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와일드 헌트(3) 주먹이 휘둘러지고 뼈가 부서진다. 피는 튀지 않았으나, 녹슬고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그 대신이라는 듯이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콰앙! 사람의 주먹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 실제로 어지간한 폭발계 마법과 맞먹는 위력에 스켈레톤이 들어 올린 방패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가장 먼저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 뒤이어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린다. “이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중 하나가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에녹의 전투를 지켜보며, 에녹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마법사 입장에서 시야 가려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흙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것은……. 화륵!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부른 귀화가 아니다.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이그나투스의 브레스, 혹은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염. 전신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불길을 토해내는 에녹. 그가 방금까지 성문을 닮은 거대한 쌍 방패를 부수고, 드워프로 보이는 작지만 두터운 스켈레톤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린 중이었다. 그리고. 콰직.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부스러지는 두개골. 어두운 밤이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 귀화가 에녹의 붉은 불길에 짓눌려 흩어지는 모습이. -와아아아! 마탑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녹의 건재함은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녹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피로를 잊고 활력을 북돋는 마법. 전투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를 회복하는 마법. 죽음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정화 마법. 장기간 사기에 노출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마법. 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에녹을 강화하는 마법이 차례로 갱신된다. 에녹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그 위로 투명한 실드가 둘러진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으며, 근육과 뼈에는 오러와 반발하지 않도록 정제해 낸 특수한 마나가 들어차며 육신을 보다 강건하게 만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명백히 둔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에녹의 전투는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래. 몇 시간이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 바스라진 뼛가루는 흩날리는 사기에 휩쓸려 안쪽으로 돌아간다지만, 부서진 무기는 그러지 못했으니. 에녹의 뒤에는 어느새,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충 던져둔 무기가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검, 활, 창, 도끼, 대검, 방패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에녹의 등 뒤에 늘어선 모습은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수백은 진작에 넘었다. 이미 천을 넘어선 부서진 무기는 그 이상의 스켈레톤이 에녹의 손에 부스러졌다는 증거이니. 말 그대로 일기당천이요. 아무리 일대일 상황으로 몰아갔다지만, 홀로 군대를 틀어막고 있으니. 만부부당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끝없는 결투이자, 홀로 치르는 전쟁. 놀랍게도 그 승기를 거머쥔 것은 에녹 자하브였다. “대공……제국의 수호자…….” 그제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자하브가 어째서 대공 가문인지. 사람의 몸으로 어리다지만,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맞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에녹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친 것은 사실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걸까. 집사복을 입은 은발의 소녀. 카렌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녹을 서포트하는 중이었다. 작은 상처가 나면 포션을 뿌리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대충 던진 무기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며, 가끔 에녹이 요구하는 바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에녹이 싸우는 동안, 카렌 또한 쉬지 않고 그를 도왔다. 덕분에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환호하며,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사이에도 냉철한 마법사들의 머리는 희미한 불안을 떠올리고 만다. “……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모르지. 다만, 우리보다는 훨씬 오래 버티실 수 있을 걸세.” 고위 마법사들은 전부 모르테우스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하위 마법사들만으로 방벽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런 상황에서 홀로 언데드의 군세를 감당하는 에녹의 무력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끼고, 쥐어짜 에녹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게 슬슬 마나도 떨어져 가고, 회복 수단도 부족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져나가는 사이. 에녹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어느새 균열 너머로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스켈레톤. 날카로운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팔을 뻗는다. 순간적인 가속이 어찌나 빠른지 에녹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 순식간에 잔 상처 여럿을 입은 에녹. 이대로 시간을 끌면 균열 너머로 또 다른 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을 터. 에녹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을 벌렸다. 무방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향해 세검을 꽂아 넣는 스켈레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가 목젖에 닿는 순간. 짐승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에녹이 몸을 틀었다. 목표를 잃은 세검은 목이 아닌 구릿빛 어깨에 박히고, 그나마도 단단한 근육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칼에 찔렸다기보다는 몸으로 칼을 붙잡은 것 같은 모양새. 