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사실 아니다. 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와! 공개 수치플!’ 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 “후우.” 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너. 모르는 거야?” “뭐를.” “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뭐야. 알고 있었어?” “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어.” “……어?” 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쐐애액……퍼억! “아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델빈 교관.” “예, 예 대공 각하.” “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아론.” 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명에 따르겠습니다.” 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 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빠악! “흐약!” “호칭.” “뭐, 뭐가?” “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어…….” 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라방.” 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안 된다 이 미친년아.” 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