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아니 세종에게 교지를 받고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식을 마치고 잔치가 베풀어졌을 때 내가 장원한 자라 그런지 아니면 버르장머리 없는 신참으로 찍혀서 그런지 붉은색 관복을 입은 당상관 여럿이 나에게 몰려들었는데. 어제 본 허리 굽은 저 아저씨는 허조 일 거고, 수염 난 모습이 왠지 푸근해 보이는 이는 황희일 거라 예상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역사 소설 같은 데에서 보면 세종 밑에서 일하는 재상들은 주인공을 새로운 대학원생 같은 존재로 여긴다 묘사되는 걸 봤는데. 일단 저 둘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게 딱 이거다. 군기 잡는 데 환장한 상병이 이제 곧 내리갈굼의 대상이 되는 가엽고 딱한 이등병을 보는 그런 눈빛 말이다. "나는 예조판서를 맡고 있는 허조네. 그리고 여기 내 옆에 계신 이는 호조판서를 맡고 있는 방촌이고." "조정에서 이름 높으신 두 분 대감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통 이렇게 신참이 숙이고 들어가는 말을 하면 까마득한 고참의 입에서는 앞으로 잘 해보자 기대한다 뭐 이런 격려의 말이 나오고... 그렇게 분위기가 흐뭇해져 가야 맞는 건데.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전시 답안지에다가 임금이고, 신하고 백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며 세금이나 뜯어간다고 써놓은 미친놈이다. 혹여 내가 이름 높은 재야의 선비여서 그런 말을 했다면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옳은 말이라며 넘어갔겠지만... 나는 이제 겨우 과거에 막 합격했을 뿐인 종6품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완전 X된 거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허조가 나에게 꼽을 줬다. "이야, 조선에 명재상이 났어. 장차 제갈공명, 악비처럼 조선을 떠받치고도 남을 인재라고. 내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자네 혹시 경전을 읽을 때 혀는 사람을 베는 칼이요, 입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문이라는 말을 읽어본 적은 있는가?" 여기에서 내가 택해야 할 선택지는 단 하나다. 일단 너무 나대서 죄송하다고 납작 기며 사과하는 거다. 사실 하려고 하면 조선 역사를 공부한 몸으로서 지금의 세금 정책이 왜 말이 안 되는지 화끈하게 증명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괘씸죄가 걸린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맞는 말이라고 또박또박 해대면 그건 눈치를 국밥에 말아먹은 머저리가 되는 짓이라고. "송구합니다." "조선에 태평성대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자네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일세. 하지만 세금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그렇지... 젊은 놈이 어떻게 태조 대왕 때부터 지금의 주상 전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정비하여 온 세금 제도를 그리 통렬하게 비난할 수가 있나? 천하의 충신이 났어." 조선은 예의범절의 나라다. 한국도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조선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예의 바르지 않으면 윗분께 찍히고 진급에 안 좋은 영향이 가는 정도가 전부라 할 수 있지만 조선에서는 예의가 바르지 않을 경우 '뭇매'를 맞는 나라다. 만약 내가 진해 현감으로 발령받지 않았으면, 나는 신입 관리 환영회(신참례)에 불려 가서 예의범절을 강제 주입 당했을 거다. 아전들에게 고개 숙이고 술안주 타오기라던가, 진흙탕 물에 들어가서 물고기 잡아 오기라던가 말이다. 예의범절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는 높으신 분에게 책잡히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법인데. 지금 백성들에게 세금 정책이 딱 그 꼴이라고? 아주 건방진 놈이야. 나 때는, 나 때는 이 정도 패기 넘치는 말을 하는 놈은 없었는데 말이야." 허조가 계속 화를 내자, 옆에 있던 방촌 그러니까 황희가 그를 말렸다. "젊은 혈기에 패기가 넘쳐서 저런 답안을 대과에 올린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상왕 전하(이방원)께서 그 이치가 틀리지 않다고 이미 말씀하셨네." "내가 그걸 몰랐으면 저놈을 지금까지 가만뒀을 리가 있나? 천덕꾸러기 애송이 놈이 썩어빠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여기까지 일으켜 세우며 힘써 만들어 온 세금 제도를 호랑이보다 무서운 제도라고 하는데 말이야. 살려둘 수가 없는 일이지." "자네는 사람이 뭐 그렇게 딱딱한가? 원칙도 좋고, 질서도 좋지만 때로는 유연할 줄도 알아야지." "에잉, 공자께서는..." "아이고, 그런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게.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해서 축하해주는 자리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황희는 넉살도 좋게 나의 옆자리에 허조를 앉혔다. 그러면서 나에게 눈짓을 주어 자신들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게 하였다. 원래 역사에서도 황희가 과격할 때는 과격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를 제법 잘했다고 하더니, 맹사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 브레이크 역할을 아주 잘하네. 