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서부(2) 바깥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울음소리. 이를 듣자마자 이그나투스가 지금껏 보여준 나른함을 내다 버리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화아악! 밝은 빛이 터져 나온 뒤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 ……방금까지 내게 착정 마도구라며 판타지판 오나홀을 건넨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살짝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꽤나 심각했다. 이그나투스가 멀리 날아가자, 그녀의 거체에 가려져 있던 저 멀리의 풍경이 보였는데. “세상에. 카렌카렌아 저게 다 뭐냐.” “……혹시 서부에도 던전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까?” 까치발을 서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카렌도 놀란 모양.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 중앙에는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남부에서 나고 자란 카렌이 보기엔 던전 역류처럼 보이겠지. 뭐어. 서부에서 자란 메이킨의 눈에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와일드 헌트네요. 요즘 들어 주기가 짧아졌단 말이죠.” “와일드 헌트?” “네. 남부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서부에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서 못다 한 전쟁을 이어가거든요.” “……비극의 밤.” “맞아요.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에게 맞선 이들이었죠.” 비극의 신은 단 한 명뿐인 신도의 바람을 위해 세상을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그렇게 강신하여 오랜 시간 암약하며 준비를 마친 뒤. 이 모든 것을 일제히 터뜨려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으니. 비극으로 뒤덮인 세상은 어두운 밤과 같았기에, 당시의 전쟁에 비극의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행히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수많은 신들이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영웅들과 이름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서부의 재앙은 한때 비극의 신에게 맞서 일어선 이들을 언데드 삼아 군세를 일으켰으니. 한때는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었으며, 그렇기에 비극의 밤에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드래곤. 그중 유일하게 종족을 배신하고 비극의 신에게 붙은 자. 사룡 모르테우스. 아마 저 멀리서 언데드를 이끄는 본 드래곤이 모르테우스일 것이다. 카렌과 힐다를 통해 기본적인 대륙의 역사를 배웠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직접 본 모르테우스와 그의 군세가 일으킨 와일드 헌트는……. “던전 역류보다 빡센 것 같은데? 마탑 개쩌네. 이걸 막고 있을 줄이야.” “아핫……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하브 대공 각하. 하지만, 마탑의 일원인 제가 보기엔 던전 역류 쪽이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 물량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수준이 달라 보이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듯, 맹렬히 몰아치는 불길한 눈보라. 사기(死氣)가 가득 담긴 눈보라와, 그 속에서 귀화를 번뜩이는 언데드들이 마탑의 방벽에 막히고, 고위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럽다. 내가 경험해 본 오크들의 웨이브와 비교하면……평균 무력은 비슷하지만, 언데드와 달리 오크들은 전략을 구사하니 직접 전투력은 오크들이 위. 하지만, 저 사기로 가득한 눈보라가 문제다. 흑마법사 놈들과 싸워봐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런 음침한 기운은 미리 대비하거나, 면역이 없는 이상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마 실제 위협은 언데드 쪽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거기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었다. 우두머리. 오크 워로드는 분명 강력했다. 익스퍼트급 강자가 여럿 있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르테우스는 오크 워로드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 여기까지 들려오는 공허한 울음소리. 동시에 한층 거세진 죽음의 눈보라가 마탑이 시전한 방벽 마법을 깨부순다. 짓쳐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을 향해 주홍빛의 장막이 펼쳐진다. 마탑 차원에서 펼친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펼친 마법. 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는지, 죽음의 눈보라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방벽을 두드리던 언데드들이 방벽이 무너진 틈을 타,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쩌저적. 놈들은 땅에서 솟아오른 용아병들이 막아내며, 마법사들을 호위했다. 이그나투스의 비늘과 이빨로 만들어 낸 이들이기 때문일까. 언데드와 비슷한 구조지만,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실제로 어지간한 언데드들보다 튼튼하고 힘도 좋았기에 잘 싸우고 있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모르테우스가 굵직한 팔을 휘둘러 용아병들을 쓸어버렸다. 콰직! 일반 언데드 상대로는 잘만 싸우던 용아병들이 순식간에 과자 부스러지듯, 간단하게 박살나 버린다. 이를 만족스레 바라보던 모르테우스가 돌연 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크게 도약한다. 하얀 본 드래곤의 몸뚱이가 마탑에 정면으로 들이받기 직전. 콰아아아아! 때맞춰 도착한 이그나투스의 브레스가 모르테우스를 하늘에서부터 찍어 누른다. 거대한 뼈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모르테우스였으나, 결국 뿜어내던 눈보라는 레드 드래곤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날아오르려던 몸뚱이는 바닥에 처박혀 밀려난다. 쿠웅! 여기까지 전해지는 진동.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브레스를 쏘아내며 날개를 펼치더니,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마법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방금 막 기어 올라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르테우스. 모르테우스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마탑의 마법사들이 남은 용아병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일반 언데드들과 달리, 머리를 가루 내도 다시 살아나는 녀석들이기에 굳이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장막이 아닌, 주홍빛 가루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마법. 이에 닿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둔해지더니, 그 틈을 타 용아병들이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 뒤이어 완성된 마법이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용아병 장벽 채로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결국 언데드들은 모르테우스의 뒤를 따라 골짜기 너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량의 용아병을 소모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사상자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러한 일이 일상인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하고 깨진 방호 마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이그나투스는 당당한 자태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세상의 멸망……까지는 아니어도 나라 한둘쯤은 무너질 것 같은 풍경이었으나. 