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라는 학문은 정치를 위한 학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유교가 상업을 천시하고, 나이만 처먹었으면 무조건 위라는 질서를 합법화하였으며, 무조건적인 효도만을 중요시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기독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이 빌어먹을 놈들은 ‘정당한 사치’를 죄악시하고, 세금을 적게 걷는 것과 주나라(청동기 시대 문명)를 신성히 여기는 머저리들이라는 거다. 지금 조선에서 ‘재정 정책’을 총괄하는 이가 바로 영의정 류정현인데... 그놈의 생각이 딱 그렇다. 세금을 적게 걷고, 국가 지출을 대책 없이 줄이면 백성들이 잘 살 게 될 거라 믿는 머저리. 이런 놈이 호조판서를 거치고, 영의정이 되어서 재정 관리를 잘한 명재상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문제다. 나야 뭐 언제라도 사직상소 내고 낙향할 각오로 '소신 발언'을 할 수 있으니... 조선의 재정 정책을 뜯어고칠 생각을 하는 거고 말이다. '잘못된 것만 고치고 나야 낙향해버리면 그만이지.' "지금 조선의 문관은 지방관을 합해 총 570여 명이네, 반면 조선 군현의 숫자는 364개에 달하고. 그러니 김 수찬 자네의 주장에 따르자면 문관의 숫자를 최소 6할(60%)이 넘게 늘려야 한다는 것인데. 조정은 가난하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관원들의 녹봉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이방원이 재정 확대 정책을 펴는 덕분에 조선의 재정 상태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즉, 조선 전기, 중기, 후기를 통틀어 지금의 중앙재정이 가장 튼실하다는 거다. 나도 이걸 믿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된 게 다 조선 특유의 '세금은 적게 걷을수록 무조건 좋다.'라는 머저리 같은 생각 때문이다. 이러니 인조 때가 되어서는 백성을 위한다면서 '토지세' 빼고는 사실상 세금을 안 내는 양반들을 위해. 토지세를 흉년이나 풍년이나 동일하게 최하치만 걷는다는 영정법이라는 법안을 만든 거지. 부자들에게 걷는 세금의 실질 징수액이 2%가 안 되는 나라가 퍽이나 잘 굴러가겠다. "성현께서는 세금을 적게 걷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 말씀하셨네. 그 말씀대로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최대한 적게 걷고, 임금과 관리들이 사치를 삼가는 것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길이 되지 않겠나." 지배 계층이 부리는 사치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일이 사실 흔하긴 하다. 그러니 사치를 삼가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이 우유를 먹는 것도 사치라 하면서 '젖소'를 기르는 제도를 폐지하거나 축소해 버렸다. 어리석은 짓이다. 젖소를 더 효율적으로 기르기 위해 낙농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면, 백성들도 가끔은 우유를 마시는 나라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세금을 무작정 줄여서 관리들 월급은 아주 적게 주고, 아전들에게는 월급을 아예 안 주니 이들 모두는 '뇌물', '명절 선물'과 같은 걸로 품위유지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나 역시 쌀로 환산하면 수천 섬을, 한국 돈으로 정확히 환산은 안 되지만 수억 원, 아니 어쩌면 10억이 넘게 선물을 챙긴 것이고 말이다. 이러느니 정9품 관료 한 명당 연봉을 1억으로, 재상쯤 되면 연봉이 100억 정도가 되게 책정해버리면 부정부패로 증발하는 세금이 아예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니까? "소관도 당연히 성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임금과 양반 관료들이 사치를 삼가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국시(국가 정책 목표)는 여민동락, 백성과 임금이 모두 즐거워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세금을 적게 걷어야..." 내가 세종 앞에서 문과 전시를 치를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 이렇게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었다. 백 마디 맞는 말을 해도, 그걸 증명할 실적이 없으면 탁상공론이 돼버리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근거인 실적이 있다. "소관이 진해 현감으로 있을 때 양반을 포함한 사민(모든 백성)에게 걷은 세금은 전임 현감이 부임하기 전보다 4할(40%)이나 많습니다." 나의 말을 들은 황희가 할 말을 잃었다. 자기가 알고 있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시간을 처절히 감내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꼴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가 원칙주의자 허조 대감처럼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이었다면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희는 부정부패 또한 실컷 저지르는 양반이기에. 그런 놈이 세금 줄여서 백성들 구하자고 말하다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이야. "그러나 걷은 세금을 사치 부리거나 축재하는 데 쓰지 않고, 보(저수지)를 쌓는 일에 썼고 상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였기에 사민을 이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소관의 생각은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습니다.