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일리가 있군.”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 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뭔데.” “제벨라 아가씨입니다.” “음?” “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 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어. 뭐, 그런 거지. 응.” “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 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그 정도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 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뭐, 그 정도야…….” “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 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유리아 자하브였다. 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이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그, 그러죠.” 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거 기대되네요.” “그러니?” “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