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거를 잘 봐서 높은 관직에 올라갈 생각이 없다. 그냥 적당한 성적을 거두고, 적당한 벼슬을 받은 뒤 관리 생활을 3년 정도 하는 거다. 그리고 낙향. 세종대왕님 눈에 띄었다간 황희 당하기가 십상이니까. 미쳤다고 황희 정승처럼 '음머, 나는 누렁소야!' 거리며 혹사당해야 한단 말인가? "시제를 발표하겠다!" 시제가 뭔지 몰라도 나는 적당히 쓰고 나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뭐로 나올지는 궁금한데. 시에 대한 감상을 논하라고 하려나, 유교의 가르침에 대해 논하라고 나오려나... 옆에 있는 세상 진지한 표정의 다른 녀석들이야 본인이 자신 있는 분야 문제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겠지만... 나야 뭔 문제가 나와도 솔직히 상관없는 것이. 여기까지 온 이상 과거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어서 더 바라는 게 없으니까. 게시판을 보니 큰 글씨로 알아보기 쉽게 문제가 적혀 있다. 그런데 문제가 어제 만난 통통한 젊은 선비와 대화할 때 나온 것과 비슷한 주제인 거지? [썩어빠진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어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격양가를 부르고 있다. 뭇 선비들은 공맹의 도리에 맞게 나라를 다스리며, 임금이 덕을 갖춰 조선이 바로 섰다고 논한다. 이에 대하여 본인의 의견을 논하라.] 조선의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리학이 아무리 '충언'하는 신하가 되라고 강조해도 말이다. 임금도 결국에는 사람이다, 사람. 그러니 잔뼈가 굵은 재상도 아닌 이제 겨우 벼슬에 오르려는 애송이가 팩트에 기반한 폭격을 날리면... 속이 뒤집어지기 마련이지.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아부만 하면 간신으로 간주 감점 요인이 돼버릴 것이니, 이 문제에는 이렇게 답하는 게 좋겠다. 임금의 좋은 점, 정치가 훌륭한 점 등 칭찬 95%, 자기 생각을 담은 조선의 개선점 5% 정도 이렇게 말이다. 그래, 이번 전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황희처럼 갈려 나가는 누렁소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지.'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부족한 점을 논하고 거기에 개선 방안까지 덧붙인다. 그렇게 하고 내가 정9품 벼슬을 받게 되면, 나에게는 몇 년만 일하고 정치판을 떠날 자격이 생기는 거다. 아니, 잘하면 바로 떠날 자격이 생길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조선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말하지만, 전하께서는 이에 만족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성인(공자)께서도 성인 개인의 모든 행실을 법도와 도리에 맞게 행동하는 경지에 이르셨을 때의 나이가 70이었는데,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서야 어떻겠사옵니까?] 나 혼자 잘해서 성적 잘 받는 건 그나마 쉽다. 그렇지만 반 전체 평균을 끌어올리는 건 몹시 어렵다. 나 말고도 다른 녀석 30명을 끌고 가야 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조선 초기 세종 시대 기준으로 천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오죽할까? 모두가 만족하고 사는 태평성대라고? 어림도 없지. [전하께서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어 고려 때의 과중한 세금을 줄여주시니, 가난한 백성들이 이전보다 살기 좋아진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잔잔호에 해당하는 대다수 백성은 밭 한 마지기가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들 3호(가구)씩을 묶어서 5결의 토지를 가진 이들과 동일한 세금을 부과하다니. 이것이 과연 옳다 할 수 있습니까? 잔잔호들에게는 벼룩의 간을 떼어먹히는 심정일 것입니다.] 조선의 세금은 다른 나라에 비교해도 아주 비효율적인 구조다. 세금을 적게 거둬서 망정이지, 옆 나라 일본처럼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데 세금 구조까지 비효율적이었으면... 조선은 500년이 아니라 100년 안에 망했을 거다. 이게 참 웃기다 못해 슬픈 건,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자기들이 백성을 나름 위한다고 내놓은 결론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세금 제도.'라는 거다. 이걸 아는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당연히 직언을 올려서 고치라고 해야지. 물론, 이 답안지가 아무리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시라 해도 '젊은 애가 건방지다.'라면서 무시당하고 말 확률이 아주 높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는 게 조선의 선비 정신이자, 대체 역사 소설을 잔뜩 읽은 독자의 도리지. [더불어 전하께서는 벼농사, 보리농사만 짓는 백성들이 공물(특산품)을 바치는 것이 어려울까 봐 사찰을 통해 대신 바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만... 사악한 사찰의 승려들은 이걸 이용해서 백성과 고을에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말하면 방납이다. 방납이라는 건 세금을 직접 내는 게 어려우니까, 대행업체를 써서 납부하는 건데... 문제는 이 미친 승려 놈들이 수수료를 300%, 500%씩 받아먹었다는 거다. 세종 시대 이후, 그러니까 선조 시대의 명재상 류성룡의 말에 따르면 방납을 안 하면 쌀 1되만 받아도 충분하지만, 방납으로 바치게 되면 쌀 18되(그중 17되는 수수료)를 바쳐야 한다고 했다.