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적절히 걷고, 적절히 써야만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래서 수찬이 생각하는 안은 무엇인가?" "전국에 있는 모든 고을에 장시만을 담당하는 관원을 두셔야 합니다. 그들이 장시의 질서를 감독하며, 상인들이 부정한 짓을 하고 내야 할 세금을 은닉하는지 철저히 감찰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시의 확대가 조선 모든 고을에서 도적 떼를 키우는 결과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말업(상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수찬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내 생각도 못 했네." "소관도 얼마 전 한양에 와서 집을 얻을 때 크게 당할 뻔하였습니다." 내 옆에 김만덕이 있었기에 바가지를 안 썼지. 그가 없었더라면 바가지를 잔뜩 썼을 거다. 그 미친 부동산 업자 놈은 관원인 나를 상대로도 '바가지'를 씌우려 했는데, 힘없는 백성들 상대로는 뭔 짓인들 못 하겠는가? 애초에 조선 후기로 가면 저놈들이 검계를 키워서 조선에서 '반역에 준하는 대처'를 해야 할 정도로 문제를 키울 거라니까. 그러니 아주 철저하게 감시하고, 감찰하며, 관리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저놈들이 암흑 진화를 거듭해서 혐성국의 상인처럼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대영제국이 한 행동은 명나라, 왜놈들에게만 하게 해야지. 조선인들에게 하게 하면 안 된다. "처음에 관원을 많이 뽑게 되면, 그들에게 줄 녹봉을 조달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해현과 같이 작은 고을에서도 장세로만 백미 1,000섬을 걷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평양, 개성과 같이 큰 고을에서는 과연 얼마나 걷게 될지 상상이 가십니까?" 황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관원을 많이 뽑아서 장세를 많이 걷어 큰돈을 벌자는 내 생각이 몹시 마음에 드셨나 보다. 저 양반은 죽었다 깨어나도 청백리는 못 되는 부류의 사람이니... 자기가 얼마나 해먹을 수 있을까부터 벌써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어찌 되었든 전국 각지에 시장이 설치된다면 조선의 상업과 경제는 앞으로 크게 발전할 거다. 어쩌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후추든 뭐든 찾으러 대항해시대를 만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공납으로 걷는 공물도 관청이 장시에서 직접 사들이거나, 장시의 상인들과 관이 협상하여 사들이게 되면 훨씬 많이 걷을 수가 있습니다. 사찰을 비롯한 부패한 이들이 끼어들 구석을 없애니, 더 많이 걷어도 백성들에게도 부담이 안 갈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겠군, 그렇겠어." "세금을 많이 걷을 수 있을뿐더러, 백성들의 민생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장시입니다. 흉년에는 저들이 가진 그나마 넉넉한 걸 서로 교환하여 버티고. 평상시에는 조금 넉넉한 걸 서로 교환하여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시장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면, 각 고을의 특산품이 이리저리 퍼지게 되면서 경제 규모는 더 커질 거다. 조선에서는 이런 경제 발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게 백성을 위한 일인데 왜 억제해? 무조건 장려해야지. "바람직하군. 그런데 이런 사실은 영상 대감께서 몹시 싫어하실 텐데." "충군애국이란 선공후사(나랏일을 자기 사적인 일보다 우선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관의 재주가 부족하기 짝이 없음에도,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발탁된 것만으로도 가문 대대로 자랑할 만한 일인데... 제 개인의 안위와 출세 따위에 연연하여 충언을 올리지 않고, 아부만 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영의정이 나를 죽을 각오로 탄핵한다고 쳐보자. 그러면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 사직서 쓰고 고향에 내려가면 된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예쁜 처자를 만나 결혼부터 하고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상소나 가끔 올리면 되는 거다. 내가 상업의 중요성을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님께 이미 알려 드렸으니... 조선은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할 거다. "태상왕, 금상(지금 왕을 의미)께서 자네를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알게 되었네." 황희는 그 말을 하고 나와의 대화를 정리한 것을 챙겨서 자리를 뜨려 하였다. "영상 대감께서 자네를 탄핵한다면 나도 반드시 도움을 주겠네." 그 말 뒤에 황희는 자리를 떠났다. 아니, 도움까지는 안 줘도 되는데. 어차피 내가 이 정도 충언 올린다고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를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니 그냥 '탄핵'당했으니 사직한다고만 하면 되는 거라 문제가 전혀 없는데. 그때 집현전 밖에서 아전들이 판서들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조 판서 대감, 아직 안에는 호조 판서 대감께서 계십니다." "병조 참의 영감께서는 예조 판서 대감보다 늦게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알아버렸다. 내 신세가 진짜 집현전 GPT랑 다를 게 없다는 걸 말이다. "...... 이게 맞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