비록 황희 저 인간이 부정부패의 화신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나를 살려준 게 맞으니,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를 청백리 황희 정승으로 생각하면서 극진히 모셔야겠다. "젊은 유생의 과한 패기를 두 분 대감께서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내가 한 번 더 숙이고 들어갔을 때 허조는 혀를 찼다. "나 때였으면 방방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끌려가서 선배 관헌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을 교육받았을 텐데. 자네는 운이 참 좋구먼. 나 때는..." 황희는 라떼 같은 소리나 계속하고 있는 허조를 손짓으로 말리면서 씩 웃었다. 아! 저 미소, 저 웃음은 마치.... 대학원생을 납치해 가는 교수의 그것과 똑같아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관원들은 저 인자한 미소를 보면서 역시 재상님들은 다르다, 아래 사람을 아끼는 마음과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가 저런 거구나 하며 감탄하겠지만... 저 인자한 표정에 속아 대학원으로 끌려가 노예가 된 놈들을 보아온 나는 안다. 절대 저 미소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이 자리에 올라 보니, 지금 조정에는 자네와 같이 젊고 유능한 인재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을 알겠네. 예조판서(허조)가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전하 앞에서는 자네가 건방지기는 해도 제도의 허점을 꿰뚫어 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바 있네." "송구합니다." "장원으로 급제한 자네에게는 고리타분한 칭찬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사실 자네와 같은 안목과 통찰력을 가진 이라면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 틀림없네. 상왕 전하께서도, 전하께서도 기대가 크신 것 같더군." "망극합니다." 황희가 나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 줬다. 그걸 받은 나는 고개를 돌린 뒤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 보는 눈만 좋아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네. 글을 천 번 읽는다 해도 그 안에 어떤 가르침이 담겼는지 의미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습니다. 글을 읽으면 그 문장에 담긴 의미까지 깨쳐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법이지요." "아직, 나는 진해 현감이 단순히 글을 읽는 것에 그치는 자인지, 의미까지 다 깨쳐 실천에 옮겨 행할 수 있는 수재인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황희가 한 말은 이거다. 네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기꾼인 건지, 아니면 정말 제대로 된 일꾼인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이 세상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가짜 군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네. 자네는 과연 어떤 부류일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 황희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조선에서 '가짜 군자'라는 말은 사람, 정확히는 양반들 사이에 쓰는 가장 격한 표현 중 하나다. 한국 욕으로 치환하자면 부모님 돌아가신 사기꾼 놈의 새끼 정도 되려나. 그런 표현을 써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겠다는 건... "뭐,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이지만 교육을 통해 선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 않은가. 자네가 젊은 나이에 보이는 게 많다고 오만하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자라면... 우리 재상들이 공맹의 도리를 받들어 자네를 엄히 가르치면 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네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진해 현감으로서 공무를 수행하는 걸 통해 보도록 하겠네. 부디 나를 실망 시키지 말게나." 황희는 이 말을 하고서 다시 한번 씩 웃더니 허조를 데리고 떠나갔다. 정말 신기하게도 말이다. 분명 내 앞에 차려진 음식과 술은 궁중에서 직접 제작한 최고급품일 텐데... 그것에서 나는 어떤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재상들에게 참교육(온갖 부조리 포함, 매일 야근 확정)을 당하기 싫다면 반드시 진해에서 최고의 실적을 내야만 한다고. "이렇게 된 이상, 사직이 좀 멀어지더라도 살아남고 보자." ** 그렇게 나는 돌쇠를 비롯한 몇몇 인원을 데리고 진해로 부임하게 되었다. 보통 사또는 부임하자마자 '막대한 특산품 선물'을 받고, 그것을 자기를 추천해 준 관리들과 신세 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상례다.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은 유배 풀린 해에 무려 쌀 1,000섬을 받았으니... 이런 식으로 조선에서는 특산품 선물 챙기는 게 중요하다. 하여 고을의 아전은 나를 보자마자... "사또, 이곳 진해는 멸치와 곶감, 오동나무로 만든 공예품이 유명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사또께 도움이 되고자..." "필요 없고, 당장 세금 장부나 가져오게." 나는 내 입으로 조선을 정상화할 방도가 있다 말하였다. 황희, 허조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겠다 말한 이상, 나는 이곳에서 일개 사또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임으로 답하여야 한다. "전하께서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나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