에녹의 입꼬리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잡았다.” 그 말과 함께 세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에녹. 뚜둑. 강인한 악력에 그대로 얇은 검신이 부러지며, 당황한 스켈레톤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 히죽이는 에녹의 이마가 스켈레톤의 잿빛 머리를 단번에 산산조각 낸다. 무너진 잔해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깨끗해진 전장. 그 너머로 새로운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녹이 어깨에 박힌 세검의 반절을 뽑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사실 에녹의 육신에 박혀있는 무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허벅지에는 단검이, 팔뚝에는 부러진 단창이,옆구리에는 깃이 삭아 없어진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등에 박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사람 몸이라는 건 무기를 주렁주렁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에 막혔으며. 그나마도 특유의 재생력과 회복마법의 영향으로 출혈까지 멈췄으니까. 고통은 있어도 생명이나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허나, 문제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정화하고 몰아내는 중이라지만, 그 틈을 타 죽음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가운 냉기는 자하브의 불길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약화시킬 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와일드 헌트의 스켈레톤들이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으니. 지성을 잃긴 했으나, 그 육신에 쌓아 올린 기예는 어지간한 기사를 상회하는 것. 마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용아병을 대신할 골렘을 만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신참이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본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스켈레톤들의 무위에 처참히 박살 나고는 깨닫는 것이다. 근접 전투에는 문외한인 마법사들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무술. 이를 펼치는 신대의 전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말이다. 척 봐도 실력자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움직임과 달리, 에녹에게서는 이러한 체계적인 동작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본능과 힘. 그리고 약간의 운에 몸을 맡기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과도 같은 전투. 지금까지는 잘 버텼을지 몰라도, 에녹은 분명 언젠가 쓰러진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가 마법사들로 하여금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었으나……. 불안 속에서만 차오르는 열기 또한 분명 존재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짐승. 하지만 그 짐승은 이미 신대의 영웅들을 무수히 도살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근거가 없는 확신이자, 이성을 추종하는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아.” 어느 한 마법사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희망.” 밤은 어둡고,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허나, 지상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화르륵! 에녹 자하브가 피워올린 열기. 그 희망에 마법사들이 홀린 것처럼 진작에 바닥난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탑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태양은 떠올랐다. 저 하늘이 아닌, 지상에. *** 움켜쥔 주먹이 무겁다. 숨을 토해내는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며, 거칠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그럼에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 휘둘러야 한다. “아아아아아……!” 악에 가까운 기합 소리와 함께 뻗은 주먹이 쌍검을 든 스켈레톤을 향해 내질러진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은 제대로 된 속도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뼈만 남은 저들보다는 빨랐으니. 대응할 틈도 없이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카앙! 기묘하게 휘어진 쌍검이 내 팔목을 양쪽에서 베어내려 든다. 마법사들이 걸어준 방어 마법. 그리고 다급히 손목을 꺾어, 검신을 쳐낸 덕에 살짝 시큰하고 말았지만. 중요한 것은 단번에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 몸에 둘러진 실드와, 단단하게 긴장시킨 근육을 믿고 성큼 다가간다. 카직! 어느새 쌍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내 양어깨를 향해 노렸으나. 실드를 부수며 느려진 검 끝이 살갗에 닿는 순간. 빠르게 몸을 꺾어 베이는 각도를 흩트린다. 그렇게 근육을 갈라놓아야 했을 쌍검이 붉은 실선만을 남긴 순간. 쿠웅! 강하게 구른 발이 녀석의 발을 박살 낸다. 좁은 공간에서 거리를 좁혔기에 발을 놀릴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 발을 잃고 넘어지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무릎으로 으스러뜨린 뒤. 다음으로 넘어올 스켈레톤을 대비했으나. “……허?” 어째서인지 푸른 귀화만 균열 너머로 일렁일 뿐, 다음 스켈레톤은 나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어째서 다음 스켈레톤이 방벽의 균열을 통과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니미.” 고개를 한껏 꺾어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머리. 주둥이는 길쭉하고, 머리에는 왕관을 닮은 뿔이 자라 있었으며. 눈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한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모르테우스.” 장로급 마법사들은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인지 녀석의 몸은 타오르는 사슬로 빈틈없이 결박되어 있었다. 더 이상 공허한 울음소리를 내지도, 육중한 거체로 발버둥 치지도 않을 뿐.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생자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지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시선. 완전히 미친 줄 알았던 사룡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막아낸 장벽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 서부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요즘 들어 망나니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이 튀어나왔다. “뭘 봐. 눈 깔아라. 뒤지기 싫으면.” -……? 뼈만 남은 모르테우스가 귀화를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