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서부(4) “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미친 연금술사를 죽이고,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다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흑마법 저항력을 지닌 나였으나. 그런 나조차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하며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적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함정에 빠지거나, 흑마법사 놈들이 다른 강자를 통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 순수하게 흑마법에 당해 죽을 뻔한적은 없다. 단 한 번.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마법에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마법 이름에 이그나투스가 움찔한다. “……들어본 적은 있는 마법이니라. 허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몸조차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마법이거늘. 에녹. 그대는 방금 말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고 있느냐?” “어.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 수밖에.” “죽음의 신이 조금 특수한 신이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신의 이름이 들어간 마법 아니느냐. 권능의 일부를 담았거나, 적어도 권능을 닮은 마법일 터. 그걸 맞고도 이리 살아있단 말이느냐?” “조금 사정이 있었거든.”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비극의 밤에도 보기 힘든 마법에 당했단 말이느냐.”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칼립소 영지 출신이거든?” “아, 들어본 적은 있느니라. 꽤나 최근까지 본인이 어떤 피를 타고났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사실 아직도 내 혈통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칼립소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말이지. 조금 폭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야 하려나…….” “으음?”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랑 살짝 원수진 게 있어서 죄다 박살 냈거든. 그러다 마지막 발버둥인지 지부장 같은 녀석이 자신을 제물 겸 미끼 삼아 발동한 마법이 타나토스의 침상이었어. 이야.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당시의 일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세로로 찢어진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이그나투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오나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물컹물컹한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당대의 자하브여. 칼립소의 흑마법 지부라고 했느냐?” “엉. 문제라도 있어?” “나름 마탑을 운영하는 입장인 만큼, 흑마법사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약간 더 알고 있느니라.” “오.” “이를테면 칼립소에는 흑마법사 지부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니라.” “……오?” 그럼 내가 상대했던 건 대체 뭐였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칼립소에서의 모든 일이 내 망상일 리는 없잖은가. 가만히 이그나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칼립소에 있는 것은 지부가 아니라 본부이니라.” “본, 부?” “옳다. 대륙에 퍼진 모든 흑마법사들의 고향. 모든 금지된 비의가 집중되는 곳. 신위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 고인 응달……그것이 칼립소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니라.” “…….” 이건 진짜 몰랐는데. 애초에 흑마법사 놈들은 말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문이 별 의미 없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인데. 동시에 조금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던전에서 만난 흑마법사나, 일전에 나를 노리고 자하브 성까지 찾아온 놈들. 녀석들은 나를 보고 고향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불렀었지. 당시에는 그냥 칼립소 출신 흑마법사 생존자인가 싶었는데……말 그대로 내가 놈들의 본부를 박살 냈다는 의미였나.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나보다도 더 어이없어하는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흑마법사 놈들의 본단이라면, 신의 이름이 담긴 마법이 있을 수 있지. 놈들의 수장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면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을 아닐 것이야.” “허어…….” “다만, 거기서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만……아무래도 정말 모르고 있었던 눈치구나.” “그야 흑마법사 놈들과는 대화가 성립하질 않으니까. 수준 낮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이런.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뭐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꾸나. 아무래도 에녹 그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많은 모양이니.” “……그러게. 일단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어차피 이그나투스를 통해 나중에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이쪽 같으니까. “우선은 종이가 필요한데.” “메이킨. 가져와 주겠느냐?” “네? 네…….” 자연스레 주변에서 어버버거리는 제자, 메이킨을 부려 먹는 이그나투스. 메이킨이 종이를 찾아 잠깐 나간 사이에 말했다. “타나토스의 침상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직접 당해본 입장에서 한번 설명해 줄게.” “그게 더 좋겠구나.” 쉽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침상을 일종의 즉사 마법이다. 다만,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껙! 하고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대로 걸리면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그냥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사 마법인 것이지. “마법이 시전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나는 흑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대부분은 못 버틸 거야.” 나와 함께 갇힌 몇몇 흑마법사 놈들의 최후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놈들이 눈을 감고, 잠에 든 순간. 육신이 빠르게 나이를 먹더니,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잠자듯이 조용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던가. 타나토스의 침상은 이를 위한 마법이었다. 아무런 고통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잠에 들고 천수를 다하여 생을 마감할 뿐. “근데 이건 수명이 100년 남짓한 인간이니까 몇 분만에 죽음에 이른 거잖아. 수명이 훨씬 긴 드래곤이라면 중간에 마법을 끊어 빠르게 필요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거 아냐?” “……가능성은 있겠구나. 듣자하니 타나토스의 권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닮은 마법이니 개량할 여지는 있을 터.” 그렇다. 타나토스의 침상은 즉사 마법이라면 즉사 마법이지만, 그 원리는 결국 시간의 가속에 있다. 우리는 흔히들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니.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어가는 것들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아마 타나토스의 침상을 처음 개발한 마법사는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인 거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메이킨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 여기 종이 가져왔어요 스승님!” “잘했느니라. 어서 여기 있는 에녹에게 건네주거라.” “네!” 메이킨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들자마자, 기억 속의 풍경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 그렸다.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이라 그런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두터운 밀실과, 그 안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을 옮겨 되는대로 전부 옮겨 그리고는 이그나투스에게 넘겼다. 조용히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신이라는 것을.” “뭐, 악신이라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물리쳐야 할 사악이 아니니라. 오히려 세상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축이거늘. ……타나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느니라.” “엉?” “이해하느니라.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니라. 타나토스는 죽음은 완벽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느니라.” “미친놈이잖아?” “비극의 밤 이후로, 살아남은 신들은 북부의 만신전에 틀어박혔기에 신언을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를 뿐. 사실 필멸자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항상 미친 것들이었느니라.” 피식 웃은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타나토스는 자신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 곧장,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렸느니라.” “자살했다는 소리네.” “허나, 죽음의 신이라 금방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더구나. 아마 잠깐 잠들었다 깬 감각이 아닐까 싶으니라.” “……설마?” “그러하니라. 에녹 그대가 그린 마법진을 보아하니, 타나토스의 침상은 타나토스의 죽음과 부활을 마법적으로 해석한 것 같구나.” 기억나는 대로 그린 마법진. 이를 내게서 받아 든 이그나투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이 몸이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니라. 같은 마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슷한 효과는 나올 터.” “그럼?” “……놀랍게도 지난 몇백 년간 고민한 모든 방법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마우면 보수는 2배로 줘. 일부는 금화 말고 보석으로 주고.” “얼마든 그리 하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 ……다만, 아무리 나라도 100만 골드 어치의 금화와 보석을 추가로 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느니라.”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알려준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뒷말 나오면 곤란하니,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아, 그리고 기존 계약은 파기해도 이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며, 내게 다시 돌려준 오나홀을 흔들며 물었다. 판타지판 오나홀? 이걸 어떻게 참아. 한번 사용해 봐야지.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건만, 어째 이그나투스의 반응이 영 미묘했다. “애초에 주려고 만든 것이니 괜찮다만……시료를 따로 채취할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마도구가 필요한 게냐?” “응?” “에녹. 그대에게는 미색이 뛰어난 종자가 하나 있지 않느냐?” “???” 의아해하는 내게 보란 듯이 턱을 까딱여 카렌을 가리키는 이그나투스. 그 말뜻을 눈치채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카렌은 오나홀이 아니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