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에 미친 놈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돈을 은행 계좌에 모셔두기만 하면 썩을 뿐이라고. 그 말이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이. 1980년대에는 1억 원을 가지면 압구정에 51평 아파트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돈을 가지고 압구정에 원룸 하나도 못 산다. 그렇다고 돈을 막 쓰라는 말은 아니다. 너무 심하게 아끼며 저축만 하다 보면 돈의 가치라는 게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락하여서 손해를 보게 되니까 적절하게 써야 한다 이거지. 이런 맥락으로 양반들이 우국충정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납부한 세금(쌀)도 관아 창고에 쌓아놓기만 하면 썩어 없어질 뿐이다. “공방(토목 건설 담당자), 지금 우리 고을에 저수지를 지을만한 곳이 있는가?” “제가 알기로 동천, 서사천, 두동을 비롯해 6곳 정도가 있습니다. 찾아보면 더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마음 같아서는 저 6곳 모두에 저수지를 짓고 싶다. 저수지를 짓는 것만으로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고, 물길을 조금 트는 것만으로도 개간할 수 있는 땅이 많이 늘어난다. 고을 백성의 살림살이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는 거다. 쌀이라는 게 보관하고 1년이 지나면 맛없는 묵은쌀이 돼버리고, 3년을 넘어가면 죄다 썩어버리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고을의 수입 증진을 위해서도 필요한 곳에 투자하는 게 이득이다. “그러면 그중에서 개간하기 쉬운 땅이 주변에 많은 곳을 찾자면 어느 곳이며, 밭에 물 주기 좋은 곳은 또 어디인가?” “동천이랑 서사천입니다. 특히나 동천은 강이 제법 깊은 데다가 길이 또한 기니 물이 많습니다.” “동천에 저수지를 짓고, 물길을 새로 내야겠군.” “사또께서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신 후로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이 줄어들어, 저들이 살만해지기는 했습니다. 그럼에도 보(저수지)를 만드는 건 노동력이 보통 많이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토목공사, 특히 저수지를 만드는 건 사실상 성 쌓는 것만큼이나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게다가 조선, 특히나 조선 초기에는 저수지 만들기, 성 쌓기 같은 건 ‘역’, 즉 무료 노예 노동을 통해 노동력을 조달하는 것이니. 이는 백성의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악행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놈들이 쳐들어올 거 같으니까 성을 더 쌓으라고 했지만, 대신들이 나서서 ‘전쟁’이 일어날 거 같기는 해도 백성이 힘들어하니 지금은 좀 쉬자고 했던 것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역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무료 노예 노동을 시켜서이다. 그러니 노동에 걸맞은 정당한 대가를 준다면 딱히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들에게 품삯을 주면, 그 일이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닐걸세. 오히려 좋아하지 않겠는가?” “품삯을 어찌 주신다는 말씀이 십니까?” “백성들이 빌린 환곡을 농한기에 나와 일한 날에 비례해 깎아줄 생각이네. 더 나아가서, 정말 가난해서 입에 풀칠도 못 하는 이들에게는 농한기, 농번기 상관없이 일정한 일수를 채운다면 아예 환곡을 탕감해 주는 방법도 있겠군. 더하겠다고 하면 품삯을 주는 것도 고려하는 게 좋겠지.” 가난한 이들에게 봄이나 여름에 곡식을 빌려주고, 그걸 가을에 수확할 때 돌려받는 환곡 시스템이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이분모회록이니, 삼분모회록이니, 작서모니 하는 ‘이자 붙이기’ 놀이가 나오고 나서 썩어들어간 거지. 환곡이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강제 대출이 되고 원금(쌀 상태가 좋지 않고, 돌과 모래가 섞임)에 이자까지 받아 가는 그런 경우가 아직까진 없으니까.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은 가을에 원금만 상환하면 되는 대출이라도 몹시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농한기 때 일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토목공사를 시키고 그 대가로 일한 만큼 환곡을 줄여주겠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사또, 그러다가 고을 창고가 텅텅 빌 겁니다.” “공방, 우리 마을의 선비들이 고을을 위해 자발적으로 세금을 조금 더 내면 해결될 문제일세.” 21세기에도 상위 1%의 사람들이 세계의 부 절반을 독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진해현 선비들이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막대한 부를 보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금 제도는 이상하기가 짝이 없는 것이. 양반들이 가진 게 훨씬 많은데도, 징수하는 세금은 대부분 가난한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거다. 가난한 이들이 부담하는 세금이 40%라면, 양반들은 10%도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이러니 내가 선비 놈들에게 돈을 더 내놓아서 모두를 위해 쓰라고 협박했던 거다. “더불어 상인들에게 걷는 세금과 시장에서 걷는 세금까지 고려하면 저수지 하나, 두 개를 만든다 하여 적자가 날 일은 없지 않겠나?” “사또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네들보고 부담하라고는 안 하겠네.” 나의 말에 공방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내가 무슨 현감(진급 아예 포기함)의 힘을 써서 아전과 양반들 쥐어짜는 걸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저들에게도 머리 깨지기 싫으면 알아서 내놓으라 하겠지만. 나는 사람 고통받는 걸 보고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쟤들에게까지 부담하라고 하면 무슨 안 좋은 여파가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다. “부역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식사도 한 끼 제공하도록 하게. 예산은 넉넉히 줄 테니, 알아서 잘 처리하게나.” “예, 사또.” 진짜 언젠가는 조선의 세금 제도를 싹 다 뜯어고쳐서 양렴은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관리의 사회적 책임과 신분에 맞춰 어마 무시하게 많은 급여를 줘야... 부정부패가 줄어들어서 정부 예산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터이고 말이다. 