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조선 초기에는 이 짓거리를 사찰이 했다는 거다. 세종대왕님도 만능 초인이 아니라서 이런 사정까지는 몰랐던 거고. 백성을 위해 한다는 것이 역으로 백성을 죽이는 결과로 나타난 거다. 손주를 아끼는 마음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복숭아를 주면 손주가 죽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옛말에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 하였습니다. 지금 조선의 잘못된 세금 제도는 백성들에게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밝게 보시고, 백성들에게 성은을 베푸시어 부패한 세금 정책을 폐지 하십시오.] 엿같은 방납 제도만 폐지해도 백성들의 수입은 확 늘어날 거다. 지금은 월 200 벌어 세금으로 매달 100만 원 뜯긴다고 치자. 방납제도만 정상화시켜도 세금은 60만 원으로 줄어든다. 그러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이전의 100만 원에서 140만 원으로 늘어나게 되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법으로 금한 장시(시장)를 활성화해야 하며, 고을의 수령(사또)이 이를 통제하면서 세금을 걷어야 합니다. 아니면, 백성들에게 쌀로만 세금을 걷고 걷은 쌀로 공물을 사들이는 제도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르며 전하의 성은을 찬양할 것입니다.] 좋은 임금, 나쁜 임금의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백성들 지갑에 들어오는 수입을 늘려줬느냐, 아니면 줄여 버렸느냐다. 나를 잘 살게 해주면 좋은 임금이고, 나를 못 살게 만들면 나쁜 임금이지. 이제 다 썼으니 나가자. 답안지를 곱게 접어서 시험관에게 넘겼다. 전시다 보니 시험관의 입은 복색이 붉은색 관복이다. 이는 정3품 이상이 입는 관복. 아주 높으신 분인 것 같다. 게다가 허리가 완전히 굽은 곱추인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원칙 성애자 허조라는 인물인가? "...... 다른 유생들은 답안을 작성하느라 바쁜데, 자네는 참 건방지군. 요새 젊은이라서 그런가 생각이 아주 짧아 보이는군." "송구합니다." "송구하다 말하면 끝날 일인가? 나 때는 자네처럼 답안을 빠르게 작성해서 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여튼, 요새 젊은 것들이란..." 원칙 성애자, 달리 말하면 꼰대 중의 꼰대라 이건가. 상관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부류 베스트 원이다. 이 사람, 진짜 별의별 거를 '원칙' 따지면서 거부했다던데. 밑에서 모시는 관원들은 얼마나 시달렸을까? 나 역시 저 사람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대감께서는 부디 이 젊은이의 무례를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그래, 뭐 그런 걸로 하지. 어차피 이 시험에서 정9품이 되든지, 종6품이 되어 참상관부터 시작하든지... 그건 다 자네 팔자니까." 정9품만 되어도 행정고시 합격자와 동일하고, 종6품이면 각 부서의 국장급 공무원, 회사로 따지면 이사 이상 되는 높으신 분이다. 합격 등수에 따라 차이가 이리 심하니 다들 심각한 얼굴로 죽어라 답을 쓰는 거지. 관직 오래 할 생각이 없는 나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말이다. ** 전시는 대체로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온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순위표가 공개되었다. 나는 다른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밑에서부터 내 이름을 찾았는데... "...... 왜 내 이름이 안 보이는 거지?" 애송이가 하기에는 부적절한 충언을 진탕 써놓은지라, 병과(11~33등)로 말석에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면 설마 을과(4~10등)라는 말인가? 을과 합격자 명단에도 내가 없었다. 다음은 갑과(1~3등)다. 그리고 보게 된 갑과 자리, 정확히는 장원급제자 자리에 내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 시발." 욕이 절로 나왔다. 아니, 내가 장원이라고? 을과 정도만 되어도 벼슬 안 맞는다고 도망칠 수 있는 등수인데. 내가 하필 장원급제라고? 조선에서 장원 급제한 놈은 어지간하면 당상관(세종이 직접 부리는 노예)이 되는 건데. 아니 이게 무슨 참사야. 그러거나 말거나, 내 주위는 희비 교차가 한창이었다. "내가 아원(차석)이라니! 어머니! 이 아들이 해냈습니다!" "...... 붙은 건 좋은 데 왜 을과냐... 한 등만 더 높았어도 정7품인데." "이제 내 세상이다! 으하하하하!" 닥쳐, 제발... 제발 입들을 좀 닥치라고. 나야말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악쓰고 울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화문에서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우리를 데려갔다. 과거 합격자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절차를 밟기 위해서다. 나는 장원 합격자이니만큼 임금에게 직접 어사화를 수여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어, 그런데 왜 임금 얼굴이 이렇게 익숙하지? 아, 어제 봤던 그 선비... "...... 죽헌, 아니 김대붕. 자네의 충언은 아바마마께서도 아주 감명 깊게 들으셨다네. 부디 그 지혜로 과인을 평생 보필해 주기 바라네." ...... 시발 내가 세종의 종신 노예라고... "장원에 급제한 김대붕을 종6품 진해 현감을 제수한다." 심지어 지방관이네, 이게 말이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