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와일드 헌트 이그나투스가 천년만의 잠에 들고 한나절쯤 지났을 무렵. —————!!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끝 모를 울림.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마성. 딱 한 번 들어본 것이지만, 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하다. “조졌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울음소리는 사룡 모르테우스의 비명이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딱히 이상은 없다. 짧게나마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던 덕분인지 오히려 컨디션은 만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진짜 조졌네.” 저 멀리서 일렁이는 마력의 방벽이 보였다. 마탑에 설치된 대 언데드용 방호 마법이다. 혀를 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열리는 문. 콰앙! “도련님!” “일어났냐 카렌. 하긴. 방금 전의 소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긴 하지.”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뭐?”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한참 뒤에 일어나야 할 와일드 헌트가 열흘 만에 재개됐습니다! 분명 이상현상이라고요!” “그렇겠지. 남부의 던전 역류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처럼 말이야.” “태평하게 대답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아니, 될 수 있는 만큼은 싸워볼 생각인데. 이그나투스가 아침 먹고 잠들었으니 해 뜰 때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오러를 순환했다. 약간 남아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덕분에 지금 상황 또한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렌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카렌카렌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렌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말랑한 볼살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이제야 좀 조용해진 카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도망친다면 어디로?” “……으븝?” “우린 여기까지 텔레포트로 한 번에 왔어. 돌아가는 길 따위는 몰라.” “읍! 으븝!” “그래그래. 남아있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자하브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브읍?” 눈을 끔뻑이는 카렌. 이제 좀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간단한 이야기야. 마탑은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 와일드 헌트를 이겨낼 수 없어. 어쩌면 동이 틀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하브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생각이 짧구나 카렌아. 하긴. 거의 평생을 자하브에서만 살았다고 했지. 이참에 잘 기억해 둬. 남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겨우 열흘 전에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느라 비축해 둔 자원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건, 이그나투스 없이는 힘이 부족하건, 그냥 운이 없건. 아무튼 마탑이 지금의 와일드 헌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저 장벽은 부서지고, 모르테우스와 막대한 언데드들이 구덩이를 기어나와 대륙으로 쏟아지겠지. 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이그나투스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테고……. 죽은 이그나투스 또한 새로운 본 드래곤이 되어 와일드 헌트에 합류하리라. 한 마리로도 버거웠던 본 드래곤이 두 마리로 늘어난 와일드 헌트를 과연 제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통 그 자체에 힘이 흐르는 이 세계의 특성상 황실의 무력은 막강할 테니까. 하지만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약해진 자하브는 덩달아 휘청일 테고. 만약 황실마저도 와일드 헌트를 제때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가능성이리라. 와일드 헌트는 막대한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며, 그 탓에 희생자들을 언데드로 삼아 합류시키는 특성이 있다. 굳이 기사를 쓰지 않고 무생물인 용아병을 쓰는 것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여차하면 이그나투스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그래서고. 즉, 막을 타이밍을 놓친 와일드 헌트는 대륙의 재앙이 된다. 본 드래곤이 앞장서고, 과거의 영웅들이 못다 한 전투를 이어가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 이를 막아 세우기 위한 현시대의 용맹한 자들까지 집어삼킨 죽음의 군단. “대륙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겠지. 산 사람들은 오히려 숨어 살아야 할 테고. ……자하브는 그런 상황을 버텨낼 수 없어.” 던전을 막으며 언데드 군세까지 막아낸다? 상성의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히 역량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그리고 결국 4대 대공들이 틀어막던 재앙은 전부 풀려나겠지. ……그 뒤에는 죽지 못해 봉인 당했던 트라고데아가 깨어날 테고.” 천 년 전과 달리, 다시금 트라고데아가 강림한 대륙에는 그를 막아설 능력이 없다. 결국 이 세상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터. 당연히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자금으로 챙긴 돈을 펑펑 써대는 추방 라이프를 보내겠다는 나의 꿈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겠지. “……그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에요 가주님.” “그렇지만도 않아.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 카렌 네가 직접 읽어준 대륙의 역사. 그걸 들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위태롭다.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전생. 지구에서의 삶에서 위기란 기껏해야 미친 강도를 만난다거나, 재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목숨이 위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해 보아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정도? 다만, 핵무기에는 의지가 없고 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반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천 년 전에 망했어야 할 세상을 여러 영웅들과 신들이 힘을 합쳐 꾸역꾸역 살려놓은 것이다. 하나만 풀어져도 대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재앙이 4개나 있으며, 심지어 그중 동부에 봉인된 재앙은 풀려난지 오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행방이 묘연하지만……. “그거 알아? 