이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돌아오는 이그나투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메이킨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마탑의 모든 시스템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요. 모르테우스와 그가 이끄는 와일드 헌트가 던전의 몬스터보다 더 강할지 모르지만……약점은 확실하고, 마법은 그러한 약점을 찌르기 참 좋은 학문이죠.” “아.”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그나투스가 굳이 기사들을 양성하지 않고, 용아병으로 대체하는지. 언데드 상대로 끝나지 않는 소모전을 효율적으로 행하기엔 막 쓰고 버릴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용아병보다 더 강하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기사를 갈아 넣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 죽으면 언데드의 군세에 추가될 텐데. 무엇보다 메이킨의 말대로 마탑의 모든 시스템과, 마법은 언데드를 상대하기에 특화되어 있다. 미리 준비할수록 위력이 배가 되는 마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는 것이다. 반면, 남부의 던전 역류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같은 것.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극독을 준비했더니, 갑자기 골렘류 몬스터가 진격해 올지도 모르고. 무식한 물리력으로 밀어버리고자 전쟁 병기를 대량으로 준비해도, 난데없이 물리 공격의 대부분을 무효화 시키는 슬라임 계열이나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잖은가. 그렇기에 남부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 이러한 상황이 마법사들 눈에는 끔찍한 도박처럼 보이는 거겠지. “이해했어. 각자의 상성과 고충이 있다는 거구만.” “괜히 초대 황제께서 남부는 자하브 대공께, 서부는 스승님께 맡기신 게 아니죠.” 나와 카렌이 새로운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창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방금 막 와일드 헌트를 몰아내고 온 이그나투스가 레드 드래곤의 형태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창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에엑.” “이런.”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철푸덕 넘어지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잡아들긴 했지만, 내 팔에 안긴 이그나투스는 건어물마냥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흔들. 팔을 살짝 흔들자, 힘없이 따라 움직이는 오동통 꼬리. 방금까지 압도적인 위용으로 모르테우스를 브레스로 밀어버리던 그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조금이나마 회복한 걸까. 내 팔뚝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우, 우선 이 몸을 좀 눕혀주겠느냐? 이 무례는 그 뒤에 설명해 주마.” “어렵지 않지.” 그대로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고는 메이킨이 꺼내 놓았던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늘어진 이그나투스를 내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가로로 눕는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이그나투스의 인간 폼이 워낙 키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 그래도 딱딱한 의자 모서리에 닿으면 아플 테니, 머리 뒤편과 무릎 안쪽은 팔로 안아서 받쳐주었다. 전체적으로 공주님 안기를 한 채로, 조금 전까지 이그나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은 모양새.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경계의 빛이 맴돌았다. “당대의 자하브야. 이게 맞느냐?” “엉? 뭐, 문제 있어?” “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게냐.” “뭐래. 아, 팔이 부족하니 이건 네가 들고 있어.” 이그나투스의 말랑한 배 위에 오나홀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이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그녀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천 년이 지나도 자하브는 자하브로구나.” “글쎄. 지금은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별거 아니니라. 처음 말한 것처럼,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쓰고 나니 순간적으로 탈진했을 뿐……. “아니잖아.” 이그나투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국의 4대 대공이자, 마탑주, 최후의 드래곤을 향한 말투라기엔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나도 지금은 자하브 대공(아님)이잖나. 격은 얼추 맞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그나투스. 마탑이 싸우는 모습을 봤어.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쓰더만.” “혹시 같은 전사로서 연민이라도 느낀 게냐? 걱정말거라, 무술을 학습시키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몸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인형이니.” “그래 보이더라. ……그런데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쓸 거면, 왜 더 강한 용아병이 필요한 거지? 어차피 몇번 쓰고 버릴 텐데.” “그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100만 골드나 들이고, 같은 4대 대공 중 하나인 내 힘까지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용아병을 만들 이유가 뭘까. 천년에 걸쳐 최적화된 와일드 헌트 상대법을 뜯어고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계속했거든?” 채도 높은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세로로 찢어진 위압적인 눈동자. 하지만 묘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이그나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너. 죽어가고 있구나.” “…….” “네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려는 걸 테고.” “…….” 이그나투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에녹이라고 했느냐. 짐승같이 예리하구나. 아주 비슷하게 짚었느니라.” “비슷하게?”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이그나투스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이 몸은 지금 졸립다.” “엉?” “아주아주 졸립다.” “장난치는 거냐?” “아니. 장난이 아니니라.”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을 잇는 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본래 잠이 많은 종족이니라. 그리고 이 몸은 모르테우스를……배신한 아버지를 막아내기 위해,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천 년간 잠에 들지 못했지.” “……어?” “지금 잠들면 그야말로 죽은듯이 잠들 터.” “…….” “후우. 솔직히 말하마. 이 몸 없이 서부가 어떻게 와일드 헌트를 막을지가 걱정이었느니라. 그 대책 중 하나가 강화 용아병이었고. 이제 되었느냐?” 아하. 잠꾸러기 응애용이셨어?