공방이 나가자마자, 다른 아전이 들어오더니 말을 전했다. “사또, 상인 김만덕이 사또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돌려보낼까요?” “아닐세. 들여보내게. 내 그자에게 물어보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군.” 나의 말을 들은 아전의 표정이 수상해졌다. 내가 친히 조언을 구하겠다고 말한 상인을 어찌 대해야 하나 고민하는 거겠지. 이것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갈 거다. 이제 양반들도 김만덕에게 이유 없는 갑질은 못 할 거고 말이다. “...... 예, 사또.” 아전이 물러나자마자 곧장 김만덕이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두꺼운 장부 여러 개를 내밀었다. “이건 제가 사또께 드리는 성의입니다.” “대체 무엇인가?” “제가 보유한 재산을 쌀 한 톨 숨기지 않고 작성한 장부입니다. 특히 세금을 매길 때 중요한 어선과 감나무의 숫자 같은 건 철저하게 점검하고 기록했습니다." 조선에서 보통 선물이라고 하면 엄청나게 비싼 특산품이던지, 산해진미라든지, 귀금속이나 쌀, 비단 같은 거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만덕은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걸 준 적이 없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세금을 냈고, 내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거기에 성의껏 응해줬을 뿐이다. 솔직히 시장에서 상인들에게 매출 비례하여 세금 걷는 문제도 그가 솔선수범하여 협력하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난항을 겪었을 거고 말이다. 나는 그래서 송덕비를 만들기 위해 소문내는 역할을 저 녀석에게 맡김으로써 그를 신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고 말이다. "세상 살면서 세금을 자진해서 정직하게 납부하려는 상인은 자네가 처음일세. 덕분에 나는 시장을 만들어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지." "저는 사또께서 죽으라 명하시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각오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걱정이 되는군." "무엇이 말입니까?" "자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를 따르면, 진해현의 다른 상인들이 자네를 가만두겠나?" 이건 진심으로 이 남자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어린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친구들이 잘못한 걸 고자질하는 애는 따돌린다. 어른이 되고 보면 '따돌림'이란 게 별거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 따돌림은 엄청난 폭력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어떤 의미로 자아 형성이나 진로 계획, 고민 상담 같은 게 필요할 때 '부모'보다도 중시하는 게 또래 친구이다. 이 관계가 어긋나게 되면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까지 하는데. 회사,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흐름이 있다. 공익 비리 큰 거 제보하면 포상금을 수십억 원을 주기도 하는 이유가 그런 거 때문이다. 김만덕이 시장에서 세금 내는 거에 협력하는 것, 상인들 재산에 세금 매기는 거에 적극 협조하는 것 모두는 자기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 거다. 그는 내 말을 듣고서 씨익 웃었다. "장사꾼은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 저울에 올려놓고 거래를 합니다. 저는 사또께서 장차 삼정승까지 올라가실 분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네." "부임하시고 고작 반년이 안 되었음에도, 백성들의 삶을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바꿔준 분은 동서고금 어디를 보아도 유래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더불어 장사치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관직을 걸고 시장을 여신 분 또한 사또 말고는 없지요. 그러니 저는 사또께서 장차 큰 뜻을 품고 날아오르는 붕새, 대붕처럼 뜻을 높이 펼치실 거라 확신합니다." "나를 따라가는 게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 말이지?" "한낱 수노(노비의 우두머리)도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집니다. 영의정 대감을 모시는 수노는 노비문서 상에만 노비라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영의정 대감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리에게도 선물을 받으며... 품계를 가진 관원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를 잘못 대했다가는 영상 대감께서 어떤 호통을 치실지 모르니까요." 저 말이 맞기는 하다. 대감집 노비라고 다 대기업 사원처럼 잘 나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노비 중 우두머리가 되면 나름의 권력이 생기는 거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시란 '왕을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노비'에 불과한 건데. 상선 영감 정도 되면 그 앞에서 영의정이라도 쩔쩔맬 때가 있다. "제가 사또를 따라간다면 저 역시 큰 상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중에는 사또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진해현에 새로 오시는 현감께서 저를 함부로 못하게 되실 수도 있겠죠." "...... 다른 놈들은 쌀이니, 비단이니, 금이니, 은이니 하는 뇌물을 바치는데. 자네는 나에게 계속해서 목숨을 뇌물로 바쳐온 셈이군." "싫으십니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저 녀석이 나한테 목숨을 바쳐준 덕분에 고을 개혁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 뜻을 펼치는 데에도 김만덕의 힘과 지혜는 너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녀석의 헌신을 거절해? 헌신한 만큼 보답해 주면 되는 거지. "...... 오늘 본관의 일정이 비네. 그리고 마침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기도 하고. 그러니 자네 집에서 술 한잔 대접받았으면 하는데." "영광입니다, 사또." ** 김만덕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과상을 내오라고 시켰다. 사람이 오면 마실 거를 주는 게 인지상정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그걸 들고 온 여자에게 저절로 눈이 갔다. “덕과 학문이 높으신 사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녀는 김겨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