 도입해야 하는 도구다. "이 도구들을 도입하면 참 좋아지겠군... 당장 우리 집안의 소작농들에게도 이것들을 쓰게 해야겠어. 게다가 생김새가 아주 간단한 것이, 관공장(관아에 소속되어 일정 기간 무료 노동을 제공하는 장인)들도 쉽게 만들 수 있겠지. 참 좋기는 한데..." 이 많은 가짓수의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예산과 도입하는 데 필요한 정책은 '호조'에서 짜야 한다는 사실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황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저 장계를 보고 지금쯤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실 태상왕(이방원)께서 얼마나 빠르게 도입하라 명하실지를 말이다. "이제 정시퇴청은 끝이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에 불과했지만 '정시퇴청 종료' 선언은 모두의 귀에 쏙쏙 박혔다. 호조 관원, 서리(아전과 비슷함), 공노비들까지 모두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다들 뭐하나? 야근 준비해!" 야근 준비 선언 후, 세종의 명을 전하러 내시가 호조를 찾아왔다. "태상왕께서는 전하와 왕족분들이 함께 새로운 농기구들을 적전에서(임금이 직접 친경[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의식]하며, 각종 농법을 시험하는 곳) 쓰는 모습을 보시며 몹시 만족하셨습니다." 호조 관원들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농기구가 여럿 만들어졌는데, 그걸 태상왕이 직접 보는 앞에서 전하와 왕족들이 실험하였고 그를 본 태상왕께서 흡족해하신다고? 맙소사, 이건 무조건 서둘러야만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불경한 죄를 짓는 꼴이 되어 어떤 슬픈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리고 전하께서 망극하옵게도 호조와 공조에 어식(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밥상, 식사)을 내리셨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줄 테니 죽도록 일만 하라는 뜻이었다. 황희를 비롯한 관원들은 그 말을 듣고 엎드려 임금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너무 감사한 나머지 관원들의 눈시울이 하나같이 붉어졌다. 이건 절대 정시 퇴청이 물 건너가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충군 애국하겠다는 각오였지. 동시에 황희는 하나 더 깨달았으니. 김대붕을 너무 심하게 굴리면, 그놈도 우리에게 일 폭탄을 던져온다는 걸 말이다. ** 한편, 이방원은 엔간하면 잘 움직이지 않는 세종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바마마, 소자가 평소 잘 하지 않던 농사일을 하고 보니 허리와 어깨가 아파집니다." 이방원은 껄껄 웃었다. "그건 도 네가 운동을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성현(공자)께서도 선비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육예 중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중히 여기시지 않았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바로 몸을 열심히 움직여야, 서책을 오래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도, 너는 백성들을 아끼고 신하들을 중히 여기는 덕을 갖췄으나... 몸이 그래서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성인병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몸이 뚱뚱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방원의 눈에 세종은 너무도 뚱뚱했으니... 이렇게 종종 데리고 나와 가끔이라도 몸을 움직이게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정무에 힘을 쓰는 것도 좋지만, 후원을 걷거나, 말을 타며, 때로는 강무(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에 참여하여 몸을 쓰도록 해라." "예, 아바마마..." 조선은 효의 나라다. 그러니 아버지인 태상왕이 운동하라 하면 해야 하는 거다. 그래서 세종은 지금까지는 제법 뚱뚱하지만, 심각한 수준까지 몸집이 비대해지지는 않았다.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쟁기는 김대붕이 새로 고안해서 만든 쟁기다. 어디 쓸 만 하느냐?" "작년에 친경(임금이 직접 밭을 가는 행사)을 할 때 썼던 것보다 더 잘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백성의 고됨을 덜어줄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세종에게는 다행이 아니었다. 어의나 내시들도 태상왕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라 멈추자고 이야기를 안 해줘서 세종은 온몸에서 땀을 흘릴 때까지 밭을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세종의 온몸에 땀이 잔뜩 흐르는 걸 보고서야 허허 웃으며 말렸다. "이제 그만해도 좋다." "...... 감사합니다." "그런데 향(문종의 이름)이는 아직도 용미를 보고 있느냐?" "예. 용미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방원은 문종 이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향은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돌아가며, 낮은 곳의 물을 끌어 올리는 양수기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와, 계속! 계속 더 돌려라!" 이방원은 자기 손자가 이런 농기계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고서 껄껄 웃었다. 평상시에는 왕세자라 공부에만 열중해야 해서, 그 중압감을 견디느라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새로운 기계 돌아가는 걸 보고 웃고 있는 모습이 저 나이대 아이와 딱 맞아 보였기 때문이다. "향아." "할바마마! 소손이 김 상온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저 용미를 한강에 설치하면 물을 잔뜩 퍼 올려서 수로를 채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 짓기가 참으로 편할 것 같습니다." "역시 너도 네 아비를 닮아 참으로 똑똑하구나." "소손도 할바마마, 아바마마처럼 어린 백성들을 잘 돌봐줄 수 있는 임금이 되고 싶습니다!" 이방원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고작 5살 먹은 손자 이향의 마음에도 벌써 애민 정신이 뿌리를 내리다니. 자기 셋째 아들 이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며, 누구보다 지혜로우니... 장차 조선의 백성들을 몹시도 이롭게 할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조선을 지키지 못하게 되더라도, 조선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번영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 그는 쉴 수 없었다. "도야." "예, 아바마마." 이방원이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원나라는 보초(저화와 같은 종이돈)를 써서 몹시 부강해졌다. 조선에서도 이미 오승포와 같은 포화(면포로 된 화폐)를 쓰고 있으니, 굳이 보초를 못 쓸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 전국 모든 고을에 시장이 설치되고, 화매소(쌀로 저화를 교환하는 곳)를 설치한다면... 백성들도 들고 다니기 힘든 쌀 대신 저화를 쓰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세종은 조금 떨떠름하지만 동의했다. 화폐가 널리 쓰이면 양반들은 더 이상 재산을 '쌀'로만 저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양반들의 창고에 쌓여 썩어나갔던 쌀이 쏟아져 나와 백성들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며, 백성들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더불어 종이돈은 그냥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아니다, 저화는 이전에 실패한 바 있으니...” “아바마마, 그러면 송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동전을 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저화는 종이쪼가리라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러니 형태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귀한 물건 취급을 받는 '구리'를 녹여서 동전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세종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역시 현명하구나. 그래, 동전을 널리 쓰게 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