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갤러리에서 말하길 세종대왕님 밑에서 벼슬 생활하는 건 해서 안 될 일이라 하였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최고의 임금으로 꼽히는 세종대왕님 밑에서 벼슬을 하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헛소리냐 싶을 테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세종대왕님은 그 누구보다 현명하며 공명정대하고, 백성을 끔찍하게 사랑하시면서 부하들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완벽한 임금님이 맞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지만... 문제는 이거다. 세종대왕님에게 걸리는 유능한 놈을 종신 영의정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 마치 갤러리에서 특출나게 활동 잘하는 녀석이 어느새 파랗게 변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리고 황희가 그랬던 것처럼 제발 은퇴하게 해달라고 빌면 빌수록 정년퇴직은 늦어지고, 백성을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하시는 세종대왕님에 의해 죽어라 갈려 나가게 되는 거다. 나 역시 이런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종대왕님같이 훌륭한 군주를 모실 수 있는 건 신하 된 자로서 일생일대의 영광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진이 다하도록 갈려 나가다 보면... "신 영의정 김대붕의 사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세종대왕님 밑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게 어언 40년이 되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임금으로 32년간 재임하시고 비만으로 인한 각종 합병증과 성인병으로 돌아가셨지만... 내가 개입한 덕분에 세종대왕님은 지금까지도 아주 정정하시다. 세종대왕님이 건강하시고 오래 사시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내가 그만큼 오랫동안 갈려 나갔다는 거지. 하여 나는 이제라도 자유를 찾으려 한다. "신 이제 나이 들어 허리와 다리에 힘이 없사옵니다. 몸이 쇠하다 보니 이전의 총명까지 다 잃어버려 더 이상 종묘사직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내가 사직을 청한 것만도 벌써 15번째다. 이제 나도 황희 대감처럼 은퇴 좀 하자고. 은퇴한 뒤에 편히 살고 싶다고. 하나님, 부처님, 대역갤의 주딱님 제발... 신하들에게는 종종 악덕 노예주 그 자체가 되시는 세종대왕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며 이번에도 이리 하교하셨다. "영의정의 사직을 불허한다. 영의정은 짐의 제갈공명이자 소하이며 강태공과도 같은데 어찌 경을 놓아 보낼 수 있겠는가."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대과 답안지를... 아니다. 과거 치러 상경했을 때, 정체를 숨기고 내 앞에 나타나셨던 세종대왕님에게 일침을 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거 완전 주딱 보고 징집해달라 애교떠는 꼴이었잖아... '이게 뭐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