최근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칼립소 대공가가 멸문하고, 동부의 재앙이 풀려난 이후. 던전의 역류 간격이 짧아졌고, 와일드 헌트의 발생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했어.” “……예?” “물론, 이건 그냥 선후 관계일 뿐, 인과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최악을 염두에 둬보자는 거야.” 재수 없으면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재앙 중 하나가 풀려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풀려난다? “대륙 전체는 몰라도 일단 제국은 못 버틸걸.”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변화라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봉인된 재앙을 가까이에 두고 살아 무뎌진 걸까. 카렌은. 아니, 내가 지금껏 만난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멸망 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뭐어. 나라고 진지하게 모든 멸망을 막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으면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 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카렌. 그 덕에 평소보다 뽈롱한 카렌의 볼을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리며 히죽였다. “그리고 카렌 네가 말했잖아?” “……머를 말인가여?” “귀족의 의무는 외적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아.” 눈이 땡그래진 카렌을 향해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복잡한 일은 얼마 없어. 복잡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간단한 문제거든.” 강대한 적이 쳐들어왔고, 새로 사귄 친구는 푹 잠들어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된다. 짱짱쎈 투명 드래곤……은 아니지만, 푹 자고 개운해진 응애 드래곤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하지만 괜히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렸다가는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당연히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지 않겠어?” “…….” 카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과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꾸벅인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는 하나, 확실히 시야가 짧았네요.” “그래 그래. 알면 됐어.” “허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탑의 시스템은 가주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나가보고 생각해야지.” 용아병을 소모하는 것을 전제로 짜올린 메뉴얼과 직접 몸으로 싸워야 하는 나는 상성이 좋지 않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대륙의 유일한 마탑이다. 즉,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이들이 모여있다는 소리. “마법사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을 나서자, 자연스레 반보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카렌. 방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점점 커지는 전투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인다. 분주하게 달리는 마법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나, 정문에 도착한 순간. 볼 수 있었다. ■■■■■■——!! 이그나투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모르테우스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를 마법으로 폭격하는 마법사들을. 뭐야. 생각보다 할만해 보이는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위쪽. 타나토스의 침상 마법진을 설치할 때 봤던 늙은 마법사. 이그나투스가 없는 지금, 마탑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최고참 제자가 피를 토했다. “쿨럭!” 그리고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던 사슬이 흐트러졌다. 대충 알겠네. 저 사슬은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마도구이리라. 여러모로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실패작 취급 받았다는 대 모르테우스용 마도구. 그리고 지금. 실패작이 왜 실패작인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리라. “쯧.” 혀를 차며 마탑의 외벽을 밟고 미끄러지듯이, 위쪽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커흑! 누, 누구…….” 이그나투스의 대제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자하브 대공이셨습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딜 가든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전장. 아마 이곳이 사령탑이자, 마탑의 모든 마법을 조율하는 곳이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복잡한 마도구들과, 대제자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마력을 토해내는 다른 장로들이 보였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1시간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혹시 그 마도구는 너 혼자만 쓸 수 있는 건가?” 그의 손가락에서 강렬한 열기와 마나를 내뿜는 반지를 가리키자 고개를 젓는 녀석. “아닙니다. 스승님의 제자들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다들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과연. 짧게나마 모르테우스는 제압할 정도는 되지만, 부담이 너무 커서 사람이 못 버티는 건가.” 워낙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다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저 반지는 단순한 가늠좌, 내지는 열쇠 역할. 사슬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는 이 마탑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럼 다른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그리한다면 스승님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만……저희가 상대하는 것은 와일드 헌트이지 모르테우스가 아닙니다.” “즉, 전력을 다하면 모르테우스를 동틀 때까지 붙잡을 수는 있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소리구만.” “맞습니다.” “다행이네.” “……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벽 열어. 전부는 아니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정도로만.” “그게 무슨…….” “모르테우스를 제외한 남은 언데드들.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